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존재의 근원, 두려움

아이루다 2019. 12. 4. 08:10

 

 

인간을 어떤 존재로 정의하는 말들은 꽤나 많다.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호모' 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것들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구체적인 특징도 꽤나 많은 편이다. 이족 보행을 하고 도구를 이용하고 음식을 익혀 먹고, 놀이를 즐기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본질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그리고 인간은 두려움의 존재이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두려움은 생명체의 고유한 특징이니까 말이다.

 

인간은 두려움으로 시작해서 두려움으로 끝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평소엔 두려움이 우리들 자신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느껴진다. 마치 결코 일어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죽음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단지 내가 아닐 뿐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진실이듯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그저 잠시 잊혀져 있을 뿐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존재이기에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 그냥 노력하는 수준이 아니다. 정말로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 그 노력이 어느 수준이냐 하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매일 매 순간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 삶은 오직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이뤄진다.

 

책을 읽는 것도, 노래를 하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데이트를 하는 것도, TV를 보는 것도, 남을 돕는 것도, 살인을 하는 것, 미술 작품을 그리는 것, 높은 산에 오르는 것도 모두 다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줄이는 일이다. 단지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을 줄이는 일이 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에는 전혀 그렇지 않거나 심지어는 두려움을 더욱 크게 만드는 일이 될 수는 있다.

 

모두가 두려움을 줄이려고 노력은 하지만 무엇을 해야 두려움이 줄어드는지 여부는 서로 각자 다르다.

 

누군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크기가 늘고 있는 상태를 '불행' 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누군가 가진 두려움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실 행복 때문에 두려움이 많은 오해를 받게 된다.

 

우리의 무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 도구를 이용해서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바로 채찍과 당근이다.

 

당장 두려움이 눈 앞에 생겨나면 즉시 채찍을 꺼내 든다. 스트레스를 받게해서 그 순간 만큼은 그것을 해결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하도록 강요한다. 암에 걸리면 아무리 먹고 싶었던 햄버거도, 아무리 가고 싶었던 유럽 여행도 다 소용이 없어진다. 오직 암을 치료하는 일만이 최우선이 된다.

 

물론 암 치료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오히려 더 즐겁게 햄버거를 먹거나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두려움은 늘 해결될 필요는 없다. 그저 포기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말이다.

 

당근은 눈 앞의 두려움을 해결한 후 주는 선물이다. 그것은 두려움을 줄였음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며 그때 느끼는 기분들을 총합해서 행복이라고 부른다열심히 일을 하고 난 후 퇴근 길, 힘들지만 깨끗이 청소한 집안, 몇 시간 동안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음식을 맛나게 먹는 아이들을 보는 마음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채찍과 당근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해결해야 할 스트레스와 해결된 것에 대한 보상은 우리 인간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자극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 둘을 통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눈 앞의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라는 스트레스를 받은 후 열심히 노력을 해서 해결하고 나면 기분 좋은 감정들, 즉 뿌듯하고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함에 따라서 우리가 눈 앞의 두려움을 느낄 일이 많이 줄었다당장 내일 밥을 굶을 사람도, 감기 같은 병에 죽는 사람도, 집이 없어서 얼어 죽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는 두려움은 주로 미래로 인해서 생겨난다그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불안과 걱정이다. 사람들은 다들 나중에 먹고 살기 힘들까 봐, 아플까 봐,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까 봐, 사고를 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를 해두면 해둘수록 큰 보상이 주어진다. 이런 식으로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삶은 당장 현실적인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미래에 닥칠 두려움을 미리 해결해 두는 과정으로 변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제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 때 사실 두려움을 줄이고자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때마다 주어지는 보상, 그러니까 '행복하려고' 살고 있다고 믿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삶은 두려움을 줄이는 것이 아닌 행복 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표현들은 정확히 동일한 의미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삶은 더 이상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그러다 보니 이제는 행복하지 못하면 삶을 살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인류가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 살아온 시기를 벗어난 것이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적으로는 몇 백 년, 우리나라의 경우엔 겨우 몇 십 년 전 이야기이다. 불과 한 두 세대 전에 전란이 끝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끼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엔 행복이란 단어조차 그리 회자되지도 않았고 오직 당장 눈 앞의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태어나서 1년을 채우면 돌잔치를 했고, 60년을 살면 환갑잔치를 했다. 다른 것 하나도 없이 오직 생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런 잔치를 열어줬던 것이다. 그리고 과거엔 집안에 손님이 오면 밥을 퍼줄 때 밥공기를 훌쩍 넘어서 쌓아주는, 일명 고봉밥을 주는 것이 예의였다. 먹을 것이 귀한 시기였기에 밥을 많이 주는 것이 상대에 대해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하지만 몇 십 년 만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질 않는다. 다들 행복하려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 고봉밥을 주면 다들 부담스러워 한다. 먹을 것이 풍족해진 사회에서는 맛난 것을 양이 아닌 질로 대접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가 당연히 좋은 것이 아닐까? 똑같은 의미라면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보다 행복하려고 살아간다고 하는 편이 더 듣기 좋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분명히 더 듣기에 좋다. 그렇게 되면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생겨난다.

