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의 정체

아이루다 2012. 3. 6. 10:53

 

이천 년하고도 수백 년 전 고대 그리스에는 우리 시대에 규정된 혹은 그들 시대에 규정한  철학 파가 있었다. 쾌락은 선이라고 말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이성주의와 금욕주의를 기반으로 한 스토어 학파가 그 대표적이다.

 

스토어학파에 대표적인 인물인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대한 책 소개도 한적이 있는데 참 좋은 책이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국민윤리(지금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시간에 이 철학파들에 대해 아주 간략히 배웠다. 내가 에피쿠로스 학파를 쾌락은 선이라고 단순하게 규정하는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리는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고 나름 깊이가 있다.

 

행복에 대한 이야기에 뜬금없는 철학 역사에 대한 언급을 한 이유는 그 오래된 철학자나 21세기에 와서나 모두 우린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존재를 유지해나가는 큰 힘이다.

 

그럼 행복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분류를 시작해보자. 일단 행복은 크게 육체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으로 나눌 수 있다.

 

육체적 행복이라면 쉽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느끼는 식욕, 인간의 영원한 쾌락 도구인 성욕, 좋은 음악을 들을 때의 감미로움, 숨막히는 자연의 장관을 봤을 때 경건함,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한 후의 육체적 상쾌함, 부모와 자식간의 따뜻한 포옹, 연인들의 스킨쉽 등등의 예를 들어볼 수 있겠다

 

정신적 행복이라면 좋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 재미나거나 혹은 좋은 책/영화 등등을 봤을 때 느끼는 만족감, 지난 일년의 평가가 좋아 승진하게 되거나 시험에 합격한 뿌듯함, 오랫만에 연락 온 친구에 대한 반가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만족감, 나의 가정의 안락감 등등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육체적이라고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감각들은 모두 뇌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이란 말은 안 어울릴 수 있겠지만 일단 그 정도 넘어가자.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은 아주 종류가 많다. 물에 빠진 다음에는 살아난 것이 행복할 것이고 크게 상처를 입어 아플 때는 회복된 것이 행복하다. 배가 부를 때보다는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이 훨씬 행복하고 배가 터질 듯 부른데 맛있는 먹을 것을 강제로 먹이는 것은 고통이 된다. 그럼 여기서 잘 생각해볼 힌트가 나온다.

 

행복이라는 것은 일단 가장 크게 부족한 것을 메워줄 때 느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산소가 부족할 때, 몸이 아플 때, 배가 고플 때, 즉 생존본능 충족에 의한 발현이라는 설명이 가장 우선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행복은 모두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친구와 만남이 행복할 때 그것이 무슨 생존 본능과 관련 있다는 말인가?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해 크고 학교를 다니며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관계성을 지속한다. 즉 인간관계는 사회를 이루고 사는 우리 인간에게서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왜 관계를 맺는가 라고 의문이 생긴다.

 

단순하게 정의하면, 관계는 이득을 준다. 혼자 못하는 일을 여럿이서 하고 그 추가 이득을 얻는다. 혼자서 TV 만들어 봐라. 10억을 줘도 못 만든다. 그런데 우린 단지 백 만원 남짓한 돈에 그걸 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 속에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역할 분담은 많은 이득을 가져온다.

 

고대의 원시인들은 더 큰 사냥감을 잡는데 유리했으며 공동으로 방어하는데도 유리했다. 그러다 보니 우린 공동체로 사는 법을 오랜 시간 훈련 받게 되었다.

 

유치원에 간 어린아이들이 처음 다른 아이들과 지내면서 가장 크게 겪는 정신적 충격은 집안에서 내가 유일한 존재였는데 나와 같은 존재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타인과 어울려야만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경험적 진리를 그 어린 시절에 배우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초//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점차 나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인과 잘 지내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당연히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를 말한다.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란 바로 내가 다른사람 보다 뭔가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니 당연히 행복하다. 잠재적 이득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있는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마다 친밀도나 혹은 호감 같은 것이 있다. 이 호감은 잘 이용하면 공짜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 연인들의 사랑은 이 호감이 서로에게 작용하여 극대화 된 상태에 들어간 것을 말하는데, 실제로 그로 인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린 원래 목표인 목숨조차 거는 경우도 있다.

