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당신이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아이루다 2020. 6. 15. 08:59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보통은 무엇을 할까요? , 여러 가지 아주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꼭 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서로 말을 주고 받는 행위, 그러니까 대화를 합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등산을 하지 않아도, 골프를 치지 않아도, 게임을 하지 않아도, 쇼핑을 하지 않아도, 영화를 보지 않아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대화는 합니다. 만약 정말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묵언수행을 하는 분들 뿐이겠죠.

 

그런데 대화는 딱히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라서 누군가를 보기 위한 직접적인 이유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너 나랑 대화하려고 만날래?' 하면서 약속을 잡는 경우는 없다는 뜻이죠. 대신 영화를 같이 보거나, 밥을 같이 먹거나, 여행을 같이 가거나, 같이 놀기 위해서 약속을 잡죠.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그런 약속을 하는 이유 자체가 바로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과 영화, 밥, 여행, 쇼핑 등을 하고 싶으세요? 관심 없는 주제로 자꾸 대화를 하려는 사람이나, 듣지는 않고 자기 말만 계속 하는 사람이나, 뭔가 대화의 핀트가 자꾸 어긋나는 느낌이 드는 사람과 그런 것들 하고 싶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그런 경우라면 불편해서 오히려 혼자 하는 편이 낫다고 느낍니다. 같이 본 영화가 재미가 없었거나, 같이 간 여행지이 별로였거나, 같이 먹은 밥이 별로였다고 해도 그때 만났던 사람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고 느낀 상대라면 가능하면 보지 않으려고 하게 되죠.

 

대화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아주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만나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를 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밥, 영화, 여행 등과 같은 것들은 그저 대화 시간을 만들기 위한 보조적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친구나 지인 등, 어떤 식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 자체가 바로 주기적으로 그들과 만나거나, 전화를 하거나, 문자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대화를 주고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알더라도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상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누군가를 알고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그러니 길에서 모르는 낯선 사람들과는 좀처럼 대화를 시도하지 않죠.

 

이런 원리로 누군가와 안다는 것, 그 사람과 친하다는 것,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 모두 얼마나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으냐' 정도에 따라서 구분이 됩니다. 상대와 대화를 하고 싶을수록 더욱 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되죠. 반대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수록 그 사람을 싫어하거나 심한 경우 적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대화는 마치 공기 중의 산소와 같습니다. 너무도 중요하지만 늘 존재하고 있어서 그 중요도가 잘 인식되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산소가 없어지면 우리가 바로 죽듯이 어떤 관계에서 대화가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상 그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가장 중요하다고 알려진 가족간에도 갈등이 심화되어 대화가 끊이는 순간 그 관계는 파탄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심하게 상처를 받게 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말문을 닫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상처를 받은 아내는 평소처럼 밥을 해주지만 말을 하지 않죠. 아내에게 상처받은 남편은 평소처럼 월급을 가져다 주지만 말을 하지 않죠. 그렇게 한쪽이 말문을 닫기 시작해서 오랫동안 지속되면 보통 그 관계는 파탄으로 끝나게 됩니다. 반대로 화목한 가정은 대화가 끊이질 않습니다. 물론 매일 싸우는 대화를 하는 부부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많은 대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을 만나는 숨겨진 진짜 목적이 대화라고 치면, 그 대화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 어려운 질문은 아닙니다. 인간의 모은 행위의 목적은 무조건 단 하나로 귀결되니까요.

 

바로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대화를 잘하는 능력은 우리가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정말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지요.

