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 받기

아이루다 2020. 7. 1. 08:14

 

'오직 두려움만이 나를 존중 받게 만든다'

 

가끔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표현이다. 매일 당하기만 해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해주는 날 선 조언이거나, 어떤 경우엔 악당이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처음 이 표현을 들으면 뭔가 좀 거북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말을 그냥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 대한 존중이 오직 그것만이 다는 아닐 것이라는 반발감이 들기도 한다.

 

우리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또 기대하고 있는 '인간'이라면 뭔가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만약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 오직 두려움을 통해서만 나온다면 공존, 배려, 연민, 공감 등과 같은 우리가 믿는 '인간다움'의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 인간은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통해서도 존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일단 오직 두려움만이 존중을 만들어 낸다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예로부터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통해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었던 많은 사례들이 있어 왔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는 사람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 자신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남을 돕는 사람들까지, 그런 사례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계속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누군가에 대한 존중은 결코 두려움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다움에 기대한 존중은 한가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두려움을 통해 나오는 존중보다 훨씬 더 낫고 더 따뜻하며 우리를 좀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진 한계로 인해서 이것은 반쪽자리 존중이 되고 만다.

 

그 이유는 내가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닌 아닌 남의 기분에 따라서 결정되기에 그렇다. , 존중을 받는 사람이 결정할 몫이 아니라 존중을 하는 사람이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것은 원래부터 이상한 것이 아니다. 희생, 배려, 도움 등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받는 사람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 사이에 배려를 해주면 권리로 여긴다는 비난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배려는 처음부터 베푸는 것이지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 주는 사람 마음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움에 기반한 존중은 주는 사람 기분에 따라서 언제든 거둬들여질 수 있다. 그러니 결국 반쪽자리가 되고 만다.

 

원래 혐오와 연민은 종이 한 끝 차이이다. 당장 더러운 거지를 보면 혐오스러움이 느껴지지만 방송에서 그 거지의 사연을 눈물 나게 편집해서 보여주면 그 즉시 연민으로 바뀐다. 불쌍한 거지를 보고 연민을 느껴 돈을 줄 수 있지만 그 거지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면 그 즉시 비명을 지르거나 심하면 한 대 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혐오를 느꼈다면 그것은 모멸로 이어진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꼈다면 그것은 존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거지의 몫이 아니다. 거지를 보고 돈을 줄지 발로 찰지를 결정하는 사람의 몫이다. 거지는 처음부터 존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하지만 그가 총을 들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그 즉시 거지를 존중해줄 것이다. 비록 거짓 존중이라고 해도 웃으면서 가진 돈을 다 줄 것이다. 눈치를 보면서 존댓말을 할 것이다.

 

이렇듯 두려움에 기반한 존중은 다르다. 내가 두려워서 상대가 나를 존중하는 것이기에 그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그래서 당연하게 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 상대방의 기분에 따라 바뀔 일도 없다.

 

회사의 사장이 늘 존중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불쌍한 사람이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을 언제든 자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니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은 직원들은 자신의 기분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늘 사장을 존중한다. 속에서는 열불이 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겉으로는 웃는다.

 

 

물론 총을 든 거지나 권력을 가진 사장에게 보여지는 존중은 대부분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어쩔 수 없으니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인간적인 감정과는 천지차이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남에게 베풀 인간다운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우리는 정말로 따뜻한 존재인 것일까?

 

어떤 사람이 텃밭을 가꾸기로 했다. 비록 작은 밭이지만 봄에 땅을 갈고 비닐을 씌우고 정성스럽게 씨앗을 심고 매일 물을 줬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자 발아된 씨앗들이 새싹으로 변했고 또 한 주가 지나자 제법 그 형체가 괜찮아졌다. 그런데 그 텃밭엔 심은 씨앗만 자란 것이 아니었다.

 

씨앗을 더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뿌린 비료로 인해서 주변에 잡초도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히려 심은 씨앗보다도 잡초가 더 빨리 자랐다. 정성스럽게 텃밭을 가꾼 이는 당연히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잡초를 뽑고 물을 주면서 여러 가지 작물들을 키웠다. 그리고 수개월 뒤 그는 자신이 심은 것들을 수확해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 양이 너무 많아서 이웃과,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을 정도였다. 키우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행복했다.

 

흔한 이야기지만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 그러면 이 글에 담겨있는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보자.

