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실체의 부재

아이루다 2012. 3. 19. 11:02

 

잠시 여유를 내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좀 둘러보자. 우린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보면 어떤 것을 즐기고 누구를 만나며 또 무엇을 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고 또 정신적 만족은 어디에서 찾고 있나?

 

우리를 둘러싼 도심의 건물들은 하나 같이 높고 그 안의 사람들도 바글바글 하다. 땅위에 솟은 건물은 그야말로 개인이 소유하고 있기엔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고 우린 그 안에서 돈을 지불하고 또 그 지불된 돈 만큼 이득을 얻고 산다. 사람들이 편하다는 이유로 인기가 많은 아파트는 수백만채 지어져 있고 그 하나하나의 가격이 혹은 전체 가격은 도대체 상상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편안함과 이기심에 기댄 탐욕은 끝없는 욕망을 불러내어 왜 그런 가격이 되는지도 모르게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실체는 없고 오직 허상만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즐기는 많은 문화 컨텐츠 들은 점점 더 크고 점점 더 화려하게만 바뀌고 있다. 소박하고 초라한 것들은 이미 우리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며 광고를 통해 노출되지 못하면 아예 그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고 사그라져 간다. 자신을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것들은 점점 실체를 잊고 블록버스터급이니 천문학적 제작비를 들먹이며 그 존재감을 화려하게 들어낸다. TV속 드라마에 보이는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달리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성공하며 그들은 운이 좋게도 다들 돈을 많이 벌지만 돈보다는 가족관계가 중요함을 알고 절대 탐욕을 부리지 않고 오래된 낡은 한옥집에서 적어도 삼대이상이 옹기종기 모여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 역시 실체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관념적 허상만이 가득하다.

 

우리의 먹거리는 이미 음식을 먹는 그 근본적인 영역을 벗어나  화려하고 입맛에 좋게만 만들어진다. 우린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음식을 취해야 하지만 기왕이면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수많은 향신료와 멋들어지게 낸 모양이 음식의 가격을 화끈하게 올려준다. 맛난 음식점이라고 소문난 집은 다들 실제 그 음식의 맛조차 잘 느끼지 못하며 줄을 서서 먹고 또 다른 곳에서는 주먹만큼의 분량의 국수요리가 몇사람의 한끼분 만큼의 비용을 차지한다. 예쁘게 단장된 음식들은 사람들의 휴대폰 카메라에 담겨 또다른 영역인 트위터에 페이스북에 올려져 평가와 부러움을 받는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맛과 돈을 먹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행복해 한다. 남자들은 술을 여자들은 맛난 음식을 꼭 동반해야 하며 술이 들어가 취기가 돌아야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여자들 역시 비싸지만 맛난 음식을 먹어야 하고 반드시 포인트 적립과 같은 작은 이득을 얻어야 한다. 그것들이 그녀들을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남자들은 정치, 스포츠, 돈 얘기를 하고 여자들은 가방, 화장품, 드라마, 돈, 남자 얘기를 한다. 좀 더 나이 먹은 여자들은 아이얘기가 많이 추가된다. 그리고 더 나이 먹은 여자들은 손주 얘기가 추가된다. 그 이야기에서 자신에 관한 얘기는 없다. 모두 다른 것들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우리는 직장에 다니거나 스스로 사업체를 차려 돈을 번다. 돈을 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돈을 얻어내는 일이다. 돈을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은행만 할 수 있다. 그래서 돈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또 돈을 주기 싫어한다. 내 돈을 남에게 주는 것을 많이 싫어한다. 그래도 얻어야 또 내가 남에게 줄 수 있으니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돈을 잘 얻는 사람들은 성공하고 돈을 잘 못 얻는 사람들은 실패한다. 직장에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조직이 돈을 잘 얻도록 하는 행위이다. 심하면 돈을 얻는 개념을 벗어나 돈을 뺏는다. 광고를 통해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며 조용히 그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돈을 뺏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적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광고는 실체의 부재에 있어 가장 첨단을 달리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누구나 광고를 통해 물질의 가치를 부여 받고 신뢰를 얻으며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한다. 광고는 미디어를 움직이는 힘이며 미디어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수 많은 기사와 드라마, 뉴스 등을 쏟아낸다. 가치 중립성에 대한 의견도 가끔 있지만 실제로 시청률이나 구독률은 미디어에 있어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광고에 나오는 소위 연예인들은 다른 매체에 최대한 노출을 많이 시켜 자신의 몸 값을 높이기에 최선을 다하지만 실제 그래서 그런 일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오직 열정을 강조하며 보여지는 이미지 만들기에 최선을 다한다. 여자들은 커다란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얼굴을 갖기 위해 운동을 하고 살을 째는 수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직해 보이는 얼굴을 보험 광고를 하고 예쁜 얼굴은 화장품 광고를 하며 못생겼지만 노출이 많이된 사람은 치질이나 변비약 광고를 한다. 하지만 시작이 광고라는 허상으로 부터 시작되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실체가 있음을 기대한단 말인가.

