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안전함과 불안함 사이에서

아이루다 2020. 8. 3. 08:15

 

사람들은 매일 움직인다. 집 앞의 가게를 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직장에 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좀 더 멀리 출장을 가는 사람도 있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민을 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이 순간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수 많은 떠남이 있지만, 그 떠남마다 동반하는 불안함의 강도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바로 얼마나 쉽게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올 수 있는가?' 정도로 인해 결정된다. , 쉽게 돌아올 수 있을수록 떠남으로 인해 생기는 불안함의 강도는 작다.

 

집 앞의 가게에서는 금세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죽음으로 떠났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앞 집 가게를 가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죽음이 가장 불안한 떠남이 되는 것이다. 이민은 여행보다 돌아오기가 어렵다. 출장은 출근보다 돌아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민과 출장이 여행과 출근보다 더 불안하다.

 

물론 여기엔 한가지 중요한 결정 요소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목적지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 상태인가이다. , 상대적으로 더 익숙한 곳을 향해 떠날수록 불안함의 강도는 줄어든다. 그래서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은 떠남이 아닌 돌아옴이라고 칭한다.

 

떠남은 익숙한 곳에서 덜 익숙한 곳으로 가는 여정이고, 돌아옴은 덜 익숙한 곳에서 더 익숙한 곳으로 가는 여정이다. 이런 식으로 '익숙함', '낯섦'의 감정은 떠남과 돌아옴이란 단어를 정의하는 기준점이 된다. 현재 어떤 여정이 떠남이라고 느꼈다면 상대적으로 덜 익숙한 곳으로 가고 있는 과정이고 반대로 돌아옴이라고 느꼈다면 상대적으로 더 익숙한 곳으로 가고 있는 과정이다.

 

사람들이 매일 어디론가로 떠나고 있지만 사실 그 모든 떠남은 돌아옴이 약속되어 있기에 갈 수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은, 그 가능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불안함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정착해야만 안정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떠나지만 사실 어쩔 수 없이 떠나고 있는 것이다떠나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거기가 어디이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안정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곳이 어느 곳이든 처음은 불안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심지어 군대나 감옥같은 강압적인 장소조차도 오래 머물면 그 안에서 안정적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거꾸로 밖으로 나올 때 불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정착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정착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대상이 가능하다면 단단하고 견고하며 변함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딘가에 정착을 했는데 그곳 자체가 움직이게 되면 그것만큼 불안한 것도 없다. 배는 항구에 닻을 내렸을 때 유일하게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하지만 항구에만 있는 배는 더 이상 배라고 부르지 못한다.

 

사람들이 가장 흔히 정착을 하는 곳은 바로 집이다. 그래서 월세나 전세보다 자기 소유의 집에서 훨씬 더 안정적인 감정들을 느낀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가족이다. 이렇게 집과 가족은 우리의 일차적인 정착지이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단단하지 못하면 삶 자체가 불안해진다.

 

그리고 선택적이지만 거의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친구'이다. 친구는 집과 가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견고한 존재이지만 그 숫자를 제한 없이 많이 늘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그러니까 집이나 가족처럼 하나의 대상에 강하고 굵은 끈으로 묶는 대신 약하고 가느다란 수 많은 끈으로 동시에 많은 사람들과 연결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수록 좀 더 안정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하지만 친구는 집이나 가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연결된 끈이 언제든 끊어질 수 있기에 그렇다. 심지어 내가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집이나 가족은 우리가 어느 순간 방황을 하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친구는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멀어진다 싶으면 같은 거리만큼을 멀어져 버린다. 멀어지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늘어나지만 어느 순간엔 버티지 못하고 끊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생각해보면 자신이 평소 그리 잘해주지 않았던 가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자신을 스쳐지나 간 인연 중에서 남은 사람은 사실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더 가족에 집중하려고 한다. 인생의 경험이 쌓일수록 친구와는 언젠가는 결국 끊길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강하게 얽혀 있는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끈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리고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가 새로운 인연이 생겨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상대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거기에 적응해 가게 될 때 끊어짐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런 변화는 주로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생겨난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 새로운 모임, 새로운 가족 등이 생겨날 때마다 자신이 맺어 놓은 인연의 끈은 쉼 없이 요동을 친다. 그런 와중에 그렇게 견고해 보였던 오래된 끈들이 맥없이 끊어지고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끈들이 이어지고를 반복한다.

