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돈과 행복

아이루다 2012. 3. 17. 10:30

 

'황금만능시대'

 

요즘 세대를 표현하는 오래된 말이다. 삶에 있어서 많은 가치기준이 무시되고 오직 돈을 얻는 것만을 좆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표현이면서 또한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을 말한다.

 

요즘 행복에 대한 개념 재정리를 하고 있는데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 많이 버는 사람, 많이 벌 것 같은 사람을 부러워한다. 돈에 가치를 두고 있으니 당연하다.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을 부러워 한다. 그런 사람들은 좋은 직장을 잡거나 좋은 남자를 좋은 여자를 잡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 하고 여자는 명품을 남자는 명차를 부러워 한다. 그런것을 먹거나 가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개별적으로 보인다. 물론 모두 돈에 관련된 것이다. 어떠한 것들은 돈을 벌기위해 부럽고 어떠한 것들은 그렇게 번 돈을 쓰는 것에 부럽다. 결국 세상은 돈으로 거의 모든것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돈만 벌면 나머지 욕망은 다 충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럼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왜 돈을 잘 벌고 왜 돈을 잘 쓸려고 할까?

 

답은 하나다. 행복하기 위해서다. 욕망을 충족시키면 행복하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 진리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 하는 것은 과연 정말 돈을 부러워 하는 것인가? 명품백을 들었거나 맛나고 비싼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은 정말 그 맛을 느끼고 싶거나 그 명품백 자체를 부러워 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린 그들의 행복을 부러워 한다.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가능성이 없을때보다 있을때가 훨씬 높다. 명품백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그만큼의 여유를 말하고 이것은 그사람이 더 많은 행복을 얻을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잠재적으로 말한다. 또한 맛난 음식을 먹는 사람은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잘 따져보면 우리가 부러워 하는 그 모든 것은 바로 행복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갖춰진 다양한 조건들, 즉 능력, 외모, 돈, 자녀를 둔 가정, 좋은 친구, 예쁜 옷, 뛰어난 운동신경, 다양한 지식, 뛰어난 지성능력 모두 그 행복의 가능성을 높이는데 일조를 한다. 요즘은 단지 그  조건 중 많은 부분이 돈으로 충족될 수 있기에 돈의 가치가 높아져 있는 상태이다.

 

획일화된 돈에 의한 행복관 개념에 대해 사회는 계속 경종을 울려대고 있지만 실제로 돈이 있으면 행복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돈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많은 인문서적은 돈에 의한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또다른 가치기준점을 찾아야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건 앞뒤가 안맞는 말이 된다. 그 가치기준 역시 돈과 같은 목적이 아닌가?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다.

 

결국 이 밑바닥에 깔린 행복에 대한 탐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거의 모든 가치가 실제로는 신기루 같은 것이 될 뿐이다. 돈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탐욕과 욕망을 질시하면서도 또다른 행복을 찾는 욕망을 불태우고 있다. 우리는 많은 뛰어난 정신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존경하면서 그들과 같이 살기를 바라며 그들이 쓴 글과 그들이 말한 어록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돈의 가치기준에 함몰된 사람들에게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적한 시골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어느 귀농인이나,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스님들의 모습 그리고 세계 어느 오지에서 그들만의 행복속에 살아가는 순박한 토착민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의 행복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들은 뭐가 다르랴? 그들 역시 땅에서 키운 작은 작물이나 운좋게 잡은 커다란 물고기에 행복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바라는 크기를 줄인 것이다.

 

10원에 행복한 사람과 1억에 행복한 사람은 그것을 얻기까지 과정이 훨씬 힘들다는 차이를 가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바라고 얻고자 하는 그 근본적인 행복에 대한 욕망을 다를까? 고추밭에서 고추가 탐스럽게 열리길 바라는 마음과 시장에서 100원을 더 받으려는 상인이 마음이 다를것이 무얼까 하는 생각이다.

