인간·사회

4.19 혁명에 대해

아이루다 2012. 6. 18. 10:05

 

몇 주전에 유진이와 퇴근길 같이 운동하기를 실천하면서 실제로 걷는 시간이 거의 1시간 30분에 육박하고 있다. 만나는 시간이 저녁 7시 부근이니 집에 도착하면 8시 30분 씻고 밥준비하고 먹고나면 9시가 훌쩍 넘는다.

 

아무튼 한시간 반이란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서 걷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운동할 때마다 한가지씩 주제를 정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했고 유진이가 그것에 찬성을 해줬다.

 

그리고 첫날 뜬금없이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두번째 4.19 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참고로 나 역시 이런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세부적인 상황이나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4.19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4.19를 이해하려면 일단 그 당시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해 먼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대한민국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독립을 맞이했는데 그 당시 소련과 미국이 남한/북한 지역을 각자 점령하여 나라를 둘로 쪼개버렸다. 명칭하여 '신탁통치' 라는 것인데 처음에 남한에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했지만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의 찬탁과 남한의 정권을 잡고자 미국의 뜻을 함께한 이승만이 결국 1948년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게 되어버렸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제1공화국을 출범시키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시작하지만 해방/6.25 전쟁등을 겪으면서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이 매우 혼란스러운 정국을 불러 일으켰고 이승만 그 개인 역시 주변인물들의 문제와 본인의 권력에 대한 집착등으로 인해 거의 모든 권력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국민들의 분노가 점점 쌓이면서 민중의 분노는 보이지 않게 점차 임계치를 향해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장기 집권을 꿈꾸던 이승만은 선거 부정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영구독재 국가를 꿈꿨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펴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수족과 다름없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위해 저지른 선거 부정사건이었다.

 

이후 사건은 모두 1960년을 기준으로 써진 글이다.

 

1.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데모

 

훗날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불리운 이 사건은 “학원의 자유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도심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이 시위가 바로 4.19의 도화선이라고 평해진다.

 

2. 3월15일 마산시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선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로 이 사건에서 행방불명 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행방불명되었다가 훗날 바다에서 발견되었는데 머리에 최루탄이 박혀있는 모습이 밝혀져 대규모 전국적인 시위로 불타오르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3. 4월 18일 고려대 시위사건

 

1,2 시위로 인해 격해진 전국의 상황에서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세종로, 태평로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는데 귀가 도중 정치깡패였던 임화수 일당에서 대규모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명 고려대학생 피습사건이라고 불리운 이 사건은 실제로 4.19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4. 4월 19일 당일

 

4월 19일이 되자 서울지역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모두 궐기하여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 같은 역할)로 몰려가 전날 일어난 고려대학생들에 대한 폭행사태와 김주열열사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등을 요구한다. 그러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으로 응대를 하며 수십명의 사상자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피를 먹어 더욱 격렬하게 타오른 혁명의 불꽃은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를 점령하기에 이르른다. 결국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국을 비상상태에 놓는다.

 

결국 시민들의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게 된 이승만은 이로부터 7일 후인 4월 26일 전격적 사퇴를 발표하고는 대통령직을 내놓는다.

 

4.19 혁명 당시 시민의 희생자는 183명에 달한 것으로 최종 발표되었다. 아마도 수천명의 부상자도 있었으리라. 4.19는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속에 부패한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끝없이 독재정권과 부정부패와 싸우면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비록 4.19는 이후 일어나는 박정희의 5.16 군사 쿠테타에 의해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지만 1980년 광주와 1987년 6.29선언을 이끌어 내는 대학생과 시민들의 근본적인 힘이 되어 주게 된 것이다.

 

4.19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나도 몰랐던 몇가지 짧고 가슴아픈 얘기를 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다.

 

==== 여중생의 편지 ====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읍니까.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 4·19 혁명에 참여, 희생된 당시 [한성여자중학교] 학생, 진영숙(16세)의 마지막 편지임. (위키에서 퍼옴)

 

4.19에 참가했던 어떤 여중생이 남긴 편지이다. 유서라고 봐도 될.. 가슴이 많이 아프다. 요즘 애들과 비교하면 시내를 재잘대면서 다닐 16세의 여자아이가 이런 편지를 쓰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이 꽃같은 목숨을 잃었다. 정말 우리는 이런 분들에게 아무런 빚이 없는가?

 

==== 이기붕 일가의 비참한 최후 ====

 

이기붕은 이승만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낸 인물로 부패의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승만 정권의 부패는 이승만보다는 이기붕에 의한 것이란 말이 맞을 만큼 문제가 심각한 인간이었는데 결국 자신의 양아들인 이강석 소위에 의해 4월 28일 이기붕/이기붕 처/아들 모두 응징을 받고 이강석 소위는 자살을 하는 비참한 결말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사라진다.

 

 

 

 

 

* 이승만은 미국으로 망명해 1965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혁명 후 5년. 쫓겨나지 않았어도 기껏해야 5년 유지될 권력이었는데 정말 그 5년의 권력을 위해 그런 미친짓을 하는 권력자의 모습이란 정말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 뿐이다. 아마도 노환에 의한 판단력 상실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닌 듯 싶다.

 

올해는 2012년 4.19 후로 거의 50년이 넘게 지나온 세월이다. 그리고 4.19는 아직도 미완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원하는 그리고 우리를 위하는 정부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아마도 30년이 더 흘러야 할까?

 

지금 지역감정에 기대어 독재정권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새누리당의 기반인 경남/경북이 실제로 4.19의 도화선이 된 마산/대구 시위가 일어난 곳이라는 사실은 정말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아이러니함이다. 우린 과연 무엇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가?

 

 

* 이 글을 쓰는데는 위키를 참고 했음을 밝혀둡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들은 http://ko.wikipedia.org/wiki/4%C2%B719_%ED%98%81%EB%AA%85 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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