 

물론 우리 인간에게는 다른 능력들, 재력, 지력, 운동능력, 권력, 외모 등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많이 가진 상대방에게 큰 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딱 거기에서 막힙니다. 자기 자랑만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같은 소리 반복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과 한 시간만 대화를 해도 피곤해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너무도 잘나서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이득이 될 것 같거나, 상대방의 권력이 너무 커서 도대체 듣지 않고는 살아날 수 없다면 버티겠죠. 그런데 그런 버팀은 대화의 원래 목적인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죠. 그러니 불행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행복하긴 힘듭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그만큼이나 쉽고 흔하게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을 정도이죠. 그러니 만약 인생에서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의 삶은 80% 이상이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20%를 채우는 것이 바로 돈, 명예, 권력 등을 가지는 것인데, 그런 것들은 당연히 가지면 가질수록 좋긴 하지만 일정 수준만 되면 더 이상 크게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을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다 보니 좋은 대화능력을 가지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물론 이것도 능력이기에 기본적으로 타고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화를 잘하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그리고 후천적 환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사람들이란 뜻이죠.

 

그렇다면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야 할까요?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노력을 하면 나아질 수 있지요. 그런데 그 나아질 수 있는 영역은 말을 그럴 듯 하게 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잘못 이해한 채 이상한 버릇이 생겨버린 대화방식을 제대로 고쳐놓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사실 대화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보다 대화하는 버릇이 잘못 잡힌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흔한 대화의 태도로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조언을 많이 듣습니다. ,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태도이죠. 하지만 도대체 왜 주의 깊게 들어야 할까요? 그리고 또한 주의 깊게 들었을 때 도대체 무엇을 더 얻어내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단순히 눈을 부릅뜨고 집중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죠. 뭔가 다른 것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대화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해보도록 해요. 왜냐하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대화 그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망치고 있거든요. 그러니 그것부터 뜯어 고쳐보도록 해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책을 기준으로 설명을 해 볼게요. 사실 책도 일종의 대화이긴 합니다. 서로 비 대면이고 알지도 못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가 일방적으로 말을 한 것을 독자가 일방적으로 듣는 과정이긴 하지만요.

 

자, 책은 과연 어떤 종류들이 있을까요? 이것을 알면 대화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은 그 내용을 기준으로 대충 소설, 자기계발서, 심리학, 철학, 산문, 참고서 등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뿐이죠. 그것은 각각 감정을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책과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책입니다. 예를 들면 감정을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책은 소설, 에세이 등이고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책은 학교 교제나 참고서 등이죠.

 

그리고 이 둘 중에서는 전자인 감정을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책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심지어 정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서나 철학서 같은 것들도 사실상 어떤 식으로든 저자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정말로 오직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책은 교과서 정도일 것입니다. 특히 공대생들이 보는 교재는 그런 편이죠.

 

, 생각해보세요. 어떤 종류의 책이 읽기 쉬울까요? 그 내용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읽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해요. 감정을 읽기는 쉽지만 내용을 읽으려면 머리를 아주 많이 써야해요. 그래서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거나,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거나, 시험을 봐야 할 경우에나 읽게 되죠. 혹은 아주 특이하게 타고난 성향이 지식을 쌓는 것을 통해 많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아주 즐겁게 참고서 류의 책들을 읽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참고서 보다 소설책을 좋아하죠.

 

책이 그렇듯이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 역시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뉘죠. 하나는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대화가 있습니다. 커피가게에서 주문을 하거나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뭔가를 배울 때 하게 되는 대화이죠. 별로 행복한 시간은 아닙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죠. 사실 행복과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만 간접적으로 행복에 영향을 주긴 합니다. 주문을 해서 맛난 음료를 먹거나 학교에서 잘 배워서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요.

 

두 번째는 당연히 감정을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대화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 속에서 하는 99% 정도의 대화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사실 대화를 행복하고 싶어서 한다고 정의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바로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대화를 통해서는 감정 자체를 느끼기가 힘들고 그래서 행복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죠. 

 

행복은 원래 처음부터 감정이기에 당연히 감정을 전달하는 대화만이 행복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됩니다.

 

, 지금 이순간 대화에 관한 정말로 중요한 설명이 하나 나왔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목적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이고, 그 감정을 전달하는 이유는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뻔한 설명이 왜 중요하냐고요? 중요합니다. 만약 이 말을 '착하게 살아라' 라는 등의 뻔한 말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이 뻔한 말이 가진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으니까요.

