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존재감에 대한 짧은 생각

아이루다 2012. 2. 8. 17:32

 

보통 의식주를 인간의 삼대 기본이라고 말들 한다. 먹고/자고/입고를 의미하는데 각각 식생을 통한 생명의 연장, 안전하고 피로를 풀어 다음날 활동을 가능케 하는 공간, 추위와 상처로 부터 자신을 보호 할 수 있는 털 대용품 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 가능하겠다.

 

그리고 의식주가 어느정도 해결되거나 혹은 비슷한 중요도로 섹스가 있다. 그런데 섹스는 보통 인생 전반에 걸쳐서 가능한 것이 아니고 또한 필수요소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의식주급에는 못 끼지만 실제로 자연계에서 보면 섹스는 아주 중요한 행위 중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종족의 연장, 즉 후대를 생산함으로서 일종의 영생을 누리게 해주는 행위인 것이다.

 

존재감 얘기에 왜 뜬금없는 의식주 얘긴가 싶은 분도 있으리라.

 

21세기 쯤 인간 문명은 아주 특별한 지구가 아닐경우에 보통 의식주는 해결이 되어 있다. 단지 얼마나 좋은 것들이냐의 문제일 뿐.

이렇게 된 상황이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며 내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전단계의 본능과도 관계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유의 시간이 있고 철학이란 분야가 생겨났으며 형이상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학문이 정의되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며 또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간의 아주 오래된 질문 중 하나고 수 많은 답변이 나왔지만 아직도 이 답의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우린 물론 개성 넘치는 수 많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실제로 자세히 관찰하면 단순히 눈 두개, 코 하나 가진 인간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란 종의 고유 특성이고 심지어 대부분의 동물의 특성과도 별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높은 지능이 주어졌고 이 지능을 위해 우린 의식주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친구와도 어울리고 각종 오락을 즐기며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재미나 호기심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는 그 어떤것에 시간을 보내게 되며 또한 자신을 좀 더 나은 자신으로 만들기 위해 돈과 시간을 소비한다.

 

기본적으로 이런 행위는 동물세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동물세계는 보통 먹어서 생존자체를 하거나 짝짓기를 통해 2세를 낳고 키우는 행위에 절대적인 시간이 투여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 특유의 특성으로 인해 이런 시간을 최소화 하고 그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많은 고민을 한다.

 

여기서 두가지 시선으로 존재감이란 놈을 관찰 해보자.

 

1.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보통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을 하면 새벽에 시장에 나가보란 말을 하곤 한다. 시장에서 새벽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렇다. 인생에서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건 일단 여유가 있어야 한다. 배고파 죽겠는데 인생이 허무하진 않다.

 

그렇다면 일단 배부른 상태라고 가정하고 우린 왜 사는가? 하는 문제를 잘 생각해보자.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현실은 괴롭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 죽을 이유가 없어서? 내가 죽으면 슬퍼하거나 힘들 사람이 있으니까? 일대로 죽기엔 억울해서? 등등이 있겠다.

 

생물학적 원인에 의해 세상에 나왔지만 인간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되며 그것은 바로 단순히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시작되어 죽음이라는 뻔한 결과를 맞는 우리 스스로 삶이라고 말하는 여정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하겠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고 자연학적 지식을 쌓으면 쌓을 수록 인간의 고유 특성은 생물에 대한 일반적 특성으로 인식되고 분명히 사고하고 고민하는 자신의 존재가 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왜 있는지 또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문제엔 답은 없다. 나도 살아오면서 오랜시간 생각을 해왔지만 결론은 답은 없음이며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정의했다.

 

2.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존재감

 

친구는 나를 잘 아는 타인을 칭하는 말이다. 이런식으로 우린 늘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살기 마련이다. 실제로 많은 친구와 넓은 인간관계는 인간들 사이에서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첫번째가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라면 두번째 분류는 내가 아닌 타인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실제로 첫번째 분류보다 이 분류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고민하고 고뇌하기도 한다. 왜냐면 타인에게 있어서 존재감은 자신의 이득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평판이 좋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평판은 당사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타인들의 다수의 의견인 것이다. 그렇다면 평판이 좋은 사람은 어떤 이득을 얻게될까? 뭐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 역시 동일한 개념이다. 인간성이 좋다고 평가받은 연예인은 그렇지 못하다고 소문난 사람보다 더 많은 CF를 찍을 기회와 더 많은 팬수를 갖게되는 것이다.