 

행복하려 하니 그것을 얻지 못한 불행이 시작된다. 다들 행복하라고 하니 행복이 최고의 선이며 모든 것의 유일한 가치이다. 신을 믿는 것도 돈을 믿는 것도 고추밭을 믿는 것도 모두 행복하려는 노력이고 근본적으로는 그 심리가 다를 바가 없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타인의 행복을 부러워 하는 마음은 자신이 그만큼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이 행복하면 엄청 관대해진다. 내가 행복하니 타인도 어느정도 까지는 행복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은 절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끝없이 다른 행복을 추구하고 또 행복감을 느끼고 또 언젠가 불행해지는 것이다.

 

행복은 주체는 온전히 본인이다. 내 몸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지 타인에게 주는 행복이 아닌 것이다. 타인이 나의 몸에 행복을 느낀다면 어떤 연결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걱정어린 관심은 바로 내 몸에서 벌어지는 불행이 그들에게 전염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반대로 행복에 대해 빌어준다면 그 행복으로 인해 그들도 약간의 행복을 얻는 가능성이 생기는데 그것은 누구나 복권에 당첨되면 주변사람에게 탕수육 정도는 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 온전히 자신의 주체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함을 느끼는 그 모든것은 타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환경에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돈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듯 게임을 잘하기 위해 열심히 게임을 하듯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워야 하며 근본적으로는 돈을 좆는 삶과 전혀 다를게 없지만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본인의 능력이 많이 부족하므로 100m 달리기 세계 1등을 못하는 것 마냥 그렇게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그건 네 길이 아니다 라고 주입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일종의 도피가 될 수 있다. 나에게 좀 더 행복감을 주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므로 포기하고 다른 가치기준을 삼는 것이다. 세속을 떠나 절에 들어가지 않는 한 아니 절에 들어가서도 돈은 중요한 존재이기에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다른 가치기준을 찾아 다른 욕망으로 채우면 우린 돈이 주는 행복에서 조금 벗어나 또 다른 행복을  스스로에게 선물할 기회가 생긴다.

 

다행히 우린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있다. 무인도에 몇달만 있어보면 우린 라이타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고 흔하디 흔한 부엌칼과 소금의 존재에 대해 너무도 감사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진심으로 평온함을 얻고자 한다면 행복에 대한 욕망을 끊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기에 불가능하다. 의지적으로 숲속에 혼자 평생 사는 것도 결국 비의지적으로 무인도에 평생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순하게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간에 대한 체념을 하며 행복 기준점을 낮추고 주어진 환경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삶이 될 뿐인 것이다. 이 근본적인 이유로 인해 인간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어제 본 법정스님의 말 중 자신이 거의 모든 욕심을 버렸으나 '다기'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는데 이것도 언젠간 버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스님의 말이 100% 맞다고 해도 '다기'와 '돈'의 차이가 뭐가 있겠는가? '다기'는 보통 한달 월급이면 사고 '돈'은 평생 모아도 부족한 차이 인가? 그렇다면 '다기'는 아프리가 어느 부족이 평생 모아도 살 수 없다면 '돈'과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삶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나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버린 어느정도 깨달음을 얻는 분이다.  나는 단지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이 믿는 대로 우리가 과연 정말 의미가 있고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서며 종교에서 말하는 윤회나 천국같은 것을 믿을 만큼 다른 동물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존재인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그냥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면 우리가 깨닫는 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은 허상이다. 동물을 깨달을 수 없다. 왜냐면 우린 그냥 그렇게 수십억년간 지구에서 진화해 왔을 뿐이며 생존경쟁의 DNA가 우리에게 너무도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돈이나 행복한 가정 같은 것들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 있다. 안보고 안 느끼면 욕심도 없어진다. 하지만 생존이라는 본능을 어찌 극복할 것인가? 생존에 대한 가치를 뛰어넘는 순간 우린 죽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끝없는 수탈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외부에서 반드시 에너지 원을 수급해야 한다. 우린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래서 늘 자연에게서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뺏는다.

 

삶의 결론이 절망적이다. 하지만 난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면 한계를 알았다면 그리고 그 길이 결국 끊어진 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그리고 길을 찾는 수단이 달라질 수 있다. 더 생각해야 하겠지만 이제 사고의 흐름은 점점 끝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느낀다. 과연 이 다음의 의식혁명은 또 언제나 찾아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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