 

텃밭의 주인은 자긴이 심은 작물에겐 비료를 주고 물을 준다. 하지만 자신의 밭에 허락없이 난 잡초는 뽑았다. 똑같은 식물인데 하나는 작물이 되고 하나는 잡초가 된다. 잡초는 영양분을 빨아들이기도 하고 보기에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며 다 자라도 아무런 보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별 망설임 없이 잡초를 뽑을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사실 잡초이긴 해도 생명체이다. 그런 면에서 텃밭의 주인은 생명체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잡초라는 이유로 거의 아무런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이 그저 풀인데도 그렇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 사람이 '별 망설임 없이' 잡초를 뽑을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대로 두면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이기에 그렇다. , 손해를 입는 상황이 자신이 생명체를 죽이는 정당성을 합리화 해준다. 그리고 사람마다 '손해를 입는다'는 판단 자체가 다르기에 누군가는 잡초를 다 뽑고 누군가는 잡초도 생명이니 그냥 나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잡초도 생명이니 놔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텃밭이 아닌 생계로써 농사를 짓는다면 여전히 그럴 수 있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다 그 사람을 바보라고 할 것이다. 또한 실제로 농사를 망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잡초를 뽑아서 죽이는 시점은 '얼만큼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있느냐' 여부에 달린 것이다.

 

손해는 정당성을 만들어 낸다. 텃밭의 주인은 그 땅이 자신에게 소유된 것이고, 자신이 일구고 씨를 뿌렸으니 그 땅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초대하지 않는 잡초의 존재를 통해 입는 손해를 처단한 것이다. 그러니 침략자인 잡초를 뽑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누구나 알 수 있는 진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텃밭의 주인이 잡초를 별 다른 고민 없이 뽑을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웃기지만 잡초를 뽑더라도, 뽑힌 잡초가 복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에 잡초를 뽑아서 죽였는데 그 잡초의 동료들이 복수를 하러 온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딱히 물리적으로 복수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잡초를 뽑으면 그 주변에 수십 개의 잡초가 더 자라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텃밭의 주인은 여전히 그 잡초를 뽑을 수 있을까? 아무리 정당성을 느낀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인간이기에 그런 잡초는 당연히 멸종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류는 오랜 역사 동안에 그렇게 우리 자신에게 천적이 될만한 존재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이 지구의 생태계에 정점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면?

 

내 윗집에 사는 사람이 매일 쿵쾅거려서 잠을 자기가 힘들 정도라서 너무도 화가 나지만 그 사람을 때리거나 심지어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한 후 자신이 받을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 만약 그 사람이 잡초와 같은 존재여서 뽑아서 죽여도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고 또한 법적 처벌을 받지도 않는다면 그때는 금세 죽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나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너무 피곤한 날, 자고 싶은데 밤새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면 그 순간 미친 듯 달려가서 죽일 지도 모른다. 자신이 받은 손해에 대한 분노가 자신이 교육 받은 양심의 한계를 뛰어 넘는 순간이다. 이 상황은 잡초를 뽑아 죽이는 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그저 잡초를 뽑는 것이 좀 더 쉽게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사람에 따라서 양심의 한계점이 차이가 나고, 대상에 따라서 느끼는 두려움의 강도가 다르다. 그래서 보통은 상대로 인한 손해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분노는 높아지고 어느 순간 양심의 한계점을 뛰어 넘게 되면서 존중이 사라지고 모멸과 복수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때 그것을 억제하는 힘이 바로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다.

 

잡초 하나를 뽑으면 수십 개가 새로 나거나 윗집에 사는 사람이 온 몸에 문신을 하고 덩치가 큰 조폭이라면 아무리 손해를 입어도 차라리 농사를 포기하거나 윗집으로 올라갈 생각이 나질 않고 이사를 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나에 대한 존중을 타인에게 맡기게 되면 그것은 언제든 타인의 기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만다. 그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나를 연민할 것이고, 그 사람이 기분이 나쁘면 나를 혐오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경험이 반복되면 큰 상처를 입고, 결국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니 나를 지키고 싶다면 나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 내야 한다. 상대의 상태에 따라서 베풀어지는 존중은 언제든 그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거둬들여질 수 있기에 위험하다. 나에 관한 확실한 존중은 나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수단이 물리적 폭력이나 강압적 권력을 통해서 이뤄지면 안 된다. , 거지가 쥔 총이나 사장의 권력을 통해서 발현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국 겉으로만 나타나는 허상이 되고 만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변치 않는 존중이며,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 존중이다. 문제는 그것을 얻기가 무척 힘들다는 점이다. 두렵게는 해야 하면서 또 두렵지 않게도 해야 하기에 그렇다. 존중을 받으면서도 어울림을 얻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맺을 때 존중과 어울림 사이에서 가장 적절한 조절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어려운 것일까? 왜 존중과 어울림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에 그렇다. 욕망이 조절을 실패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야말로 인기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다들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나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일이다. 사람들은 두렵지 않은 사람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쉬운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막대하기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호구가 되는 길이 되고 만다. 잘 보이고 싶어서 호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운 좋게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하다면 이것은 매우 좋은 태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잘 지내던 누군가에게 갑자기 상처를 입는 말을 듣는다. 위로를 해줬는데 비꼼을 당한다. 도움을 줬는데 당연하게 여긴다. 마음을 써줬는데 귀찮아 한다.