 

내가 누군가에 호감을 얻는 것은 바로 내가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된다. 유머있는 사람, 멋진 외모, 뛰어난 운동신경 모두 호감의 일종으로 굳이 남녀간의 배우자 선택적 관점을 벗어나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만약 이런 생각을 해보자. 5명이서 모두 즐겁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내가 말만 하면 분위기가 깨진다. 당신은 그 상황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절대 아니다. 그 즐거운 분위기에서 내가 차지하는 몫이 있어야 행복해진다. 적어도 즐거운 대화를 못하면서 그 사람들을 계속 보려면 돈이라도 내줘야 한다. 결국 나머지 네 명은 즐거운 대화를 할 능력으로 공짜 밥을 얻어먹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야기가 많이 돌았는데 우리가 타인과 잘 지내는 것이 왜 중요하며 타인과 잘 지낸다는 증거는 바로 즐거운 대화이다. 학창시절 누구나 인기 많았던 친구를 부러워해본 경험이 있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랬던 아이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하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타인과 잘 지낸다는 의미와 나이를 먹은 사람들의 타인과 잘 지낸다는 의미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구체화된 이득관계로 사람을 대하게 되고 때로는 과거의 순수했던 관계를 회상하기도 한다.

 

그래서 친구는 중고등학교 때 만난 사람들까지만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그 당시도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때 친구는 오래되어서 편한 것이다. 적어도 그 친구가 수십 년간 나를 알아오면서 나를 곤란하게 하는 부탁 같은 것을 하지 않아서 검증된 상태란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육체가 힘들게 산을 오른 후 느끼는 행복감은 무엇인가? 우리의 쉬고 싶다는 본능적 욕구를 벗어난 행동.

 

우리의 육체는 쓰지 않으면 퇴보한다. 또한 우린 부지런히 움직여야 먹고 산다. 하지만 이놈의 육체는 늘 비명을 질러댄다. 나를 그만 괴롭히라고. 그만 쉬라고. 육체가 느끼는 행복감과 미래에 대한 투자가 서로 상충하는 상태다.

 

우리의 행복은 이런 식으로 늘 당장의 만족과 미래에 대한 적립이 맞서는 상태인데 보통 우리가 똑똑하다고 말해지는 사람은 바로 미래에 투자하는 사람이다. 베짱이처럼 봄/여름/가을 내내 놀면 겨울에 얼어 죽는 것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그런 미래의 이득을 위해 내가 의지를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 받을까? 산행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좋은 도구다. 나의 게으른 육체를 꾸짖고 또한 멋진 풍경을 보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나의 존재가치까지 인정받는 행동인 것이다.

 

육체적 힘듦을 억누르는 것 치고는 아주 많은 것을 얻는다. 대부분의 운동은 나의 미래의 육체에 대한 투자이며 타인보다 건강한 육체를 더 오래 가진다는 말은 곧 바로 미래의 이득이다. 병원비를 줄일 수 있고 더 오래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즐거운 행복을 느낄 기회를 갖게 해준다. 현재의 육체의 고통에 굴복해서 미래에 대한 투자를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행복을 논할 때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거울신경세포이다. 타인의 상태를 나의 상태로 느껴지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뇌의 기능 중 하나인데 공감의 능력을 발휘 해준다. 이 공감 능력은 우리에게 이타심이란 좋은 생각을 갖게 해주고 서로 어려울 때 돕게 해준다. 물론 이타심의 자신이 속한 부류에 한정되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사회 내에서 나의 존재감 및 미래 안정성을 많이 높게 해준다.

 

많은 예를 든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란 본능적 생존과 깊게 관여되어 있거나 아주 멀리 돌아서 관여되어 있다그리고 전혀 관련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아무리 오랫동안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해 왔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제로 밀림에 사는 여러 동물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단지 우린 좀 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눈앞의 이득뿐만 아니라 더 멀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마치 바둑으로 치자면 3수를 미리 계산하는 사람과 10수를 먼저 계산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히 10수를 먼저 볼 수 있는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 우리 인간은 동물들에 비해 수십 수 앞서 보는 능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