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간이란 생명체

아이루다 2020. 6. 9. 08:15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동물로 정의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매우 심각한 거부감을 나타내거나 부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평소 가끔 어떤 상황에서 '인간도 결국 동물이잖아?' 라는 말을 하긴 한다. 하지만 그 말은 ''에게만 적용될 뿐이다.

 

정작 자신이 동물처럼 대접을 받게 되면 그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이 동물처럼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이란 뜻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권리를 더 이상 행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동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막상 자신이 동물처럼 취급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온전히 과학적인 입장에서만 보면 인간은 결국 고도로 진화된 동물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사실을 밝혀낸 과학자조차도 그렇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정말로 다양한 종류의 증거들과 이론들 그리고 논리적 설명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그런 설명들을 듣다 보면 사람은 동물 이상의 어떤 존재로 느껴진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해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런 현상은 더욱 더 심화된다. 특히 '' 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특별한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다. 그 신을 통해서 인간은 지구상의 생명체들 중 하나에서 신이 만든 특별한 존재이거나 혹은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격상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설명을 꽤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믿는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단순히 머리 속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잠깐 생각해봐도 우리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누리고 있는 수 많은 권리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구를 파서 석탄과 석유를 쓰는 권리, 지상의 땅을 금을 긋고 내 땅, 네 땅을 하고 있는 권리, 자연 속에서 자라는 수 많은 작물들과 나무들을 먹고 쓸 수 있는 권리, 씨를 뿌렸다는 이유로 갖게 되는 수확의 권리, 넓은 바닷속에 있는 수 많은 물고기들을 잡을 수 있는 권리 등등 이 지구 자체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구의 미래를 걱정한다. 지구가 우리들의 권리이기에 그렇다.

 

지구뿐만이 아니다. , 화성 그리고 태양계, 그리고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언젠가가 오면 우리가 속한 은하계와 이 우주 자체가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런 권리의식은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만약 외계인이 쳐들어와서(사실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 지구를 내놓으라고 하면 누가 총을 들고 싸우지 않겠는가? 싸우지 않는 사람은 그냥 적응하거나 겁이 나거나 오히려 외계인 편에 서서 생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일뿐일 것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은 절대로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다. 뭔가 증명된 확실한 근거는 없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단순한 생명체가 아님을 명시적으로 믿고 그 근거를 만들려고 한다.

 

보통 남들보다 머리가 좋고 많은 성과를 이룬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자신이 해낸 일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큰 성과일수록, 대단한 업적일수록, 남들에게 많은 칭송을 받을수록 자신이 해낸 일이 단순한 생존활동이 아니어야 하기에 그렇다. 그런 대단한 결과물들하고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당연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어떻게 한끼 식사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 위대한 결과물들을 남기는 것은 생존을 넘어서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한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꼭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변화도 아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생명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일이다. 그나마 부정까지는 않더라도 뭔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한다.

 

인간이 생명체로써 행복을 얻는 것은 매일 일어난다. 우리는 매일 먹고, 자고, 싸고, 짝짓기를 하면서 행복해 한다 (물론 짝짓기는 하고 싶다고 해서 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먹는 행복, 자는 행복, 싸는 행복, 짝짓기를 하는 행복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다들 그것을 통해서 행복하다. 하지만 그 행복만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본능의 행복을 넘어선 어떤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본능적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동물 같은 삶이라고 평가를 할 것이다.

 

다들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사람이라면 동물들은 누리지 못하는 행복, 오직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행복, 창작의 행복, 함께하는 행복, 발전의 행복,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행복, 새로움을 경험하는 행복,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행복,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행복, 남을 돕는 행복,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행복, 자기계발의 행복, 도전의 행복 등등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들은 단순히 '먹고 사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생각을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본능적 행복을 추구하는데 맞춰진다. 개나 고양이도 생각을 하긴 하겠지만, '나는 누구인가?', '이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지는 못한다.

 

, 동물들을 결코 할 수 없는 고차원적으로 보이는 생각을 통해서 인간은 확실하게 동물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답을 하는 과정이 그렇다. 그런데 인류 문명 초기에 그런 철학자들이  인간을 무엇인지로 정의했고 그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동물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었다.

