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아이루다 2012. 2. 1. 22:42

 

몇칠 칸트님의 책을 읽다가 도저히 한글인데도 글씨만 한글 같은 그 책 내용에 지쳐 다시 쇼펜하우어의 책으로 돌아왔다.

 

읽은지 몇주도 안지났지만 이제 슬 정리해서 글을 써볼 시기인듯 하다.

 

오늘 영월에서 갑자기 날라온 한통의 전화땜시 낮에 정리하려다 못하고 이제야 쓰기 시작해본다.

 

쇼펜하우어. 아마 니체나 칸트 정도의 유명세는 아니라도 많이 들어봄직한 철학자이다. 염세주의 철학자의 대표로 꼽히는 우울한 입장의 대변인이지만 나 역시 그의 책을 직접 읽기 전까지는 단순히 염세주의자로만 여겼었다. 하지만 책을 모두 읽고나서 깊은 공감과 함께 그가 인생에 있어서 말하고자 했던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책의 첫머리는 "인간 존재의 목적은 고뇌이다" 이렇게 시작된다.

 

누가 고뇌하려고 인생을 사는가? 처음 접하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정의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몇가지 예를 보다보면 아하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귀가 팔랑이가 된다.

 

강물은 어떤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 한 조용히 흘러가기 마련이지만 어떤 저항물을 만나는 순간 흘려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인간이나 동물도 저항물이 존재할때 이를 벗어나고자 살아있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를 막는것이 있을때 비로소 그 의지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논리. 쉽게 말하면 숨이 막혀봐야 공기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말이다. 건강을 잃어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듯이.

 

물론 삶은 고통만 있는게 아니다. 행복도 있다. 하지만 행복은 고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란 것이 이 철학자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산채로 잡아 먹을때 먹는 동물이 느끼는 먹는 행복감과 살이 뜯기는 다른 동물의 고통 중 누가 더 강한 것인가? 라고 설명한다. 무서운 예이다.

 

안락과 행복은 소극적이고 고통은 적극적이란 주장을 한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은 삶의 인식을 하게 만들고 또한 그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게 하지만 실제 그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짧은 휴식과 함께 우리에게 또다른 무서운 권태가 찾아오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늘 고통과 권태의 사이에서 고통받는 다는 전제를 한다.

이해도 갈법하게 직장인이 되어야 주말이 즐겁다. 백수는 매일 노니 주말이나 주중이 같다. 고통을 받아야 보상을 받는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보상도 없다.

 

우리가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의지 또한 종족 보존의 본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주장도 편다. 우린 희망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살지만 실제 미래가 되서 그 희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도 부각시킨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주된 이유, 미래에 대한 기대치나 또한 삶을 이어나가려는 의지를 모두 별것 아니라고 치부해버린다.

 

젊은 남녀의 사랑 역시 2세를 위한 그래서 종족보전을 해야할 본능으로 정의한다. 이 부분은 나도 충분히 공감한다. 단지 여자를 너무 폄하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이분은 여자는 자신의 자식을 갖고 키우기 위해 남자를 철저히 이용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신체적으로도 가는 허리, 긴머리,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자에 대한 이분의 생각을 아주 잘 나타낸 글이 있다.

 

'키가 작고 어깨가 좁고 궁둥이가 크고 다리가 짧은 - 이 여자라는 족속이 아름답다고 보는 것은 성욕으로 말미암아 눈에 아지랑이가 낀 남자의 몰지각 때문이다'

 

얼마나 단순 명료한 설명인가? 물론 페미니스트가 봤다면 거품을 물었을 얘기지만 그리고 요즘엔 남자보다 더 크고 더 어깨가 넓은 여자들도 있기에 일반화 시키긴 좀 그렇지만 아무튼 나름 공감은 간다.  남녀가 만나 데이트를 할때 남자는 첫날을 보낼 기회를 위해 참 많을 것을 한다. 선물하고 차태우고 밥사고.. 그러다가 첫날을 보낸 후에는 연속적인 섹스를 위해 또한 많은 노력을 한다. 최종적으로 여자에 대한 성욕이 사그라질때 쯤이면 권태기가 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으로 산다. 뭐 100%는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보다 불교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얘기가 어느정도는 불교와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인생은 고뇌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결국 이분은 최종적으로 삶은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우니 살아가는 동안 자신 내면에 더욱 귀를 기우리고 미래에 닥칠 고통을 최소하 할 수 있도록 대비하며 타인과 어울려 기쁨을 얻기 보다는 보다 차원높은 정신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훈련을 하라고 한다. ( 잘 정리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30대 중반부터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의미 그리고 그전에 있었던 정열들이 어느새 사라진 탓에 많이 지쳐있었다.

이책을 읽고 나니 새삼 산다는 것에 희망이 생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인생을 고통으로 정의하는 그의 말에 내 생각을 맞추니 삶이 즐거워 지는 것이다.

 

난 공기가 있어 숨을 쉴수 있음을 감사하며 살아가려 한다.

난 직장이 있어 돈을 벌 수 있음을 감사하며 살아가려 한다.

난 시골에 작은 집을 지을 수 있어 너무도 감사하며 살아가려 한다.

난 건강하게 살아가기에 감사하다.

난 이빨에 땜질하지 않아서 감사하다.

난 두눈이 다 멀쩡해서 감사하다.

난 좋은 사람들을 알고 있고 너무도 예쁜 여자친구가 있어서 감사하다.

 

그렇다. 난 이 책을 읽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욕심내기 보다는 내가 가진것들을 바라보는 법도 배웠다.

삶이란 그런건가 보다. 마음먹기 따라서 세상이 참 많이 달라 보인다. 귀찮은 것도 내가 손해본다는 생각에 기분 나쁜것도 실제 그런것이 아니다. 정말 근거도 없고 또한 실제적으로 그렇지도 않은 일들에 있지도 않는 것들에 대한 가정을 하고 욕심을 낸다.

 

라면을 먹으면서 스테이크를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둘다 배가 불러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괜히 라면 맛만 없어진다. 혀의 감각을 지나고 나면 모두 얼마후 똥으로 나올 뿐이다. 내가 인터넷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싸게 샀다면 정말 그 물건이 싼것인가? 아니면 내가 싸게 산것인가? 물값이 싸서 대형마트에 가서 한참 물건을 사다보면 내가 정말 싸게 산것인가? 아니면 불필요한 물건을 더 사게 된것인가?

 

남자는 필요한 물건을 비싸게 사고 여자는 불필요한 물건을 싸게 산다는 말이 있다.

 

잘 생각해보고 살아가자. 우린 정말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