 

이렇게 끈이 끊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상처'라고 부른다. 특히 내가 아닌 상대가 움직여서 끊어질 경우, 내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의 움직임만으로 끊어지게 되면 크게 상처를 받는다. 마치 몸에 강력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가 떼이는 것과 같다. 접착력이 이미 느슨해져서 자연스럽게 떨어질 때는 오히려 시원하지만 강하게 접착되어 있을 때 떼어지게 되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만약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결국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니 억울함과 배신감까지도 느끼게 된다. 심한 경우 복수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그런 불운한 사건들은 대부분의 경우 복수가 불가능하다. 사실 나는 안 그랬을까?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과거에 누군가에게 그런 짓을 했다. 친하게 지내다가 더 나은 사람들을 만난다 싶으면 그들을 버렸었다. 단지 그럴 땐 내 생살이 뜯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간 것이라서 그들에게는 상처였지만 나에게만큼은 상처가 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은 원래 아픈 것들만 기억할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관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주고 받는다. 자신이 움직여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대가 움직여서 자신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자꾸 쌓이면, 특히 상처를 받는 경험들이 자주 쌓이면 우리는 그때부터는 관계에 연결선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상처가 잦으니 아예 기존의 연결도 끊고 아예 처음부터 연결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결이 필요하다. 우리의 본능은 끝없이 안정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미 고정된 집과 가족만으로는 해결이 되질 않는다. 심한 경우는 아예 집과 가족의 존재 자체가 불안해서 반드시 어딘가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인간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붙이고 싶어도 상대가 멀어지면 끝이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강하게 붙이려고 하면 상대는 오히려 부담감을 느끼고 더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니 내 뜻대로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인간관계 속에서 그것이 성공하려면 결국 누구나 내게 붙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는 수 밖에 없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줄을 연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많은 돈, 강한 권력, 뛰어난 능력, 멋진 외모, 좋은 머리, 그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성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타고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 하나 정도 적당히 타고 태어나며 사실상 사람들의 절반 정도는 아예 적당히 타고나지도 못한 형편이다. 그래서 삶이 힘들어진다. 누군가와 연결된 밧줄이 내 의지가 아닌 상대의 의지로 끊기게 된다. 그래서 결국 상처를 받게 된다.

 

인간관계는 반드시 상처를 동반한다. 누구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는 매일 쉼 없이 늙어가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매일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어제처럼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1년 전처럼 올해를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움직여서 좀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움직이길 원하게 되고 움직이는 만큼 서로 연결된 끈은 늘 변화되고 만다. 느슨해지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고, 팽팽해지기도 하고, 새로 맺어지기도 한다. 그런 속에서 수 많은 상처라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상처들 속에서 사람들은 관계 자체에 지치게 된다. 그래서 아예 몇몇만 남기고 다 정리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안정에 대한 욕구가 있기에 어딘가 붙일 곳이 필요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사람이 아닌 존재에 붙이기 시작한다. 취미에 붙이고, 여행에 붙이고, 책에 붙이고, 텃밭에 붙이고, 캠핑에 붙인다. 사람만 아니면 되기에 개나 고양이에게도 붙인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대가 임의로 나에게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 거기에 붙인다.

 

 

요즘 시대가 바로 그런 변화 속에 있다. 관계는 언제든 끊길 수 있기에 처음부터 느슨하게 맺는다. 그래서 서로 언제든 맺고 끊음이 가능해졌다. 그로 인해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는 일은 최소화 되었다. 오히려 상처를 받거나 해서 징징대면 쿨하지 못한 사람, 질척거리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자신만의 고유하고 안정적인 대상을 정해서 거기에 붙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남들에게 알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살아가는지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여행 사진을 올리고, 취미 사진을 올리고, 책 소개를 하고, 텃밭에 가꾼 작물 사진을 올리고, 개와 고양이 사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원래는 그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그런 것들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시절 우리는 친구가 가장 중요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친구가 최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다들 인기가 있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아서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사실 여전히 친구를 원하고 있다. 여행, 취미, , 텃밭, 개와 고양이는 그저 대안일 뿐이다. 아무리 그것을 좋게 치장해도 결국 대안은 대안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그 대안들 역시도 완벽히 영구적이지는 못하다. 사실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면 돌멩이 최고다. 하지만 돌멩이와는 감정적 교류를 할 수가 없다. 상처를 받지는 않지만 행복해질 수도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만큼 크게 감정적 교류가 일어나는 존재는 없다.

 

그러다 보니 결론은 다시 사람이다. 사람만이 가장 강력한 희망이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은 상처들을 받았던 사람들은 좀처럼 누군가와 굵고 단단한 줄을 만들 수 없다. 그것이 끊어졌을 때 감당해야 할 고통이 커서 오직 가족만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은 사람들은 훨씬 더 안정적이다. 부모님들은 결국 돌아가지만 자식들은 대부분의 경우 부모보다 오래 살기에 결국 자신이 죽어서 스스로 연결된 끈을 끊을 때만 유일하게 끊어지게 된다. 이것만큼 단단하고 안정적인 것도 드물다.

 

하지만 결혼을 못한 사람들도 꽤나 많고,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한 사람들도 꽤나 된다. 그리고 비록 가족을 꾸렸어도 상대가 어디로 움직일지 몰라 오히려 혼자 사는 것보다 더 불안해지는 경우도 잦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가족을 꾸리고, 그 가족들을 믿으면서 살 수만 있어도 큰 행운을 얻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까지 대안으로 이용해왔던 여행, 취미, 독서, , 텃밭, 반려동물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도움이 되긴 하지만 보조적 의미로만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 더 안정적이고 제대로 된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국 또 다시 인간관계가 그 답이다. 단지 그것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최대한 많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던 그런 철없는 시절의 아이가 아니다. 그 사이 수 많은 상처로 인해서 경험과 관록으로 무장된 베테랑들이다.