 

인간은 생존을 넘어 선 어떤 존재가 되었으며, 우리 자신을 단순히 살기 위해서만 사는 존재가 아닌 뭔가 의미가 있거나 명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나는 존재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다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생각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다들 밥을 먹기에 살 수 있음을 알면서도 정작 '밥벌레'는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는 욕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자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동물이 아니고 싶었기에 외면한 것들, 그러니까 본능적 행동들을 통해 얻는 행복을 부정하면 할수록 그만큼의 대체제로써의 행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본능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난이도는 급상승한다.

 

그러니까 인간을 생존의 존재가 아닌 어떤 의미나 목적이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생존을 통해서 얻는 본능적 행복을 외면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의 대체 행복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을 얻기가 그리 쉽지 않다. 정말로 맛난 밥을 먹고 있을 때 얻는 행복감을 책을 읽으면서 얻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할까? 꿀잠을 자고 난 후 느끼는 상쾌함을 얻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배움이 있어야 할까? 섹스 후의 만족감을 얻으려면 얼마나 높은 산을 올라야 할까?

 

그나마 운 좋게 책을 읽거나 배울 때의 과정을 통해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괜찮지만 그 목적, 그러니까 많은 지식이나 뭔가를 잘하는 자신을 원해서 힘들게 노력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사람은 오직 결과물을 얻을 때만 잠깐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행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과정은 행복은커녕 오히려 고통스럽기에 불행하기만 하다.

 

물론 성과가 확실하다면 난이도가 높을수록 노력에 대한 보상도 크긴 하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일은 힘들지만 일단 다녀오면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소수의 사람들만 그런 행위를 할 때 그렇고 요즘처럼 산을 오르는 동안 정체 현상이 생길 정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는 상황에 놓이면 그것도 별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행복을 얻기가 힘들고 또한 얻은 후에도 짧고 강렬한 행복을 얻긴 해도 그것이 금세 사라져버리고 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정말로 행복한 삶일까? 물론 그 사람이 이뤄낸 업적을 인류적으로 공유하면서 좋은 미래를 만들어 내긴 한다. 하지만 당사자의 삶은 어떨까? 인류사적인 발견을 위해서 60년 동안 집안에서 연구만 한 사람의 삶은 행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할 수도 있다. 옆에서 그 성과를 인정해주고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단지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없었다면 결국 언젠가는 공허함 속에서 몸부림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까?' 특히 노력 후에도 운이 나빠서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때 감당해야 할 좌절감과 절망감은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이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그냥 우리는 동물처럼 행복하면 안 되는 것일까? 왜 꼭 그것을 뛰어 넘는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행복을 저급/고급으로 나눈다든지 행복이란 용어 자체를 쾌락과 행복으로 구분하는 그런 짓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맛난 밥을 먹는 행복은 쾌락이고 인간과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구분하는 것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행복하다는 것은 동일한데 말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대해서 비웃을 것이다. 무슨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는 그 대상이 단지 우주의 기원이 아님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대상이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 여행, 취미, 가족, 관계, 성공, , 경험, 친구, 부부, 음악, 미술, 공예 임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라 정말로 즐겁고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라고 그 자신도 착각에 빠져 있음을 결코 자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을 자각하는 일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행동들을 더 이상 지속하기가 힘들어져서 그렇다. 그러니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척 해야 한다. 자신이 비웃었던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들과 자신이 동급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상한 별종이지만 여행을 하면서 행복해 하는 자신은 진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 과정을 통해서 타인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한 순위가 매겨진다. 좋은 행복, 나쁜 행복이 나눠지고 절로 감탄이 나오는 대단한 행복과 도대체 왜 저러나 싶은 행복이 구분이 된다.

 

자기 자신을 동물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은 지구에 대한, 이 우주에 대한 권리를 만들어 내는 용도로 작용을 한다. 그것이 좋든 싫든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추구하는 개별적 행복들은 우리를 서로 분리시킨다.

 

너를 비난하고, 너를 칭찬하고, 너를 우습게 보고, 너를 존경하고, 너를 무시하고 너를 존경하는 근거가 된다. 각자 추구하는 행복을 통해서 서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 위해서 이런 대단한 문명을 이뤘지만 그로 인해서 수 많은 갈등과 다툼을 겪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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