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상처는 정말로 받는 것일까?

아이루다 2020. 4. 22. 08:23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려고 하지 말아라"

 

"사람을 쉽게 믿지 말아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다른 사람의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너 자신도 타인의 거절을 쉽게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하든 결국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는 사람은 남는다"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는다. 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보니 지치는 것이다"

 

* * *

 

위에 있는 글들은 인간관계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보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만한 표현들이다. 딱히 뭔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좋은 의도로 했고, 내가 힘들어도 상대를 공감해주고 이해해줬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아쉬울 때만 나를 찾다가 그 아쉬움이 사라지면 훌쩍 멀어지고 만다. 상대에게 내가 필요할 땐 같이 있어줬는데 정작 나에게 상대가 필요할 때는 등을 돌린다.

 

슬프고 힘들 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해줬는데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려고 하면 자신이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떠난다. 이렇게 상대는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나 모두 자신의 입장만으로 결정한다. 거기엔 나에 대한 배려나 마음 씀씀이는 하나도 없다.

 

의리 없음, 배신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런 식의 행동들이 상처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삶을 살면 살수록 수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잘해줘 봐야 소용이 없고 기대해 봐야 실망만 생겨날 뿐임을 절실하게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앞에 나온 글들처럼 차라리 그런 노력을 나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겨진다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소중하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진리인 듯 느껴진다.

 

그래서 위에 있는 글들을 읽으면 어느 정도 위로도 되면서 자신이 과거에 살아왔던 어리석은 삶에 대한 후회가 든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는 과거와는 다르게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여기까지는 대충 그럴 듯 하다.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에는 두 가지 잠재적 문제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는 꽤나 치명적이다.

 

첫 번째는 어제까지 사람들에게 잘하던 사람이 오늘부터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살기가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아니, 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행복하기는 힘들다. 처음부터 남을 잘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은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잘 노는 사람들은 혼자서도 행복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상처를 받을 일도 없다. 결국 관계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관계를 통한 행복을 원했기에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남들과 단절을 하고 나서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하기가 힘들다. 물론 할 수는 있다. 많은 노력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들여서 혼자서 뭔가를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되기는 한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수다를 떨 때 얻는 행복을 오직 혼자서 얻으려면 그보다 수십 배의 노력과 돈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도 상처를 입는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그래서 그나마 괜찮다.

 

두 번째 문제가 치명적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문제는 사람들이 가진 아주 오래된 착각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도 없이 잘해줬다는' 착각이다. 순수한 의도로 잘해줬다는 착각이다. 내가 상대를 위해서 배려해줬다는 착각이다. 아니, 처음부터 이해나 배려 그리고 공감이 상대방을 위한 것이란 착각이다.

 

이해, 배려, 공감 등은 매우 좋은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냉정히 말하면 처음부터 착각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단어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 누구도 상대를 위해서 뭔가를 하지 못한다. 인간은 오직 그 자신을 위해서만 행동한다. 이해, 배려, 공감조차도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이득을 얻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이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행동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상대방을 위해서' 라는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득의 개념이 너무 물질적인 것으로만 한정되어 있기에 그렇다. 흔히 사람들은 돈, 물질, 정보, 기회, 보상과 같이 명확한 실체가 있는 것을 받을 때만 이득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누군가를 공감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도움을 줄 때 느끼는 좋은 기분, 충만함, 만족감, 따뜻함 등의 감정들도 아주 커다란 이득이다.

 

인간이 이득을 추구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면에서 돈과 만족감은 행복을 위한 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그래서 그 둘은 원칙적으로는 똑같다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남을 돕는 것도 내가 기분이 좋아지기에 하는 것이다. 기분이 나쁘다면 단돈 10원도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왜 남을 돕거나 잘해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내가 착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 사람에게 뭔가를 쌓아뒀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내가 이번에 도왔으니까 나중에 내가 아쉬울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란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 또한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맞춰주면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맞춰줄 것이란 기대감도 갖는다.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남을 도울 때 상대방의 보상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이 돕기도 한다하지만 그것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 기대의 범위가 넓어졌을 뿐이다. 내가 도움을 준 상대가 나에게 보상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인해서 세상이 좀 더 나아진다면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속한 사회에 자신의 힘이 더해진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도 결국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며 이득이며 행복이다.