 

만약 삶을 두려움을 해결하거나 줄이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면 두려움을 줄이기 위한 모든 행위와 그 결과는 매우 단순한 형태로 흘러가게 된다그것을 위한 어떤 권리나 그 결과에 따른 성과도 생겨나질 않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암에 걸렸을 때 암에서 낫는 것은 결코 권리가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정말로 이뤄지길 바라는 소원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암을 극복하는 것을 당연히 주어진 권리로 인식될 수는 없다. 또한 운 좋게 암에서 나았다고 해도 매우 감사할 일이지 자신의 성과로 그것을 자랑할 수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삶을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 되게 되면 행복하지 않은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먹었다면, 즉 배가 너무 고플 때라면 무엇을 먹든 배만 채우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음을 감사할 수도 있고 어떤 가치도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하려고 먹었다면 반드시 맛난 것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먹은 것이 맛나지 못하게 되면 화가 난다. 맛난 것을 먹을 권리를 침해 당한 것이다. 또한 맛난 것을 먹을 때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맛난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가치가 생겨난 것이다결국 배가 너무 고파서 먹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불만과 가치가 생겨나게 된다.

 

삶을 채찍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을 때리지만 않아도 감사한 일이 된다. 하지만 삶을 당근의 입장에서 보면 기대했던 당근이 주어지지 않으면 매우 불만족스럽다만약 어느 날 우연히 채찍과 당근 모두 주어지지 않았을 때가 되면 채찍 부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행복이 되지만 당근 부재의 관점에서 보면 불행이 되고 만다.

 

물론 요즘 시대에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은 없다. 다들 맛난 것을 먹고 산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잊지 않고 두려움 때문에, 즉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먹고 있다는 결코 숨겨지지 않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채찍을 받지 않는 행복을 경험하면서도 당근을 먹는 행복까지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다. 맛난 것을 먹는 행복을 넘어서 맛난 것을 먹는 행운을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일이 되니까 말이다.

 

사실 삶이 두려움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려고 사는 것으로 정의가 되면 될수록 우리가 잃는 것은 감사함이며, 얻는 것은 당연함이다. 그리고 그 누구나 당연함이 늘고 감사함의 대상이 줄면 줄수록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당연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운 나쁘게 가지지 못했을 때 불행해지고 만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감사해하면서 받을 수 있다면 운 나쁘게 가지지 못할 때도 불행해지지는 않는다.

 

더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가치화 시킨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밥을 먹을 때는 생각도 나지 않던 사진이 행복하려고 맛난 것을 먹을 때는 생각이 난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이것은 요즘 누구나 하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사실은 결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자신을 정의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이런 식으로 남들 앞에서 자신을 정의했다면 이후로 나는 지속적으로 그 정도의 행복은 유지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만다

 

한번 비싼 차를 사면 그 후로 새로 차를 살 때는 무조건 그 차보다 더 비싼 차를 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서 '쟤 요즘 경제적으로 문제 있나 봐' 라고 한다. 집을 좁은 평수에서 넓은 평수로 옮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반대로 줄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이사간 넓은 집을 주변 아는 사람들 다 초대를 해서 자랑을 해놨다면 그 집은 나 자신과 동일한 존재가 되고, 결국 나중에 넓은 집에서 좁은 집으로 가는 일은 불편함을 넘어서 내 자신이 그만큼 쪼그라드는 일이 되고 만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를 홍보하는 일이 가진 의미는 그 후로 그 행복 정도는 내가 반드시 누려야 하는 당연한 행복이라는 것을 정의해두는 꼴이다.

 

이런 식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 이것은 불행으로 가는 특급열차가 될 가능성이 높다.

 

행복은 행운을 연속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좋은 감정들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데 행운이 일정 수준으로 반복해서 생겨나면 자신도 모르게 '나는 행운의 존재'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행운을 가져올 수 있었던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자신처럼 노력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게으름과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혀를 차게 된다. 물론 겉으로는 안 한다.