 

위에서 우선 잘 듣는 것이 대화를 잘하는 기본 태도라는 설명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잘 듣는다는 말이 가진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상대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추측해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남편과 있었던 즐거웠던 일을 말할 때,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친구가 왜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남편 자랑을 하려고 하는지, 내가 방금 한 얘기에 질투심을 느껴서 하는지, 정말로 재미가 있었기에 말을 하는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줬으면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사람이 어떤 태도로 어떤 말투로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다릅니다. 그러니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사실 듣는다기 보다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어를 단어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상황에 맞춰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친구가 이혼을 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더라도 그것이 말려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럴 수 있도록 용기를 돋아달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네가 나서서 자신을 좀 도와줬으면 하는 의미인지 아니면 내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으니 오늘 밥값은 네가 내야 한다는 의미인지를 유추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을 해줄 수 있는 것이죠. 혹은 알더라도 모른 척 할 수 있죠. 그래서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밥값을 낸 친구가 삐졌을 때 그 이유 정도는 알 수 있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듣는 것, 이것을 바로 대화가 통한다고 표현하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상대가 하는 말을 내용 그대로만 해석해서 대꾸를 하게 되면 뭔가 어긋남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참고서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망치는 가장 흔한 주범이지요.

 

여러 번 강조하지만 대화는 내용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내용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 사람의 숨겨진 감정을 읽어낼 때 제대로 된 대화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그 내용에 집착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대방이 진짜 원하는 말을 해주지 못하거나 오히려 반대로 말을 해서 대화 그 자체를 망칩니다. 알면서 그러는 것은 상관없이지만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것이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물론 그런 짓을 하고 난 후에도 스스로 당당합니다. 자신은 상대가 한 말을 근거로 최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대꾸를 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변명엔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도 결국 그 순간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죠. 바로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이해를 바라고 있습니다. ,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를 하고 있지만 결국엔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감정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 떠나서 처음부터 왜 대화를 한 것일까요? 당연히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대화를 한 후 기분이 나빠졌다면 어떤 이유를 가져다 대도 결국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이성과 논리 그리고 객관적 태도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죠. 우리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상대방을 완벽히 눌렀다고 해도 결국 거기엔 이겼다는 감정적 행복이 있을 뿐이죠. 사실 이겼다는 감정적 행복감을 누릴 욕구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왜 그렇게 논리, 이성,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려고 하겠습니까?

 

누군가 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이유는 보통 참고서 식으로 대화를 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정작 자신은 감정을 전달하면서 상대의 말은 참고서로만 듣는 것이죠. 그렇기에 결국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해서 대화를 종결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죠.

 

물론 살다가 보면 참고서 식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커피가게에서 주문을 할 때 그렇죠. 하지만 정보나 지식을 전달할 때조차도 감정을 실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가 원활하게 흘러가죠.

 

그나마 그런 문제들은 그리 큰 것이 아닙니다. 참고서식 대화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싸움' 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정보와 정보가 충돌하고 해석과 해석이 충돌합니다. 같은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할 때 상대방의 말을 오직 그 내용으로만 듣습니다. 감정으로 들어줘야 왜 저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는데 내용만 들으니 당연히 충돌이 생깁니다.

 

누군가 성전환자에 대해 비판적 말을 할 때 그 내용은 주로 그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과거에 어떤 사례들이 있어왔고, 미래에 인류에 어떤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 그 말을 했을까요? 사실 사회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수 없이 많습니다. 너무도 많아서 그것을 다 말하려고 하면 일년도 더 걸릴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들 중에서 성전환자의 존재 정도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사회가 가진 비교도 안되게 안 좋은 것들은 너무도 많으니까요. 플라스틱 문제, 지구 온난화 문제, 식량 문제, 종교 문제, 정치 문제, 인종 차별 문제, 핵무기 문제, 바이러스 문제, 인구 과밀화 문제, 노령문제, 빈부차이 문제 등등 다 열거하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왜 유난히 그 문제를 지적할까요? 당연이 거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 처음부터 생각해봐야 기분이 좋지 않은 거에 관심을 가질까요?

