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미움받을 용기 2

아이루다 2019. 12. 14. 07:59

 

 

원래 제목이 너무 뻔해서 읽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1편을 읽고 나서 책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개인적으로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쉽지 않은 책이 대중적 인기를 끈 것과 더해서 주변 분들이 읽을 만 했다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보고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던 책이었다.

 

1편의 내용은 나름대로 좋았지만 마지막 결론 부분이 좀 이상했다. 초반 문제 제시와 중반의 전개까지는 좋았는데 그래서 결국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이 '인간 사회에 대한 공헌'으로 설명되는 바람에 나름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2편이 나왔다. 물론 그것만을 목적으로 낸 책은 아닐 것이다. 1편이 잘되니 2편이 나온 것이지만, 2편의 내용은 1편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인간 사회에 대한 공헌'을 주 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로 인해서 책의 내용이 매우 구체화 된다. 그리고 그 내용도 1편의 겉핥기 식 설명을 넘어서 심오한 단계까지 들어간다.

 

단지 책을 다 읽고 난 후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데 그것이 아들러의 문제인지 아니면 아들러를 설명한 저자의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개별적 화두는 매우 뛰어난데 그것을 총괄하는 기본 개념이 미흡한 느낌, 2편을 읽고 난 나의 총평이다.

 

그럼에도 내용 자체는 참 좋았기에 책에 나온 글귀 위주로 천천히 설명해보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라는 이야기의 편찬자이고 그 과거는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다시 쓸 수 있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표현이다아들러의 표현처럼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위해서 얼마든 다르게 채색될 수 있다. 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다들 그렇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꽤나 정확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기억 그 자체는 원래 불완전하며 (과학적인 입장에서 불완전하다) 현재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 한 사람의 과거는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 될 수 있다.

 

흔한 예로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며 실패한 쿠테타는 반란이 된다. 극복을 성공한 가난은 인내와 노력의 증거가 되지만 극복에 실패한 가난은 결국 누군가 불행할 수 밖에 없는 흙수저 이론의 근거가 된다. 만나서 결혼으로 골인하는 연인은 처음 만남이 운명의 순간이 되고중간에 싸워서 원수가 된 채 헤어지고 마는 연인은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된다. 결혼 조차도 어떤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서 해서 좋았을 수도 있고 도시락 싸서 다니면서 말릴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현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과거를 끌어다 쓰면 이런 현상들이 생겨난다. 우리들 각자는 지금 머리 속에 들어있는 수 많은 기억들을 또 어떻게 오해석 하고 있을까? 개별적 오해는 당연히 알 수 없지만 그 목적은 정확히 이해를 한다. 그것은 바로 나를 조금이라도 더 이롭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서 그 삶이 결정이 된다"

 

책의 순서 상으로는 좀 더 뒤에 나오지만 앞의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1편에서 나온 목적론에 대한 연장으로 이 문장을 설명하는데 정말로 맞는 말이다. 삶은 무엇을 기억하고 경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니 똑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불행하고 누군가는 행복해 한다.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더욱 더 강한 힘을 낸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웃는다. 이 모든 차이는 각자의 고유 영역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내가 정의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된다.

 

집이 없는 사람이 집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늘이 천정이고 땅이 방바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 오는 날 괜히 처량해지지만 않을 수 있다면, 비 오는 날이 오랜만에 샤워를 할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단지 정말로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아들러의 가르침을 통해서 아이를 교육하는데 실패하고 돌아 온 젊은이에게 해주는 조언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존경심이란 단어라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느낌이 있어서 그렇기에 조금 문제가 있지만, 의미는 충분히 통한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려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한다가 된다.

 

하지만 여기부터 책은 약간 문제를 보인다. 존경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존경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뒤에 부연 설명들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명확하지 않다. 아이의 존재를 아무리 존경하려고 해도 그 아이가 정말로 말을 안듣고 말썽을 피우면 존경심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

 

 

저자는 존경심을 가질 수 있는 조건으로 '공동체 감각' 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 감각을 가지려면 타인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물론 인간은 거울신경세포를 통해서 타인이 경험하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깊은 공감도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의 기억, 경험, 판단력에 의한 결과라는 뜻이다.