 

자신의 행복을 가치화 시켜서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타인과 나의 수준을 분리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이 가치화 될 때 생겨나는 최악의 결론이다. 이것은 또한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도 된다그리고 이런 식으로 일단 행복이 가치화 되기 시작하면 이제 행복을 얻는 과정은 단순히 전개되지가 않는다.

 

결국엔 고난이도의 어려움과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조차 마다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난이도가 어렵고 위험할수록 그것을 해냈을 때의 가치가 급상승한다. 가장 흔한 예가 바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일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른 후 정상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크게 인쇄해 두로 집안에 걸어 둔 채 자신이 이뤄낸 행복의 성과를 평생 동안 기념하기도 한다. 어느 한 순간에 느낀 행복을 평생 기념하는 일, 그럴 듯 하긴 하지만 사실 참 초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자신의 두려움을 얼마나 줄였는지를 기념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두려움이 없었다면 느끼지도 못할 자랑스러움이다. 인간이 두려움의 존재이기에 난이도가 높아지고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로봇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금방이라도 타버릴 듯한 용암의 언저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로봇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기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

 

사람은 두려움을 너무도 싫어해서 어느 수준으로 임계지점을 넘어서면 그 두려움 때문에 생존 그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바로 자살이 그렇다. 사실 자살만큼 아이러니한 것이 있을까?

 

살고 싶어서,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생겨난 두려움이 결국 죽음을 불러왔으니까 말이다. 자살은 인간이 두려움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반대로 두려움이 완벽히 사라진 상태도 존재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그 단계에 오를 수 있는데, 하나는 약물을 이용하는 법이다. 마약과 같은 화학약품으로 신경을 조작하는 법이다. 또 하나는 오랜 수련을 거쳐서 명상과 같은 방법으로 그 단계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둘은 과정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수준에 다다른다. 바로 그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 단계에 들어서는 것을 불교에서는 '환희', '극락'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사람은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이 정도 수준의 행복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저 인생의 몇 번 그보다 약간 부족한 행복을 아주 잠시 맛볼 뿐이다.

 

처음 사귄 이성과의 첫 데이트, 정말로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에 합격하거나 회사에 취직을 했을 때, 올림픽과 같은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첫 아이를 얻었을 때, 어려운 자격증 시험에 합격 했을 때 등이 바로 그런 순간들이다.

 

하지만 이 조차도 누구나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이 그 정도 수준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우연이기 하지만 또 다른 경우가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을 때 느끼는 강렬한 행복이다. 추락 위기의 비행기에서 살아남았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그 순간에는 평소엔 너무도 당연했던 살아있는 것도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한 사람을 영구히 변화시키기도 한다.

 

삶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감사할 수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감사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매일 먹는 식사도,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눈 앞에 펼쳐진 멋진 풍광도, 맑은 하늘도, 떠가는 구름도, 예쁘게 지저귀는 새도, 붉게 떠오르는 해도, 타는 듯 붉어진 노을도 모두 다 감사할 것들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을 바라고 행복을 얻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너무 그것에 빠져서 이제는 자신이 두려움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행복만을 추구한다고 믿고 살게 되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이상한 변형이 생겨나 버렸다. 그것이 바로 감사한 것들이 줄고 당연한 것들이 늘어난 것이며, 행복해지는 것이 생존 활동이 아닌 자신의 존재가 우월하다는 증명을 하는 수단이 된 것이며, 삶에 있어서 채찍은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를 너무도 싫어하게 된 것이며, 주어진 행복이라는 보상을 당연한 권리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두려움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행복하지 못할 것 같으면 너무 두렵고 자신의 삶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행복한 삶의 반대가 되고 말았다. 감사함이 늘어야 행복하고, 가치가 없어져야 행복하고, 채찍의 존재를 인정해야 행복하고, 권리가 사라져야 행복하고, 두려움을 당연히 존재하는 삶의 조건임을 받아들여야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행복하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행복하고 싶은가? 단 하나의 사실만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채찍을 덜 맞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나는 당근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다. 당근은 채찍을 덜 맞게 되었을 때 운 좋게 보너스로 얻는 것이다. 보너스를 안 준다고 월급도 거부하는 것은 바보 짓이다. 삶에서 당근이 목적이 되는 순간 채찍은 끔찍한 어떤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그나마 당근을 바라면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인간 문명이 발달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거에 비해서 많이 안전해진 덕분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홀로 떨어지게 되면 그 순간부터 매 순간 채찍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작은 먹거리라도 구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때가 되면 잘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사실 과거에 비해서 단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변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문제이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는 일보다 더 중요해진 것이 생겨났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작동오류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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