 

그에 반해서 보통 사람들 조금 더 직접적일 뿐이다보통 사람들은 내가 남을 도왔다면 내가 도움을 준 남이 나를 도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내가 과거에 도왔던 상대방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데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을 하게 되면 당연히 상처를 받게 된다. 상대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줬는데 내가 힘들 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간다. 상대가 심심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참고 같이 놀아줬는데 정작 내가 심심할 때는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간다.

 

빈말이라도 미안하다고 하면 그나마 덜하다. 상대가 미안하다고 했다면 그것은 과거에 내가 그 사람을 돕거나 배려해서 같이 놀아 준 사실을 상대가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서 그렇다그런데 미안해 하지도 않았다면 그것은 내가 과거에 그 사람에게 쌓은 것을 그 사람이 무시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은행에 돈을 넣었는데 정작 그 은행에서는 적금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꼴이다. 그러니 배신감과 억울함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평소에 상대방에게 적립된 것을 지불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상대가 무시하는 과정이 상처가 된다. 처음부터 내가 적립한 것이 없었다면, 그러니까 내가 은행에 돈을 넣지 않았다면 은행에 갔을 때 돈이 없다고 해도 실망은 해도 상처를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넣어 뒀다고 믿으니 돈을 지불해주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억울하고 분하다. 이것이 바로 상처이다.

 

스스로 믿는 것처럼 정말로 순수한 의도로 잘해주고도 쌓았다는 생각이 없다면 지불해달라고 요구할 것도 없다. 그러니 실망은 해도 상처를 받을 일은 없다. 실망은 시간이 지나면 금세 사라지는 감정이지만 배신감과 억울함은 평생 가기도 하는, 아주 기분 나쁜 감정이다.

 

역설적으로 상처를 받는 것 자체가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란 명백한 증거가 된다. 정말로 오직 상대방만을 위해서 했다면 아무런 기대가 없고,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고, 실망이 없으니 억울함도 없고, 억울함이 없으니 분노가 생길 일도 없다.

 

그럼에도 언뜻 보기엔 더 재미난 곳을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친구와 같이 있어줬으니까, 밥을 샀으니까, 힘들 때 같이 있어줬으니까힘들지만 도와줬으니까 정말로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한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보상에 대한 기대치 수준만 차이가 날 뿐 결국 누구나 똑같이 보상을 바라고 있다. 유일한 차이점은 만족하는 보상의 수준과 내용이다.


사람에 따라서 100을 주고 200을 원하는 사람이 있고, 100을 주고 1만 원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도움을 받으면 돈으로 갚으려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비슷한 내용의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받고 끝내는 사람이 있다.

 

상대를 위한다는 것이 착각이라는 점이 이렇게나 명백하지만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자신이 타인에게 잘해주는 것은 순수한 것이고 거기에서 어떤 이득도 추구하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서 관계를 통해 어떤 구체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자기 자신은 어떤 종류의 이득도 배재한 채 오직 선한 목적으로 상대방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믿는다하지만 결국 나중에 보상을 받지 못하면 배신감을 느끼고 억울해 한다. 그런 감정들을 느끼는 상태를 '상처 입었다' 라고 하면서 자신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분리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진정한 상처의 본질이기에 이렇기에 앞에서 나온 상처에 관한 많은 조언들은 모두 사실상 헛소리가 되고 만다. 정말로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면 관계를 단절할 필요도,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위해서 살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아무리 남에게 도움이 되더라도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며 인정하면 된다.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있을 때 유일하게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동물들을 키우면서 상처를 받지 않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동물을 키우는 것이 내 감정을 위해서 키우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이 설령 유기된 동물에 대한 안쓰러움이라도 결국엔 내 감정이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 키우는 동물은 인간과 같은 보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대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키우는 동물에게 실망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상처를 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다르다. 사람은 보상을 할 수 있음을 알기에 더욱 더 잘해주고 또 그만큼의 기대를 한다. 그래놓고도 순수한 의도 상대에게 잘해줬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서 기대했던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억울해 한다. 그렇게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상처를 입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최초에 내가 남에게 하는 모든 행위가 내 감정을 위해서 하고 있음을, 내 행복을 위해서 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너는, 우리는 완벽하게 이기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다른 사람을 위한 이타적 목적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이기적 목적임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평생 믿어왔던내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 내 착각임을 인정을 해야 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악한 사람도 아니고 선한 사람도 아닌 그저 살고 싶은, 그래서 행복하고 싶은 사람이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해주고 그러다가도 상대가 작은 보상이라도 해오면 그것은 너무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상대도 역시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런 상대방의 행동이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하지만 거기에서 끝이다. 내가 남에게 잘해줄 때 남길 것이 없기에 남이 나에게 잘해줬어도 남길 것이 없다. 나는 나를 위해서 남에게 잘했고, 남도 그 자신을 위해서 나에게 잘한 것이다.

