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권태.. 그 씁쓸한 시간유희

아이루다 2012. 2. 24. 11:25

 

며칠전 미국의 대표적인 가수 중 하나였던 휘트니휴스톤의 부고가 전해졌다. 내가 팝송을 많이 듣는 사람은 아니지만 보디가드란 영화와 이집트왕자 주제곡에서 머라이언캐리와 함께 불렀던 그 노래를 기억한다. 지금 내 아이폰에도 그 노래들이 있다.

 

48세의 나이. 아직은 충분히 활동을 해도 전혀 이상이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지식 역시 언론을 통해 얻어진 불완전한 것들이지만 대충 짜맞춰보면 가수로서 큰 성공을 거둔 그녀가 마약에 빠져들고 그 오랜 시간을 마약과 함께하면서 몸과 정신 모두가 망쳐버렸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죽음이라는 최후의 안도가 내려진 것일 것이다.

 

그녀가 왜 마약에 손을 댔을까? 물론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보다는 마약에 접하기 쉬운 환경인 것이 큰 이유중 하나 일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약은 그져 그런 많은 것들중 하나일 뿐 마약 자체가 아니다.

 

동물에 관한 뇌 반응실험 중 특정 부위를 전기자극하면 행복을 느끼는데 그런 상태가 되면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본능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 그대로 행복해서 죽는 꼴이 되어버린다. 마약 역시 이런 효과를 주는 정신성 약물이다.

 

결국 휘트니휴스톤의 죽음은 권태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뤄야 할 목표가 없고 갖고 싶은 것이 없고 힘들게 해야 할 의무도 없다면 행복할 것인가? 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라고 했다. 고통이 있거나 고통을 없애면 오래지 않아 권태가 찾아오는 것이다. 권태는 풍족함에서 오는 병이다. 하루벌어 하루사는 사람에게 권태란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인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권태를 느낀다.

 

첫 직장에 들어갔던 그 기분은 어느새 머리속에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고 직장은 돈을 벌고 나를 살게 해주는 권태 가득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배우자가 처음에 하루만 안봐도 죽을것 같았는데 어느새 있으나없으나 심지어는 없길 바라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이런 종류의 일은 무수히 많다. 처음은 힘들고 그 힘듬이 지나고 평안해지다가 결국 지겨움으로 바뀌어간다. 얼마나 허무한 상태전이 인가?

 

그렇다면 우린 왜 권태로움을 느끼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일단 권태로움은 인간의 뇌가 가진 특성중 하나인 보상심리에 영향을 받는다. 이 보상심리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인데 배고프면 밥을 먹게 하는 힘이며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현재의 힘듬을 감당하게 만드는 원초적 본능이다. 실제 사람에게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무의식의 세계와 아주 작은 부분을 관장하며 주체적인 힘을 가진 의식세계로 나뉘는데 이 보상심리는 무의식의 세계라고 봐야 한다.

 

뇌는 자신이 요구한 내용을 인간이 육체적 심리적 모든 가능한 활동을 펼쳐 달성하게 되면 일종의 약물을 주어서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중뇌의 복측피개영역에서 전뇌의 중격측좌핵 (어렵다;;)으로 연결되는 신경망을 말하며 이 신경회로망을 대뇌보상회로라고 한다. 이 부위는 특정 행동이 만족스러울 때 도파민이란 물질을 분비하여 우리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마약과 같은 약물이나 앞에서 언급했던 전기자극은 이 도파민을 강제로 분비시키도록 해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독성 행위(도박 등등)들도 동일한 원리이다.

 

보통의 이런 보상자극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 버리는데 이것이 다시 자극받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관심을 받으려면 기존 기록을 0.01초라도 단축시켜야 하는 100m 단거리 경주 결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끝없는 자극은 없다. 물론 의지적으로 도달이 불가능하여 끝없이 영향을 받는 것들도 있지만 젊은 나이에 이미 그런 것들을 모두 이뤄내고 나면 처음엔 그 보상체계에 의해 자극받아 행복하다가 몇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질 않게 된다. 그럼 외부 약물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은 꾸준히 열심히 일해 한달 월급 받는 사랑처럼 살 수가 없다. 왜냐면 자신이 운이좋아 한방 터지면 그사람의 월급은 수배의 돈을 10분도 안되어서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운이 좋아 자신이 산 주식이 상한가를 치면 투자한 돈이 충분 할 경우 며칠사이에 자신의 연봉 규모의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 얼마나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버는 돈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인가?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근간으로 한다. 사람이 굶게 되면 뇌는 최후에 자신이 살기위해 심장근육까지 태운다고 한다. 심장이 멈추면 자신도 죽는데도 불구하고 몸에 명령을 내려 자신이 죽는 마지막까지 버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존에 대한 모든 조건이 갖춰져 버리는 순간 인간은 권태의 늪에 빠진다.

