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이루다 2020. 7. 20. 08:50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만약 성격을 정확히 분별해 낼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된다면, 그것도 지문이나 DNA처럼 개인 식별 증거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외모가 거의 똑같아 보이는 쌍둥이들도 성격만큼은 다르다. (참고로 일란성쌍둥이는 DNA는 동일하지만 지문만큼은 다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성격이 다양한 만큼 우리는 만나는 사람 숫자 만큼의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 차를 운전하는 방법은 사실 몇 가지 종류의 차만 몰아봐도 전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차를 운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더 다양해져서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곤란한 경우가 생기곤 한다. 그러니 인간관계가 어렵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성격도 스스로 잘 모를 때가 많다. 분명히 어떤 유형이라고 여겼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전혀 모르던 성격이 튀어나와서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신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이 도대체 어떤 유형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해보려고 그렇다. 또한 자신에게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이것을 위한 도구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MBTI라는 검사가 있다. 성격유형을 판별하는데 있어서 가장 잘 알려진 검사 방법 중 하나로,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선택하면서 특정 패턴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방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주팔자나 점성술도 있다. 이런 오래된 방식들은 보통 미신이라고 치부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들 역시도 자신의 유형을 알고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자기 분석법은 서로 입장이 다르다. MBTI는 한 사람의 현재 상태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 유형인지를 판단해낸다. 사주나 점성술은 반대로 한 사람의 운명은 이미 타고났으며, 그래서 현재 이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 둘 모두 현재의 자신이 왜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 물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한계는 명확하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수 많은 증상들, 그러니까 지금껏 해왔던 다양한 선택, 판단, 행동들은 어느 정도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최초에 왜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판단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냥 원래 그런 성격이라든가 그런 팔자나 운명으로 태어났기에 그렇다고만 한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자신이 왜 그런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를 물어봐야 그냥 그렇게 타고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쪽자리밖에 되질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나머지 반쪽을 마저 아는 방법은 없을까? 현재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이해했다면, 왜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까? 그냥 운명이나 팔자처럼 그렇게 타고난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두리뭉실하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명확하고 세밀한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는 대부분 어릴 때 다양한 종류의 동화를 읽게 된다. 그리고 그 동화들은 각자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흔히 많이 알려진 신데렐라, 백설공주, 콩쥐와 팥쥐 같이 역경을 뚫고 멋진 남자와 결혼을 하는 이야기도 있고, 흥부와 놀부처럼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도 있다.

 

아기돼지 삼형제처럼 안전에 관해서는 절대로 대충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도 있고, 옹고집이나 스쿠루지처럼 사람이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식으로 동화들은 각자 다른 주제의 교훈을 준다. 역경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늘 안전에 신경 써야 한다,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등등, 이런 교훈들은 평생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교육되면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지게 될 '상식', '정의', '도덕', '선과 악' 등의 판단 기준점이 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더 행복하게, 더 오래 살 수 있는지' 를 설명하고 있다. , 행복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경쟁' '공존'이다. 행복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각자 분배하는 고유한 규칙이 있다. 그것에 따라서 수 많은 성격이 나타나며 수 많은 선택와 판단이 이뤄지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수 많은 종류의 신념과 사상 그리고 이론의 근거가 되어 준다. 우리 개개인은 각자 안에 있는 경쟁본능과 공존본능 사이에서 충돌하고 있고, 우리가 모인 사회는 경쟁이냐 공존이냐를 두고 매일 갈등을 겪고 있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와 같은 이야기들은 착하게 살며,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면 왕자와 결혼을 한다는, 겉으로는 행복만을 강조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들에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서 인생 한방 역전을 해내는, 여자들에게 한정된 고전적 성공 스토리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요즘도 남자 잘 만나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여자들을 '백마 탄 왕자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경쟁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흥부나 옹고집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는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흥부의 형 놀부나 옹고집이나 스쿠루지도 어떤 계기로 인해 회개를 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서 남들에게 잘하고 사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것은 공존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물론 단순한 시각에서 보면 동화 속에서는 수 많은 다른 것들을 말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을 깊게 들여다보면 결국 하나만 보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들이다. 처음부터 행복한 삶 조차도 그 목적이 오래 사는 것에 있기에 그렇다.

 

우리는 경쟁과 공존을 통해서 오래 살 수 있다.

 

이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경쟁을 통해 생존을 한다. 단세포 생명체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식물과 동물 구분이 없이 모든 생명체는 자신과 다른 종족과 경쟁을 하고, 같은 종족 내에서도 경쟁을 한다.