 

팔이 부러져본 사람은 다리가 부러진 사람의 불편함을 공감할 수는 있지만, 팔과 다리는 엄연히 다른 불편함을 가져다 준다. 같은 팔이라도 왼팔이나 오른팔이냐가 다르고, 같은 오른팔이라도 남자냐 여자나, 아이냐 어른이냐, 미국에 사느냐 한국에 사느냐, 겨울에 다쳤느냐 여름에 다쳤느냐가 다르다. 그러니 타인처럼 보고, 타인처럼 듣고, 타인처럼 느끼는 것은 가능하지만 타인의 눈, ,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소속감'이다"

 

 

중간에 아이의 교육법에 대한 조금 지루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설명이 이어진다.

 

소속감, 이것은 인간이 가진 욕구들 중에서 거의 본능 수준에 다다른 욕구이다. 물론 식욕과 성욕 등과 같은 수준은 아니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임은 확실하다.

 

왜 그럴까? 아무 오랜 시간 동안 무리 생활을 통해 생존을 해온 인류는 어떤 무리에 속해 있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생존의 조건이라고 느끼고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나 중요한 소속감을 제대로 느끼기 못하면 결국 누구나 원하지 않는 감정, 외로움이나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심화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소속감, 즉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것이 목적"

 

 

소속감에 대한 추가 설명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우리가 왜 다들 그렇게 경쟁을 하고 좀 더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다들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산다. 생존하고 싶어서 경쟁하고, 경쟁을 해서 최대한 남들과 다른 나를 만들고 싶어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에고라고 한다. 무리 중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개성을 가지려는 것, 인정을 받는 것, 중요한 사람이 되려는 것 등이 모두 같은 목적이다. , 권력, 명예 등도 모두 그것을 위한 좋은 수단들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이미 원래 목적 같은 것은 사라졌다.

 

, 권력, 성공, 명예를 얻을 때마다 받을 수 있는 보상의 쾌감에 중독되어서 충분히 특별해졌어도 끝없이 더 특별해지길 원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삶을 보면 정말로 다양해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특별해질 수 있다면 스스로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욕구는 앞에서 나온 공동체 감각을 가질 수 없는 근본적 이유가 된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것은 나와 남을 최대한 분리하려는 욕구이며 반대로 공동체 감각은 남과 나를 최대한 일치시켜야 한다는 개념이기에 그렇다.

 

 

 

 

"공동체 감각은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을 발굴하는 것"

 

 

개념적으로 보면 타인을 통해서 세상을 보라는 공동체 감각은 몹시 애매하다. 사실 어떻게 해야 그것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도 힘들다. 내가 남과 달리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구를 버리고 남과 나를 최대한 일치시켜야 한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그리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남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누군가 나에게 그러게 다가오면 그것이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뭔가 이상하고 괴기스러울지도 모른다. 나는 나고 너는 너인데 네가 나인 척 하면 그것이 안 이상하면 이상할 지경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이상할 수 있는 공동체 감각이 원래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공감한다. 사실 이 공동체 감각을 잠시라도 경험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평소엔 그냥 남이지만 뭔가 공동의 적에 맞서서 싸우는 상황이 되면,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완벽히 동일한 목적을 가진 상황이 되면 바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꼭 전쟁과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냥 교내 체육대회에 반 대표로 농구나 배구 축구 경기 등을 하면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나를 잘난 존재로 돋보이려고 하는 목적이 아니라 꼭 이 경기를 이기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면 그 순간 선수 전원은 한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응원단까지도 그렇다. 그 순간 내재된 공동체 감각이 아주 잠시 구체화 된다. 하지만 적이 사라지면 금세 또 다시 숨어 버리고 만다.

 

 

 

 

"아마도 그것은 평범해질 용기가 부족해서 그렇겠지"

 

 

이 책의 가장 큰 실수는 이 문장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수가 일어난 원인은 결국 저자가 아들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이 문장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의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겨우 한 페이지 수준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대화를 하던 청년은 잠시 반발하다가 금세 교육 문제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이 표현에 바로 '에고'의 본질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에고가 특별해지고 싶다는 소속감을 만들어 내고, 타인과 남을 구분하게 만들고, 구분된 타인과 경쟁해서 가장 뛰어난 존재가 되길 원한다.

 

, 아이들에게 존경심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라는 개념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사실 한 페이지 수준으로 다뤄진 이 내용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중요하게 설명되어야 할 것이었다.