 

평생을 생존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사는데 그 조건이 갖춰지는 순간 권태에 빠져 또 다른 고통의 늪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평생 돈을 벌어 은행에 쌓아두고 병들어 죽는 꼴이다.

 

권태에 대한 원인은 뭐 충분히 다른 분들이 분석했을테니 난 여기서 대충 마무리하고 권태로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써보겠다. 역시나 난 전문가가 아니기에 오직 내 생각을 쓴다.

 

권태로움은 근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쏘우라는 영화에서 잔인하긴 하지만 사는것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을 강제로 느끼게 해주는 초단위 생명연장의 순간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많은 영화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순간 순수한 삶의 기쁨을 느끼고 잠시라도 그 오래된 삶의 권태에서 벗어난다.

 

여기서 가장 쉬운 힌트가 나온다.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 첫번째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다. 산소가 없으면 공기의 절실함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사용하는 버스와 같은 운송수단이 없으면 우리의 행동반경은 하루 종일 걸어야 채 100km조차도 못간다. 그것도 엄청난 육체적 한계를 느끼면서 말이다. 버스를 탈 때 많이 힘든가? 지하철을 탈 때 많이 힘든가? 그럼 걸어봐라. 며칠만 걸어도 버스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특히 날씨가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날 걸어봐라)

 

꼭 종교인이 하는 얘기 같지만 실제로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겸손함은 자신을 많이 행복하게 해준다. 비단 그것은 권태를 극복하는 수단도 되지만 내가 갖지 못한것들에 대한 불필요한 욕망을 없애는데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다. 당신이 부족함의 고통을 느끼든 만족감의 권태를 느끼든 간에 훌륭한 수단인 것이다.

 

첫번째 방법이 도저히 잘 안된다면 권태를 극복하는 두번째 방법을 알아보자.

 

일단 우린 평생을 배워도 인간들이 하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을 아주 일부분만 경험한다. 즉, 운동을 배워도 서너가지 공부를 해도 아주 작은 영역, 사람을 만나도 정말 인간관계가 넓은 사람이라 해도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수백을 넘기가 힘들다. 그러니 뭔가를 꾸준히 하자.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사람들을 만나든 아니면 뭔가를 만들던가 하는 취미생활을 하자. 휴일날 방바닥에 누워 배깔고 TV만 보고 있으면 그때는 행복하긴 하지만 서서히 권태로움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방법은 기본적으로 좀 더 부지런해지길 바라는 방법이다. 따라서 평생 게으르게 살았다면 그냥 포기해야 할 방법이기도 하다.

 

세번째 방법은 양육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보통 결혼하고 애 낳으면 자동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식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애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행복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결혼하고 애 낳은 사람들은 어느정도는 공감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외부에서 자신의 일이 많고 만족스러운 사람은 실제로 가정에서 양육에 대한 관심이 덜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미 외부에서 만족해 권태감이 없는 상태이기에 가정내에서 아이에 대한 것은 양육의 의무가 더 강한 것이다.

 

그럼 결혼을 안하고 혹은 결혼하기 힘든 상황의 사람이라면 어떤가? 그럴 경우라면 동물을 키우거나 식물을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방법은 꼭 권태감 극복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적인 안정에도 도움이 많이 된다. 특히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더더욱 좋다. 동물을 식물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하므로 극도로 게으른 사람이라면 식물을 추천한다. 단, 너무 잘자라는 품종은 피해라. 그럼 그냥 방치하기 쉽상이다.

 

물론 이 세가지를 다한다면 최고의 삶이 보장된다. 매사에 감사하며 많은 것들을 끊임없이 배우고 또한 행복한 아이를 키우거나 동/식물을 키우는 삶. 실제로 이런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어디 산속 오지에 혼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

 

 

 

10년전에 아무것도 아니였던 친구가 어느날 모인 동창회에서 멋진 차와 이름만 대면 알것 같은 회사의 CEO 명함을 들고 왔는가? 자신보다 못했던 그 친구가 말이다.

지난 10년의 시간에서 자신은 분명히 그 친구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고 희미한 기억속에 담아 두었는데.

갑자기 오늘부터는 내가 그 친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간다. 그 친구는 그것을 거의 느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럼 또 10년이 흐른 후에 그 친구를 보게 되면 그땐 또 어떤 것인가?

이렇게 10년씩 계속 흐르면 마지막에 죽는 순간이 오면 최종으로 결론이 나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은 순간이다. 결코 현재는 현재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지금 현재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지 10년전도 아니고 10년후의 모습도 아니다.  좀 현명하게 살아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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