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맨헌트: 유나바머

아이루다 2021. 7. 28. 08:36


넷플릭스에서 방영을 했었고 우연히 누군가 추천해서 보게 되었다. 전혀 몰랐었는데, 미국에서 한 20년 동안 꽤나 유명했던 폭탄 테러범에 관한 드라마였다.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인 셈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테러범은 아이큐가 167, 하버드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천재다. 그런데 그런 그가 수십 년을 산 속에서 혼자 보내면서 20년간 사람들에게 폭탄 우편물을 보냈다. 몇 명이 그로 인해 죽었고, 수십 명이 다쳤다.

 

그는 꽁꽁 숨겨진 테러리스트였고 미국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FBI는 그를 잡기 위해서 가장 비싼 가격을 치러야 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 느낌은, 만약 그가 끝까지 숨고자 했다면 못 잡았을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일종의 '논문'을 작성해 신문사에 싣게 되었다가 결국 자신의 '언어적 유사성'을 알아차린 가족들에 의해서 발각되고 만다

 

 

'테드 카잔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천재이지만 희대의 테러리스트는 삶이 좀 기구하긴 했다

 

어린 시절 제일 친했고, 가장 뜻이 통했던 친구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그를 배신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머리가 좋아서 16세에 들어간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한 교수로 인해 비인도적인 비밀 실험에도 참여하게 된다. 바로 '사상을 변화 시키는 세뇌' 실험이다.

 

어려서부터 기술 문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그는 꽤나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비밀 실험의 대상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교수는 사실은 그것이 실험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그가 하는 말들을 끝없이 들어준다. 물론 당연히 실험을 성공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어린 테드는 하버드 대 내에서도 유명했던 교수가 자신의 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자 완전히 거기에 빠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절한 배신이다.

 

본격적으로 실험이 시작되자 교수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그의 사상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강한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거의 고문 수준이다. 하지만 테드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며, 배신감으로 인해 세상에 대한 극단적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가 폭탄 테러를 시작한 원인이다.

 

그렇게 시작되어 20년 가까이 지속된 테러는 한 프로파일러의 '법언어학' 이라는 새로운 범죄적 증거를 통해 끝난다. 테러리스트와는 절대로 협상하지 않는다, 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번복해 그의 논문을 신문에 게재하기로 결정하면서 결국엔 테드의 동생 부부가 형의 글에서 나오는 독특한 특징을 읽어 낸 것이다.

 

결국 그는 체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체포 후 그는 또 다시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데, 놀랍게도 자신을 변호해줘야 할 변호인단에게 당한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자신의 집을 수색할 수 있었던 근거, 그러니까 법언어학적 증거라는 것 자체에 대해 빈틈이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독수독과' 라는 원칙이다. 사실상 모든 증거가 테드의 집에서만 발견된 상황에서, 그의 집을 압수 수색할 수 있는 영장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후 취득된 모든 증거는 법적으로 활용될 수 없다는 점을 알아낸 것이다. 그래서 그것만 제대로 물고 늘어진다면 그는 기소조차 되지 않은 채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변호사는 그것보다는 그가 하버드 대학교를 다닐 때 불법적인 심리적 실험을 당해 정신적 문제가 있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쪽으로 변호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도 그를 속인다.

 

하지만 테드는 자신의 사상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었기에 자신이 정신병에 걸려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결론을 내는 것에 대해서 커다란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가 자신과는 입장이 다른 변호사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때는 그는 이미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란 결론이 난 후였다.

 

그래서 그는 이후 스스로를 위해 증언하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변호조차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자신의 모든 범죄를 인정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감방에는 가지 않더라도 정신병원에 가서 미친 사람을 살다 죽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드라마가 끝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났다. 천재로 태어난 그는 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까?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너무 심한 배신을 당했다. 그로 인해서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머리가 너무 좋아서 자신에게 맞는 특정한 사람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서 몇 사람만을 너무 깊게 신뢰하다가 크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보편적인 사고 방식의 부재, 사교 능력의 부재, 너무도 좋은 머리, 사실상 천재들이 경험하게 되는 불행의 씨앗은 다 가진 셈이다. 그에게는 좋은 머리가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동일한 상황이라도 그냥 평범한 루저로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상처가 너무 깊었고, 능력도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좋은 머리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폭탄이란 수단을 통해 처리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은 우리가 나약한 인간인 이상 절대로 바뀔 수 없는 명제이다. 만약 우리가 매우 강하고, 병들지도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딱히 사람을 좋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병들고 죽는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만나면서 지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특히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 사람일수록 점점 더 사람 속에서 살아가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공감이 잘 이뤄지지 않기도 하고, 특이한 특징이 있기도 하고, 관심 분야가 남들과 너무 다르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기대치나 목적이 심하게 결이 다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그럼에도 우리들 대부분은 상처의 아픔보다는 어울림의 행복이 더 크기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버텨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다들 인간관계쯤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백전노장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몸에 둘러야 하는 갑옷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이다.

 

화살이나 총알 따위에는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강한 갑옷이지만 그 무게로 인해서 움직임도 둔하고 더해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 너무 힘들다. 가까워지고 싶어도 갑옷의 두께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멀리 있어야 한다. 또한 멀리 있었던 삶이 너무 익숙해진 탓에 너무 가까워지면 오히려 부담스럽고 불안해지고 만다.

 

유나바머로 불렸던 폭탄 테러범 테드는 그런 갑옷을 만들지 못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특별함이 그에게 갑옷을 만들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렇게 심리적 갑옷을 만들지 못한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리적 갑옷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숲 속에 있는 아주 작은 외딴 집이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그가 수십 년을 살았던 그 작은 오두막 사이의 거리가 바로 그가 만든 갑옷의 두께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심리적 갑옷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으면서 테드처럼 물리적 갑옷도 만들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에게 흥미가 있다. 이미 두꺼운 갑옷을 만든 분들은 안정적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끄집어 낼 수는 없다. 너무 단단해서 나오고 싶어도 나오질 못하고, 처음부터 나올 생각도 없다. 갑옷 안의 세상이 삶의 전부라고 믿고 있기에 밖의 세상은 너무 무섭고 어두운 곳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갑옷을 만들지 못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두꺼운 갑옷 말고도 다른 해결책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것은 두껍지도 단단하지도 않으며 사실상 아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면서도 갑옷보다도 훨씬 더 단단하게 우리를 지켜줄 것이며, 남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도 않고, 누군가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지 못하는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럴 수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다.

 

나도 한때 테드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산 적이 있다. 그만큼의 분노를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저 단절과 고립 속에서 살았을 뿐이다.

 

이제 나는 안다. 그 분노와 단절 그리고 고립은 사실 다 내가 만들어 낸 환상임을 안다. 내 자신에 대한 오해로 인해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아는 순간 나는 갑옷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그것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한다. 갑옷 속에서 갇혀 있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든가 아니면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해 지금도 여전히 상처를 입고 있는 누군가에게 내가 겪었던 일들을, 내가 변화된 과정을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그 누군가도 나처럼 가볍게 살아갔으면 한다. 단지 그것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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