 

경쟁을 하는 이유는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 늘 부족해서 그렇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풍족하면 금세 그 숫자를 늘려서 부족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주 넓은 목장에 토끼 한 쌍을 풀어놓으면 처음엔 당연히 풀이 남아돈다. 하지만 몇 해만 지나도 풀은 부족하게 되고 토끼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진다.

 

인간의 경우엔 단순한 식량을 넘어서 수 많은 것들도 경쟁을 한다. 조금만 행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바로 경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새로 나온 신제품을 받기 위해서 며칠 동안 줄을 서고, 다들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예매하기 위해서 광클릭을 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만큼 경쟁이 생활화된 존재도 드물다. 심지어 딱히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조차 경쟁을 한다. 사람들이 내기와 도박을 즐기는 이유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며, 결국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은 경쟁에서 이길 때마다 다량의 행복 보상을 주는데 그것에 빠지게 되면 결국 도박 중독이 되는 것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마이클 조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방송을 했는데, 그 안에서 조던의 모습이 그랬다. 그는 도박 중독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말하듯이 승부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팀의 동료들에게도 그랬다.

 

잠시만 짬이 나도 동전 던지기를 해서 돈 내기를 하고, 쉬는 날엔 끝없이 도박 골프를 쳤다. 어떤 면에서 그가 농구를 잘하게 태어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는 100% 도박 중독자가 되어서 인생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만이 생존의 유일한 열쇠가 아니다. 어떤 생명체들은 좀 더 영리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바로 무리를 짓는 것이다. , 공존이 뒤늦게 아주 중요한 생존전략으로 떠올랐고, 이것에 잘 적응한 종족들은 지금 지구 상에서 아주 크게 번성하고 있다.

 

자연계에서 무리를 지어 사는 존재들은 제법 된다. 근처에 씨앗을 뿌리기에 자연스러운 군집을 이루는 식물들은 무리를 짓는다기에 좀 무리이고 (식물들은 오히려 자신의 씨앗을 최대한 멀리 보내길 원한다), 개미나 벌 등은 하나의 여왕 밑에서 군집을 이룬다. 늑대나 하이에나들은 사회를 이루고 소수 공동체 삶을 살아간다. 좀 더 지능이 높은 원숭이나 고래 등에게서는 좀 더 그 현상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전체가 무리를 지을 수도 있다. 단지 그렇게 하기엔 너무 갈등이 심해져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들 생각이 달라서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패가 나뉘고, 그 패가 나뉘면 결국 무리가 분리가 되고 만다. 그나마 더 크게 무리를 짓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알기에 적당히 어울리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무리를 지어서 사는 것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잇점이 있다. 인간이 현재의 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은 바로 무리를 짓는 능력이었다. 의사소통, 역할분담, 공동책임, 서로가 합의 한 법률 등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묶여서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특히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지 알아야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경쟁은 남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딱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가장 확실한 성공 방법이다. 그래서 만약 1등만 될 수 있다면 많은 것들을 차지할 수 있다. 1등을 못하더라도 상위권에만 있어서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꽤나 풍족하게 살 수 있다.

 

공존은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당장은 확실한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생존전략이다. 자신의 주변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언젠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자신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더군다나 공존을 한다는 것은 경쟁에 비해서 행복에 관해서 만큼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탁월하다.

 

경쟁을 통해 생존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 베풀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왜 처음부터 이기려고 했는지가 애매해진다. 어차피 나눌 것이라면 왜 이기려고 하는가? 그래서 혼란스러워진다.

 

공존을 통해 생존하는 사람들은 딱히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잘 지내고 있기에 그대로 잘 지내면 된다. 물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려고도 하겠지만, 그만큼 받기도 하고, 처음부터 둘이 충돌하지도 않는다. 원래 공존엔 나눔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렇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쟁은 그야말로 생존이다.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공존은 거기에 더해서 행복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좀 더 우위에 있다. 단지 공존은 늘 명확하게 생존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경우엔 다수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이 요구될 때도 있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런 소수의 희생을 통해 다수가 행복하게 오래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경쟁과 공존, 이 두 가지 생존전략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쪽만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단지 사람에 따라서 어떤 성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지 정도만 다르다.

 

경쟁과 공존을 단순화 시키면 개성과 유행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남들과 다른 나를 추구하는 것과 남들과 최대한 비슷한 나를 추구하는 것이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우뚝 서는 것이 개성이며 남들과 비슷해져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유행이다.