 

누군가 선물을 주면 그 순간 고맙게 받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으면 주면 끝이란 뜻이다

 

선물을 주고 나서 받을 기대를 하거나 선물을 받으면 어떻게든 갚을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할 수 있으면 하고 받을 만 하면 받으면 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최대한 기분 좋게 선물을 하는 것과 받은 다음 상대방을 최대한 기분 좋을 만큼 고마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또 선물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인간관계만큼 쉬운 것도 없다. 타인을 대할 때는 늘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처럼 대하면 된다. 내가 동물들을 키우는 것은 오직 내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개나 고양이가 키워주는 것에 대한 보답을 하지 않아도 별로 문제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대할 때 그 사람을 집에서 키우는 개처럼 대하면 된다. 기분 좋으면 먹을 것을 주고 간식도 사줄 수 있다. 그 순간 개는 당연히 좋아한다. 하지만 다른 누가 간식을 줘도 개는 좋아할 것이다. 먹을 것 앞에서 의리를 지키는 동물은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내가 오직 나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만 인정하면, 내가 스스로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인정하면, 내가 사실은 완벽히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만 인정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할 필요도, 이미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어놓고 또다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남의 평가에 덜 신경 쓰고 살 필요도 없다.

 

사실은 남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고, 남들 눈치를 보고, 가능하면 잘해주려고 하고,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고, 여유가 있으면 베풀고, 배려할 수 있으면 배려하고 사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런 행동들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단점인 보상에 대한 기대치가 깨지는 상처만 없다면 관계만큼 쉽게 행복한 것도 없으니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관계를 맺는 일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관계 그 자체보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잘 맞는 사람을 고르는 눈을 가지는 일이다.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대치만큼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거북이를 키우면서 개와 같은 충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뭔가를 받았 때 거기에 합당하게 여겨지는 보상은 각자마다 고유한 기준점이 있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마다 선호하는 관계 속 행복이 다르다. 그런데 보상의 기준점이 다르고 추구하는 행복, 그러니까 만족하는 대상이 다르다면 그 사람에게 하는 모든 노력이 거의 헛된 노력이 되고 만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책을 아무리 사다줘봐야 헛수고라는 뜻이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보상을 원하는 사람, 관계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신과 가장 비슷한 수준의 이득에 대한 계산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계산식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래도 크게 두 가지 항목으로 구성이 된다.

 

하나는 감정에 해당되는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에 해당되는 돈이다. 원래는 관계가 훨씬 중요했는데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돈의 역할이 커져서 이제는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관계와 돈을 적당히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그 비중이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고유한 계산식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돈에 극단적으로 쏠려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관계에 극단적으로 쏠려있다. 그리고 흔히 돈에 쏠려 있는 사람들은 악당, 이기적 존재 등으로 표현되고 반대로 관계에 극단적으로 쏠린 사람들은 인간적이고 이타적인 존재로 평가된다. 보통 사람들을 관계가 중심이지만 돈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크게 돈을 위해서 관계를 맺는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사람들로 구성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돈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 그러니까 돈을 버는 것보다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 주로 상처를 받는다. 특히 극단적으로 관계중심 형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다.