 

왜 존경심, 사랑, 신뢰, 우리, 나의 사라짐이 필요한지를 그냥 설명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평범한 존재, 좀 더 깊게 표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표현 자체도 평범하다고 한 것을 보면 저자 뿐만이 아니라 아들러 스스로도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의 진리에 다가섰지만 결국 그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느낀 아들러에 대한 판단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지식적으로만 아들러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의 내용이 매우 어렵다든가, 추상적이라든가, 너무 이론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모든 기쁨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책은 중반부로 접어들고 대화 내용은 인간관계 쪽으로 바뀐다. 그리고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청년의 말에 철학자는 이 말로써 대답을 한다. 맞는 말이다. 인간관계는 불행과 행복을 모두 가져다 준다. 배신과 상처를 받는 고통도 있지만 기쁨과 깊은 충만함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제대로 인간관계를 잘 맺느냐 여부가 개인의 행복과 즉결이 된다. 사람들은 각자 수 많은 개별적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여행을 떠나도 돌아오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돌아옴에는 반드시 그 여행에서 겪은 일들을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

 

혼자 있다가 혼자 떠나고 결국 돌아와서 혼자인 여행은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경험을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여행을, 취미를, 영화를 좋아한다고 착각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나는 친구가 없어도 여행이, 취미가, 영화가 좋다고 할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의 10%도 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 경험하는 그런 행복을 경험해 본적이 없으니 상상하기도 힘들다.

 

 

 

 

"사랑 받는 기술에서 사랑하는 기술로"

 

 

관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을 받는 것은 무리에서 특별해지는 것이며 특별해지는 것은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서 그렇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아이를 살리려고 한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생존 조건이다. 반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 우리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끝없이 사랑에 목말라 한다.

 

그리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 끝없이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하려고 하고, 잘남을 보여주려고 한다. 매력적인 존재임을 과시하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졌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이다. 특별해지고 싶은 것조차도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구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진한 소속감을 경험한다. 그야말로 그 순간 '아름다운 밤이에요'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에 반대한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을 받는 것은 특별해지고 싶다는 에고의 욕구이지만 사랑을 하는 것은 너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공동체 감각의 욕구이다.

 


"자기 신뢰가 있어야 타자를 신뢰할 수 있는 것"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상대를 신뢰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데 나를 배신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쉽게 사랑을 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하면 나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할까 봐 걱정이 된다. 그러니 누군가를 쉽게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고 표현해도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한다. 나는 당신이 별로 좋지 않은데 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냐고 한다.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있으라고 한다.

 

그래서 다들 사랑하기를 포기한다. 그런데 저자는 그 근본적 이유가 바로 자신을 신뢰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설명을 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나를 통해 세상을 보기에 내가 신뢰를 하지 못하면 남도 신뢰할 수 없다. 나를 믿는 만큼 남을 믿는다는 소리이다.

 

그러니 자기 신뢰를 가지는 것이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는 힘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사실 이 지점부터 이 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철학의 범주를 넘어 선다. 그리고 종교의 개념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립이란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탈피"

 

 

불교적으로 말하면 '나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자아의 소멸, 이것이 바로 자립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자기 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 수준이 아니라 자기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는 사라져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표현이 이어진다. 뭐 더 부연 설명할 것도 없다.

 

 

 

 

"'' ''보다 상위 개념에 있는 '우리'"

 

 

그럼에도 아들러와 저자는 기본 종교와는 다르게 조금 다른 전개를 한다. 아마도 여전히 공동체 감각이란 개념에 묶여 있어서 그런 듯 보인다. 계속 ''를 쥐고 있기에 우리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공동체 감각은 바로 우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개별적 자아의 소멸을 통해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체 감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쉽게 나를 소멸시킬 수 있겠는가?

 

그 어려운 과정을 이리 쉽게 가능할 것처럼 써 놓았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좋은 내용은 그저 좋은 내용으로만 끝나고 만다. 또한 그로 인해서 수 많은 오해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저자 조차도 아들러가 말한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썼는데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많이 오해를 하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럽게 조금이라도 언급은 되었다. 평범한 존재가 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단 한 페이지에 불과한 설명이지만, 결국 나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의 존재를 소멸시켜 전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결론적으로 이 책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조금 다른 관점의 설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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