 

경쟁은 적극적이며 날카롭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얻었을 때 얻는 순간의 행복감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하다. 쉽게 말해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딴 순간을 떠올리면 된다. 너무도 붙고 싶었던 시험에 합격한 순간을 떠올리면 된다. 이런 식으로 경쟁의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난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을 얻었을 때 얻는 행복감은 남다르게 된다. 하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 강도는 크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금세 잊히고 만다.

 

공존은 소극적이며 부드럽다. 그것을 얻는 순간이 딱히 존재하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누군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할 때, 선물을 주거나 받을 때, 누군가 나를 챙겨줄 때 소소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강도는 약해도 빈도는 훨씬 더 잦다. 그리고 행복에 관해서만큼은 강도가 큰 것보다는 빈도가 잦은 것이 훨씬 낫다.

 

경쟁은 남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올림픽 결승전에 올라간 선수가 상대가 졌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플지를 생각한다면 그 경기에 이길 수 없다. 이기고 난 후 위로를 해줄 수는 있지만, 승부 그 자체엔 완전히 몰입해야만 한다.

 

공존은 기본적으로 남의 입장에 대한 고려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공감능력을 가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실 우리 사회가 말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사회 그 자체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기에,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감능력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못한 사회는 결국 붕괴되고 만다.

 

어떤 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경쟁과 공존, 이 두 가지 성향을 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비중이 달라서 경쟁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사람이 있고, 반대로 공존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사람도 있다.

 

경쟁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매우 적극적으로 그리고 전투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남을 배려하기 보다는 나를 채찍질해서 최대한 높이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성향이 큰 사람들이 주로 우파가 된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낙수효과를 말한다. 일단 최대한 많이 가진 후 그것을 나눠주면 된다는 입장이다.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결국 그것을 같이 축하해줄 사람이 없으면 행복하기 힘들기에 내놓은 나름대로의 묘안이다.

 

공존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 너그럽고 관대하게 대한다. 이기는 것보다는 뒤쳐진 사람들을 챙기고 함께 가려고 한다. 가진 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나누려고 한다. 이런 성향이 큰 사람들이 주로 좌파가 된다. 그리고 딱히 뭔가를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더불어 사는 삶이 강조된다.

 

사람들이 경쟁을 할 때면 크게 두 가지 성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반드시 1등을 해야 하는 유형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발 꼴등만 안 했으면 하는 유형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능하면 중간은 가고 싶어 한다.

 

이것 역시도 경쟁과 공존,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에 더 중심이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 경쟁이 중요한 사람들은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 하지만 공존이 중요한 사람들은 그저 꼴등만 안 하면 된다. 평소에 뒤쳐진 남들을 챙기고 배려하지만, 그 자신이 챙기고 배려를 당하는 입장은 되고 싶지 않기에 그렇다.

 

상황이 좋다면 계속 챙겨질 수 있지만 언제라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버려질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상황에 따라서 남을 버릴 수 있음을 알기에 자기 자신이 챙김을 받는 입장에 서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공존의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결국 그것이 각자의 생존전략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나를 위해서 남을 도울 뿐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여기까지 이해를 했다면 이제부터 자신이 왜 그런 성격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연관시켜서 이해를 해보자.

 

사람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경쟁과 공존에 분배된 비중으로 인해 생겨나게 된다.

 

경쟁이 우위에 서면 개성이 강하고 승부에 집착하며 공감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타인은 늘 잠재적 경쟁자로 여기고 신뢰보다는 불신이 먼저 한다. 능력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누군가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도 바로 그 사람이 가진 능력과 이룬 성과가 된다.

 

평소에 승부를 즐기며 자주 내기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뛰어난 존재임을 증명 받을 때 큰 행복을 느낀다.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다 잘하려고 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재주가 많고 머리도 좋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머리가 좋고 재주가 많기에 그런 성향이 유지가 된다.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타고나지는 못한다. 경쟁이 우위에 있지만 머리가 나쁘고 재주가 부족하면 그야말로 지옥이 펼쳐진다. 이기는 것이 가장 행복한데 이길 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남을 잘 못 믿고, 공감능력마저 떨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도 못 받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결국 탈락자가 된 사람들은 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남은 공존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게 된다. 아니, 흉내를 낸다.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려고 한다. 남을 챙기거나 배려하는 연기를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에게 이득이 될만한 사람들만 골라서 집중한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이 되고 만다.