 

관계를 통해서 삶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다른 말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고, 가능하면 잘 해주려고 하고, 배려해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돈과 같은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끝없이 배신을 당하게 된다.

 

관계를 맺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행복이다. 그리고 돈은 당장 눈 앞의 행복이다. 결국 관계에서 생겨나는 상처는 장기적 관점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단기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는 배신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그 단기적 행복에는 단지 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재미와 즐거움과 같은 것들도 많다. 오히려 그런 경우가 훨씬 더 잦다.

 

그렇게 되면 돈만 추구한다고 하면서 비난할 수도 없다. 누구나 재미있고 즐겁기를 바라기에, 심지어 자신도 알기에 상대방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그때 '저 사람은 왜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상대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비난이 동시에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상처가 생겨나는 과정이다하지만 이때 원망보다 오히려 자괴감이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완전히 상대방을 비난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기에 더욱 더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나와 함께 있기를 바라기에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 더 잘 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결국 스스로만 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이 되고 만다.

 

누군가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냥 보내줘야 한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기에 잡으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이 그 사람에게 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갑이다. 이렇게 갑과 을의 관계가 되면 상처는 끝없이 생겨난다.

 

그러니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갑과 을의 관계가 안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계속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과 최대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된다. 그리고 찾아보면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세상엔 상처 입은 사람들 천지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 것일까?

 

이것도 결국 자기 욕심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남을 돕는 일을 해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고마워하는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이다또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가능하면 잘난 사람들을 좋아한다. 잘난 사람과 관계를 맺을수록 어떤 식으로든 유리하기에 그렇다. 잘생긴 남자나 예쁜 여자가 인기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심지어 동성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 , 이득도 되고 재미도 있는 기회가 많이 있을 수 있으니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당연히 바쁘다. 그래서 결국 의도치 않게 나를 배신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런 인기가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욕구로 인해서 독점을 하려고 한다. 남들보다 더 잘해서 많은 것을 적립해두려고 한다. 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리 원하지도 않는데 자꾸 넣으니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 사람도 누군가를 만난다면 즐겁고 행복해야 만나고 싶은데 자꾸 자신을 구속하려고 하니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결국 멀어진다. 넣으면 넣을수록 더 멀어진다.

 

관계에서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잘난 사람이 아닌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것도 아닌 그냥 친구를 고르는 것인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냥 그대로 살면 된다. 배신 당하고 억울해 하면서 상처 속에서 살면 된다. 그리고 나서 혼자 살기를 결심하면 된다. 그런데 정말로 행복하기는 힘들다.

 

지금 상태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면 가장 재미난 사람이 되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겁다면 당연히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서 지내야 한다. 괜히 잘나서 갑질할 수 있는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잘났는데 그 잘남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작은 희망은 있다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남으로 갑질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다. 만약 인간관계에서 가장 운이 좋다면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충분히 잘났음에도 불구하고 의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누군가 그런 의리를 보여주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자신이 갑질을 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상대가 자신에게 잘해주면 처음엔 고마워하다가 나중엔 당연히 여기고 오히려 더 바란다. 자신이 그렇게 당해놓고도 그 자신도 똑같은 짓을 한다.

 

제대로 된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고, 운 좋게 좋은 인연을 만나도 갑질하다가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늘 잘난 사람들에 대한 끌림으로 살아가는 동안은 상처로부터 단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상처는 언제나 상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입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고발을 하면 된다. 그것은 법적으로도 불법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엔 나 자신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상처를 입어도 그리 힘들지 않다.

 

상처에 관한 진짜 문제는 바로 자신에 대한 실망이다. 내가 을임을 아는 것, 내가 그리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내가 가장 친하다고 여긴 친구가 내가 아닌 다른 친구를 더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우선 순위에 들지 못함을 아는 것이 상처가 된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알아야 한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경우라도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관계는 끊어 버리면 된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와 계산식이 잘 안 맞는 사람이다. 그러기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상처를 입을 일이 없다.

상처는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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