 

우리가 야외에 앉아 있을 때 바지 위에 떨어진 낙엽과 송충이 중에서 어떤 것에 더 관심을 가질까요? 당연히 송충이입니다. 낙엽은 그냥 스쳐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것이 송충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깜짝 놀라서 일어나 털어버리겠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안 좋은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핵무기보다, 인구 온난화보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보다 성전환자가 두렵기 때문에 그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지식을 쌓은 것입니다. 그렇게나 다양한 많은 경험적 사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전환자에 대해서 생식능력이 없는 인간은 불필요할 뿐이라, 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맞서봐야 해결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각자가 믿는 사실이 충돌할 뿐이죠. 그래서 이때 대화는 그 방향이 아닌, 왜 그 사람이 성전환자를 그렇게 두렵게 느끼게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왜 그 사람이 그냥 넘기지 못하고 그런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합니다.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혐오감이 드는 말을 들었거나, 종교적인 이유가 있거나, 어린 시절 실제로 어떤 나쁜 기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화는 그렇게 흘러가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성별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든가,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든가,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나쁜 영향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든가 하는 반론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저 또 다른 강한 반론을 불러올 뿐입니다.

 

설령 반론을 하더라도 상대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하면 훨씬 부드러운 대꾸를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한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받았기에 그렇죠. 그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으니 당연히 부드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을 성전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만 들으면 절대로 그럴 수 없죠. 상대의 말을 듣고 상한 내 감정을 풀기 위해서 어떻게든 상대를 눌러야 하니까요.

 

상대가 어떤 말을 하든 그 말을 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싸움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대화를 할 때 가장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보통 자신이 하는 말에 스스로 빠져서 그렇습니다.

 

자신도 역시 감정을 전달하고 있기에 그 감정에 빠집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에 빠지지 않아야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니 상대방의 말을 단어 그대로만 듣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대꾸하다가 싸움이 납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런 대화를 많이 합니다. 여자들이 뭔가 곤란한 것을 말하면 그 감정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고 자꾸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냥 감정만 받아주고 그 내용에 상관없이 상대방의 다친 마음을 위로해주면 끝인데, 재판관이 되어서 선악을 규정합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 고를 자기 마음대로 선고합니다.

 

상대가 도대체 무엇을 듣고자 했는지, 상대가 전달한 감정을 다 배제하고는 완벽한 로봇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자신도 결국 감정을 전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로봇인 척만 할 뿐이죠.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이유는 지식의 전달의 목적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진짜 목적은 따로 있죠. 잘난 척을 하거나, 상대방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지 알려주려고 하거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목적입니다. 혹은 상대방에게 도움을 줘서 호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죠. 이런 목적이 없다면 왜 힘들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지식을 알려줄까요?

 

원래 사람은 돈을 받아야 그런 일들을 합니다. 학원의 강사들이 그렇습니다. 돈을 안 주면 왜 가르쳐 줄까요? 돈을 받으니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만약 돈을 안 받는다면 기분이라도 좋아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나 기분이 좋은 것 모두 행복입니다. 돈은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행복으로 변화되긴 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매우 확실한 도구 중 하나죠.

 

그러니 내가 아무리 객관적인 태도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상대에게 전달하고 있어도 결국 거기엔 내 감정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를 칭찬해달라고, 나를 인정해달라고, 나를 좀 더 나은 평가를 해달라는 욕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고 상대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야만 제대로 된 대꾸를 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잘하고 싶은가요? 그러면 단 한가지만 기억하세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왜 그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세요. 그러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의 깊게 듣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상대가 말한 내용을 잠시 놓쳐 반문하더라도 오히려 상대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흔한 표현으로 굿리스너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 때 자신이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아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조차도 그저 그 순간의 자기 감정에 휩싸여서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제대로 들을 수 있다면 오히려 듣는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운이 좋다면 말하고 있는 사람 본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이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을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조언을 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상대는 당신을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 글 역시도 참고서 같지만 사실은 여러 가지 제 감정을 한꺼번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을 받을지는 당신 몫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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