 

정식으로 하는 경쟁에서 이기기 힘드니 다른 분야로 도망을 간다. 경쟁이 심하지 않은, 사실상 처음부터 공존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봉사단체나 종교 영역으로 가서 상처 받은 자신을 치료하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조금 잘한다 싶으면 바로 그 본색을 드러낸다. 봉사왕, 전도왕이 되려고 한다. 거기에서 1등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진짜로 경쟁해야 하는 분야에서는 안되니까 경쟁자가 적은 분야에서 1등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실패한 분야를 부정하고 자신이 1등을 하는 분야의 가치를 한껏 강조하게 된다. 나눔의 가치를 강조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믿는 종교를 타인에게 강요한다. 자신만 그렇게 살면 될 것을 끝없이 남들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입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정말로 그런 사람인 양 착각하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내면엔 언제나 자신이 경쟁에서 탈락했던 분야에 대한 동경이 숨겨져 있다. 능력이 되지 않아서 가지 못할 뿐이지 능력만 되면 언제든 그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러니 기회가 되면 그곳에 간다.

 

공존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필요는 하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그렇게 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는 공존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경쟁의 가치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공존이 중요한 사람들이 혼란스럽다. 딱히 남들과 다투면서 지내거나 적당한 손해쯤은 그냥 넘겨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주변에서 난리가 난다.

 

그런 대접을 받으면 호구라고 한다. 지금 물러서면 다 잃을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오랜 시간 자주 반복해서 듣게 되면 세상과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이 비겁하거나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없던 자기 혐오감이 생겨난다. 뭔가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란 생각까지도 든다. 그리고 계속 그런 생각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자괴감이 들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냥 살았으면 손해를 보더라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참견으로 인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행해지고 만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경쟁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누군가는 살짝만 스쳐도 싸워서 사과를 받아내야 속이 차지만 누군가는 뺨을 한 대 맞아도 그냥 보낼 수 있다. 지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인 사람이 있고,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 사람이 있다. 경쟁을 통해 생존하려는 사람은 지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고, 공존을 통해 생존하려는 사람은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생존전략이 경쟁이면 아주 작은 승부도 다 이겨야 하지만 공존이라면 적당히 지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있다. 오히려 싸우면 더 마음에 남고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꾸 싸우라고 하니 괜히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울해지고 만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성향이 무엇이 우위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이 경쟁인지 공존인지 알아야 그 동안 자신이 해왔던 수많은 선택들이 이해가 간다.

 

경쟁이 우선인 사람은 모임에서 리더가 되어야 행복하다. 힘들어도 앞서야 한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잘난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도대체 행복하기가 힘들다. 그러니 바꿔야 한다. 용 꼬리가 아닌 뱀 머리가 되어야 한다.

 

공존이 우선인 사람은 모임에서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힘들게 앞설 필요가 없다. 뒤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챙기면서 살면 된다. 괜히 감투를 써봐야 힘들고 나중엔 포기하게 된다. 뱀 머리보다는 용 꼬리가 되어서 더 나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낫다.

 

이 둘의 비중이 각자의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점이 된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뒤쳐진 사람들을 버리고 갈 것이고, 더불어 사는 삶이 목적이라면 같이 죽더라도 함께 가려고 할 것이다.

 

이것을 생존적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 관점에서 보는 순간 문제가 생겨난다. 원래 생존본능엔 각자의 성향만이 존재할 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그저 공존과 경쟁의 다르게 부르는 것일 뿐이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같이 사는 삶을 추구하기에 공존을 선이라고 부르고 경쟁을 악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잘못된 도덕적 관점만 벗겨내고 나면 그 본질이 나타난다. 극단적 경쟁형 인간이었던 마이클 조던이 농구를 할 때는 영웅이 되고 선이 되지만 도박 골프를 칠 때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악이 된다. 하지만 조던 그 자신에게는 그 둘이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기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 주입한 도덕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어떤 성향이 더 크게 나타나는지 제대로 알아야만,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들과 다른 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경쟁형 인간인지 공존형 인간인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노력을 멈출 수 있다. 경쟁형 인간이 나눔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공존형 인간이 승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행복 효율성은 바닥이 된다. 그것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결국 자신의 삶을 좀먹게 된다.

 

더해서 그 누구도 한 가지 성향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쪽을 추구하면서도 나머지 한쪽도 생각해야 한다. 모두 다 이기면 고독할 뿐이고, 모두 다 나누면 남은 것이 없다. 축하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고, 나눌 것이 없는 사람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결국 버림을 받는다.

 

거기엔 어떤 의미나 가치가 없으며 오직 각자의 행복과 장수에 대한 무한대의 욕망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 인간은 비록 매우 똑똑하지만 결국엔 생명체이다. 그리고 생명체에게 유일한 절대적 가치는 생존이다. 단지 행복하게 생존하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