 

내 친구사이에서도 누구는 재미있고 이타적인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게되면 그 사람은 더욱 많은 모임에 초대받고 또한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되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는 것이다. (물론 이 챙김에는 추후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으므로 하는 행위이긴 하다. 그리고 그 보상의 기대는 과거의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생긴다. 주변에 만나서 돈 안쓰는 친구와 안 만나는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렇듯 인간관계에서 존재감은 이득과 관련이 된다. 그래서 장기적 이득을 노리는 사람은 최대한 자신의 평판을 좋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단기적 이득에 급급하는 사람은 평판보다는 눈앞에 있는 실제적인 이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존재감은 이득 부분에서도 크게 작용하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 인간의 인기도(꼭 연예인만 인기에 목숨거는 건 아니다)에도 영향을 미쳐 인생을 살아가는 즐거움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즉, 의식주의 기본적 영향(경제적 이득)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란 또 다른 요소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두가지 의미에서 존재감에 대해 설명했는데 실제로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은 후자의 존재감에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면 전자는 스스로 묻는 배부른 정신 행위일수도 있지만 후자는 자신의 이득과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수영하고 달리기 하고 운동을 하고 경기를 하고 경기를 보고 사랑을 하는 등등 대부분의 행위를 한다. 무의식적으로 하기에 딱히 이게 내가 그런것을 느끼기 위해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연결을 하긴 힘들지만 잘 생각해보면 나는 왜 공부하는가 부터 시작해서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교에 가면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직장을 얻으면 남들보다 좋은 의식주를 누리며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일반적인 본능적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좋은 대학교를 나와서 좋은 직장에 갔지만 사내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쫒겨나거나 회사를 잘 다니더라도 여자만 만나면 제대로 말도 못해서 결혼을 못하게 되면 행복감이 많이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산시킬수록 회사에서 쫒겨날 가능성은 줄고 또한 여자와 잘 안될 가능성도 쭐고 심지어 혼자만 하는 공부라도 더 많은 좋은 자료를 얻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 존재감은 기본적인 행동에 늘 함께 하며 씨너지 효과를 내주는 것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행동이 모두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존재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끝없이 서로 만나고 즐거워하고 하는 것이다.

 

왕따는 이 존재감이 최소화 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된 경우로 본인은 심각한 삶의 문제점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자살에 이르른다. 

 

이 분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어떤 경우엔 존재감이 행복을 돕는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보통 사람이 가장 쉽게 존재감을 느끼는 경우가 바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인데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최대한 잘 해놓으려고 하고 심지어 주변사람들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도구로서 여기기도 한다.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쓰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의 옷, 패션, 가방 등에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평판을 좋게 해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심한 경우엔 보석과 같은 화려하고 비싼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주먹만한 다이아몬드를 차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 존재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도구를 통해 얻어진 존재감은 그 도구가 없어지는 순간 그대로 같이 그만큼의 존재감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얻을때 보다 잃을때가 훨씬 아픈것이다.

 

타인의 평가가 좋지 않다고 불행해 하는 사람들은 원래 행복하려고 존재감을 이용해야 하는데 반대로 되어 존재감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타인의 관심이나 평가보다는 자신 내면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은 아무튼 타인이 아닌가? 맛난 한우 갈비를 먹을 때 내 혀에 있는 고기가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타인의 입에 들어간 고기는 그냥 더러운 침뭍은 음식물 쓰레기일 뿐인 것이다.

 

우린 좀 더 타인으로부터 존재감에서 자신 스스로 느끼는 존재감으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한다. 특히 나이를 먹을 수록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자신임을 너무도 당연하게 깨닳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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