 

이렇게 또 다시 인간관계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래야 상처를 반복적으로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한다면 결국 또 다시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정말로 다음 기회는 없다.

 

첫 번째, 지금 이 순간 어떤 대안을 가지고 안정적이라고 믿고 있던 간에, 그것이 결국 대안임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사람과의 관계보다 더 좋다고 느끼더라도 결국 그것은 부서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대안을 더 이상 대안이 아닌 새로운 목적으로 믿기 시작한 사람은 그 대안에 끝없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여행이 내 운명이 되고, 독서가 내 삶이 되고, 텃밭을 가꾸는 것이 나의 모든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대안은 그저 대안에 불과하다.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거기로 피한 것이다. 필요는 하다. 하지만 돌아와야 한다. 그것들을 통해 충분히 회복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지금껏 해왔던 식으로 외모, 능력 등의 기준으로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에 맞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적어도 관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무의식적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 관계를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이란 기준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목적에 맞지 않다.

 

당연하다. 끝없이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왜 딱히 불행한 관계에 머무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이런 사람들에게 끌려왔다.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 우리도 그들처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결국 상처를 입게 된다. 이제는 그 기준을 바꿔야 한다. 그래서 관계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노력하면서 살다가 보면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숫자가 적지만 분명히 존재하고는 있다.

 

세 번째, 나 자신이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모든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면 그런 사람을 고를 능력도 갖지 못하며 골라도 그 사람을 잡을 수가 없다. 당연하게도 내가 먼저 움직여서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기 힘들게 된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목적을 확실히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즐겁기 위해서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나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안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어딘가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후 나를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관계를 그렇게 맺을 필요는 없다. 대신 확실히 구분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고정시킨 관계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관계를 분리해서 유지하면 된다. , 어떤 경우에도 나를 안정적으로 해주는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여기이다. 가족은 그 무엇보다도 단단하기에 그것만 믿고 자주 가족이란 존재를 즐거움을 위한 친구들보다 덜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그런다고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특히 부모의 경우엔 아무리 그래도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아내, 남편,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결국 그들은 마음을 닫고는 다시는 열지 않게 된다.

 

네 번째, 지루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익숙하고 안정적인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결국 지루함을 유발시킨다. 우리는 새로운 것, 미지의 것, 낯선 것에서 불안함도 느끼지만 대신 하지만 흥분, 기대, 호기심 등등 지루함에 대항할 수 있는 감정들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새로운 장소에 갈 때, 새로운 경험을 할 때 그렇게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첫 데이트나 첫 키스와 같은 기억들이 그렇게나 강렬한 기억을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안정적인 관계를 그냥 두면 결국 지루해져서 상대와 이어진 끈이 오히려 부담스럽고 귀찮아질 수도 있다. 그러니 평소에 노력해야 한다. 사실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익숙하더라도 너무 그대로 반복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족들과도 늘 하는 얘기를 지루하게 반복하지 말고 가끔은 다른 주제의 대화도 나눠야 한다. 그러려면 외부에서 입력된 새로운 것들이 필요하다. 다양한 독서나 새로운 경험은 아주 좋은 주제가 될 것이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뻔한 것들을 반복하는 삶은 결국 지루함 속에서 우울함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

 

가족이든 친구든, 심지어 집도 너무 그냥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조금씩 변화가 있을 때 유일하게 지루함과 대항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당장은 별 것이 아니지만 방치하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사람들이 결국 뻔하게 위험한 것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루함에 휩싸인 안정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지루함에 눌려 강한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은 불나방이 되어서 스스로를 불태우기도 한다. 불륜이 그것의 증거 중 하나이다.

 

다섯 번째, 자신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멈춰야 할 것이다. 스스로 자랑을 한다고 느끼겠지만, 스스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사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 과정은 그저 나 이렇게 많은 곳에 붙이고 살고 있소, 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남에게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왜 그럴까? 결국 불안해서 그렇다. 불안하니 다른 이들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노력해서 없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저 증상이다. 그래서 제대로 충분히 안정적으로 되었다면 하라고 시켜도 하기 싫을 것이다. 남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 중 하나이다.

 

여섯 번째, 마지막으로 모든 것들은 결국 끝이 있기 마련이란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니 언제나 무엇이든지 사라질 수 있음을 어느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소중함은 오직 마지막이 있기에 생겨나고 있다.

 

나나 너의 삶도 결국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들에게 연결된 많은 존재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물론 떠나는 나는 별 상관이 없다. 죽음의 이별은 오직 남은 자의 몫이다. 하지만 나와의 이별로 인한 상처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삶은 충분히 괜찮았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픈 것이라도 말이다.

 

나는 내일 떠날 수 있고, 너는 모레 떠날 수 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와 맺어진 모든 존재는 결국 사라지고 잊혀지고 만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하지만 그런 결말이 있다고 해서 사는 동안 우울해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생이 끝나갈 때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존재가 적어도 무생물은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