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단일민족인가 집단화 된 열등감인가?

아이루다 2012. 2. 3. 13:53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한민족을 기반으로 한 단일민족 국가라고들 말한다. 수많은 배달인들의 모습속에서 배달의 민족이기도 하고.

환웅으로 시작한 단군왕조 신화에서 보듯이 웅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건국 신화도 있다. 그리고 지정학상 이점으로 인해 바로 옆에 붙은 강대국 중국의 수많은 왕조의 명멸과 큰 상관없이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도 힘든 500년 이상 유지된 왕조를 셋(신라,고려,조선)이나 역사적으로 겪은 민족이다.

백의를 즐겨입고 (내 입장은 염색할 천연염료가 비싸서 그런것 같다) 인심이 후덕하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아주 낭만적인 민족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 우리는 이 단일민족에서의 문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야기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것에 대한 우리 민족 내부적 반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듯 보인다. 단일민족이기에 나타나는 장점들은 그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정책적 방향과 개개인의 존재가치성을 집단에서 채우려고 하는 국민들 하나하나의 입장으로 인해 그런 듯 보이나 난 뭐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니 원인은 대충 상상해보는 것이 좋을것 같다.

 

2002년 월드컵이 있던해 수백만의 붉은 티셔츠 인파가 광화문과 전국 각지에 모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랫동안 숨겨진 우리 민족의 집단 놀이 본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어느나라가 이처럼 엄청난 단결력을 보여줄 수 있으랴.

 

아무튼 모두 아는것은 이쯤해서 멈추고 우리가 왜 박지성,박찬호,김연아 등등에 열광하는가 를 생각해봐야겠다.

 

일단 난 이 기반에 민족 열등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것에 그토록 열광하는가를 생각해 봐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열등감만 있는건 아니다. 영웅을 숭배하는 희망에 대한 기대도 있고 그들이 그 자리까지 가기위해 노력한 과정에 대한 감정적 동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심하기 때문에 난 열등감이란 용어를 쓴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에 민족이 세개이상 섞였다면 그래서 백인/황인/흑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린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 어떤 것을 느꼈을까?

 

보통 열등감은 평행입장에서 발생한다. 나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일때 보다 거의 동갑이나 나보다 더 적은 나이를 가졌을 때 더 심화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충 이해가 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시작이 다르면 현재 상황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쉽게 되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즉, 우리가 시작부터 좀 더 많은 차이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우린 타인이 가진 것이나 타인이 이룬것이나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이해심과 관용을 보여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우린 머리도 검고 키도 고만고만하고 사는 환경도 유사하고 전국 어디가나 거의 같은 말을 쓰고 대부분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치며 상당히 일체화된 단일한 문화를 소비한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끝없이 모난돌이 정 맞는다 라는 식의 타인과 다른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왼손잡이를 강제로 오른손잡이로 바꾸고 젓가락질 하나 하는 것도 잠재적인 규정을 정하며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사회적으로 연관된 노년층에 대한 공경을 지시한다.

 

우린 이렇게 어려서부터 끝없이 동질화에 대한 요구를 받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린 모두 동등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히며 그 결과로 우리 중 하나가 잘나면 모든 사람이 잘나진듯한 '장하다 대한의 아들 딸들아' 라는 문구에 저절로 숭고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박지성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간것과 나와 무슨 상관인가? 잘 생각해보자 왜 수 많은 프리미어리그 선수들 중 왜 우린 박지성에 집중하는가? 도대체 난 박지성이 왜 잘 되길 바라며 왜 그가 한골 넣었다는 기사를 보면 웃음을 짓고 타인과 대화주제로 그를 끌어 드릴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린 한민족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래서 그가 잘되면 내가 잘되듯 희망을 얻는다. 물론 모든것이 다 그런것은 아니다. 박지성은 평발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운동량을 보이며 김연아는 혹독한 시절을 보낸 인간 승리의 결과라서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것들은 그들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고만 있지 단일만족과 같은 근본적인 이유는 아닌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런 부분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해외 여행 및 이민이 많아짐에 따라 점차로 시야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수 많은 사람들이 타인과 다른 나 그리고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하는 깊이가 너무나 얕다는 것이다. 특히 IMF 이후 획일화 되고 있는 돈 지상주의 풍토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바람을 타고 국내에 최악의 결과로 나타나는 빈부격차에 의해 너무 깊이 개개인의 가치관을 파고 들고 있는 모습니다.

 

뭐든지 돈이 되어야 한다. 타인과 다른 내가 되더라도 나와 다른 타인이라도 그가 하는 행위가 돈과 연관되지 못하면 그것은 의미 없는 짓이며 잉여짓이다. 또한 그 획일화된 가치성 개념으로 인해 그것을 갖지 못한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

 

국민 소득이 올라가고 생활 수준을 끝없이 발전하고 있는데 우린 왜 더 행복해지지 못한 것을까? 그것은 사회가 다변화된 개개인을 품지 못하고 개인이 나와 다른 너를 잘 인정하지 못하는 행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옆집 애가 학원에 가면 내 아이도 가야하고 윗집애가 상을 받으면 내 아이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초-중-고-대학교를 거쳐 취직을 해야만 정상적인 인간이 된다. 나이가 차면 모두 결혼을 해야하며 결혼을 하면 또 애를 나야 한다. 애를 나면 또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아이는 시대를 거쳐 무한반복이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즉, 정도를 벗어난 인생의 길은 모두 잘못되는 것일까?

 

좀 더 관용을 가져보자. 소수 성애자와 같은 사회적으로 잘 용납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설령 그것이 참 끔찍한 대상일지라도 인정은 하자. 각자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 산다는데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그럴수도 있겠다. 물론 나는 싫지만 정도까지만 해서 인정해주자. 광적인 분노와 맹목적인 비난만을 퍼붇지 말고 우린 다르다라고 생각해보자.

 

너와 내가 다르고 우리집과 옆집이 다르고 우리 동네와 옆 동네가 다르고 우리시와 옆시가 다르다. 우리나라와 옆 나라가 다른건 그렇게 잘 이해하면서 왜 민족내에서는 이렇게 극도의 일치성을 주장하는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도 행복을 찾는 큰 계기가 됨을 주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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