 

사람들의 소비를 통해 얻는 많은 제품들 역시 우리들 스스로는 필요하고 또 그만큼 유용하므로 선택을 하지만 실제로 잘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생명체로서 인간은 잘곳과 먹을 것과 먹은 찌꺼기를 처리할 공간만 있으면 사는데는 지장이 없다. 우리가 하는 많은 소비행위들은 주로 시간을 보내거나 돈을 버는 보조 수단이나 타인에게 자랑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는 그것을 잘 긍정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한 소비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돈을 버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리 다르지 않다. 인간의 무차별적인 소비는 광고와 연동 되고 직장과 연동이 되며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우린 서로 만나 끝없이 서로를 비교하고 타인의 사는 모습을 보며 못견뎌 하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자신의 모습은 없어지고 타인으로 부터 혹은 어느 누군가가 알려준 삶의 방식으로 부터 자신의 허상을 만들어내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배가 고프고 잠을 자고 배변을 하고 섹스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이고 또 꼭 필요한 행위이다. 좋은 곳에서 자고 더 편한 잠자리에서 자며 깨끗한 곳에서 똥을 싸고 더 예쁜 여자와 더 능력있는 남자와 섹스를 하는 것은 본능에 욕망이 추가된다. 심지어 그러기 위해 타인을 짓밟기도 하고  음해하고 속이고 배신하고 빼앗는다.

 

욕망의 충족은 끝이 없으며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안에서 그것이 마치 최고의 가치인양 느끼며 그런 소비를 즐기는 자신을 또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타인의 가치를 비웃으며 만족해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가치기준은 누가 세운 것인가? 세상에 진정 가치 기준점이 존재하는가?

 

인간과 동물이 다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인가? 아니다. 동물도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언어를 구사한다. 실제로 머리가 좋은 침팬치는 적어도 한달 이상이 계획을 세울 줄 알고 200개 이상의 단어를 구사한다. 당연히 생각도 한다. 그들은 미로찾기 게임을 능숙하게 해내며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을 정확히 표현해 낸다. 그럼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뭔가? 누군가는 신의 존재를 믿는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은 인간이 만든 관념일 뿐.

 

그렇다면 우린 그냥 머리가 조금 좋은 동물이며 그덕에 생태계의 최상단에서 군림하는 존재인가? 우리의 존재가치는 그냥 개나 돼지와 같으며 그 생명의 존귀함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인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모두 스스로에 대한 어떤 존재감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우린 어떤 면에서 동물과 다른가? 결론은 하나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부터 왔고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개는 자신이 왜 개인지 또 왜 개로 태어났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져 태어났고 누군가 밥을 주니 꼬리를 흔들어 준다. 하지만 사람은 오래전 부터 자신이 어디로 부터 왔는지 고민해 왔고 실제로 해결책으로 신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중세시기 유럽은 단 하나의 가치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럼 우리들 스스로가 동물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 대부분 아니다. 세상은 온통 허상의 관념속에 침잔되어 있을 뿐이고 우린 그렇게 만들어진 프레임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 조차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1분이라는 시간만 주어져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전전긍긍하고 손안에 주어진 자그만 기계에 자신을 매몰시킨다.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누군가 만들어 낸 생각을 복사하고 또 오랜 시간 그것을 기억해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한다. 삶에 대한 진지함은 일종의 절대 내보이면 안되는 재미 없는 일이 되어 버렸고 우린 늘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재미없는 그런 대화와 사고를 하는 법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세상을 자유롭고 주도적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처럼 자신의 자유가 아닌 타인이 만들어 놓은 자유의 틀 안에서 선택 되어지고 주도적이라고 느끼지만 누군가 주입시킨 가치에 의한 착각으로 판단된 수 많은 행위들을 하고 산다. 

 

진정 왜 그런것들을 하는지 또 근본적으로 들어가 왜 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조금의 의문도 없이 남들이 믿는 다는 이유로 어떤 오래된 경전에서 말하는 것을 믿고 또 내가 행복하다는 이유로 의심하지 않는다. 또 내가 행복하는데 불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품는 방법조차 잊어 버리고 말았다.

 

우린 어떤 의미에서 개와 돼지와 다른 것일까?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는 평소 많이 먹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다른 것일가?

 

과연 지구를 구성하는 원소가 92종이고 그중 일부가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의 원재료가 되며 그 원소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과연 우리의 진화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을 읽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과연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 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과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또 어디서 부터 왔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출발도 모르고 태생도 우연이며 살아가는 것도 우연인 것인데 왜 자신의 인생에 또 자신의 가치가 회손되는 것을 못참아 할까? 너는 개처럼 산다고 말하면 100명이면 100명 모두 화낼 것이다.

 

우리에게 화를 낼 권리가 어디있는가? 우린 좀 더 머리 좋은 개일 뿐인데. 그럼 너는 머리 좋은 개처럼 산다고 하면 화를 덜 내게 되는가? 아니면 너는 머리 좋고 잘 생긴 개처럼 산다고 하면 나아지는가?

 

데리고 사는 개조차 꾸미는 세상이다. 집에서 키우는 개 마져 허상이 되가고 있다. 앞으로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메트릭스 같은 세상인가? 아니면 아바타 같은 세상인가? 실체와 허상은 이제 서로 범위를 넘나들며 우리를 더욱 혼란하게 할 것이고 또 우린 그 혼란함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허황된 생각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과연 우린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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