 

머리 속에서는 좋은 의도로 해줬는데 왜 저런 반응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답은 하나다. 그 상대는 당신에게 그렇게 해도 되니까 한 것이다. , 당신을 쉽게 봐서 당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당신을 두렵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늘 잘 보이고 싶고, 늘 잘 지내고 싶고, 늘 좋게 좋게 넘기고 싶은 당신은 그 순간조차도 아무런 말을 못한다.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지지만 단 한마디도 못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상대방이 기분이 나아지면 아무런 사과도 없이 그냥 다시 지내게 되거나 기껏해야 상대방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정도 듣고 화해를 한다. 이런 일이 매일 반복이 된다.

 

사람은 뻗을 자리가 되면 뻗고, 한번 뻗고 나면 언제든 다시 뻗을 수 있다. 그것은 오직 뻗었을 때 한 대 탁 쳐야만 한다.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만 다시는 뻗지 않는다.

 

아무리 친한 사이도 그렇다. 가족이든 친구이든 어디에서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고 싶다면 당신만의 힘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당신은 언제든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도 당신이 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저 당신 주변 사람들이 운이 좋아서 기분이 나빠질 날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당신만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답은 하나뿐이다.

 

욕망을 줄여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욕망을 줄일 때 힘이 생겨난다. 그 누구와도 단절될 수 있음을 생각하고 살아갈 때 당신만의 고유한 힘이 생겨나고, 그 힘이 당신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 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별다른 아쉬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좀 더 신경 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아무런 기대 없이 남들에게 잘해주면 된다.

 

사실 당신이 남들과 잘 지내고 싶은 이유는 '살고 싶어서' 그렇다. 잘나고 싶은 것도, 인정받고 싶은 것도, 인기인이 되고 싶은 것도 그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생존이다. 잘날수록 생존에 유리하다. 백 명 중 한 명을 희생양 삼아야 한다면 가장 영향력이 없고,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이 없으며, 인맥이 부실한 사람이 선택되게 되어 있다. 직장에서 정리해고가 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그런 일을 안 당하려면 영향을 높여야 한다. 인기가 많아야 한다. 잘나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평소에 늘 그것을 원한다. 더 오래 살고 싶어서 그렇다.

 

, 한번 생각해보자. 어떻게 살고 싶은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오래 살고 싶은가? 이미 시대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사는 시대로 바뀌었다. 이미 시대는 두려움에 쫓겨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 사는 시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당신 머리 속은 여전히 오래 살고자 하고, 살기 위해서 먹고, 두려움에 쫓겨서 사는 시대에 머무르고 있다.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당신이 굶어 죽을 일은 없다. 그러니 너무 과도하게 남에게 '잘 보이려고' 포장하지 말아라. 당신이 가진 것만큼만 보여주면 된다. 아니 가진 것조차 줄여서 보여주는 편이 낫다. 허세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당신에게 그리 유리한 일도 아니다.

 

잘 보이기 위해서 더 많이 있는 듯 보이려면 결국 상대방의 판단에 자신을 맞추는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더 많이 웃게 되고 그럴수록 당신은 더 쉬운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더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이 된다.

 

만약에 지금껏 삶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 스스로 만들어 낸 일이다. 살고 싶어서 과도하게 만들어진 욕망으로 인해 빚어진 참사이다. 그러니 당신이 받은 상처는 오직 당신 스스로가 낸 것이다.

 

당신이 타인에 대한 아쉬움을 내려 놓을 수 있을 때 당신은 적어도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지될 때 당신에게는 타인에 대한 선의를 베풀 선택의 순간에 놓일 수 있다. 그 순간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잘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판단은 상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기에 언제든 당신이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잘해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잘해줄 수 있다.

 

잘 보이려고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잘해주는 것이 나에게 더 유리하니까 잘해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같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가능해지는 순간 진정한 다정한 무관심이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