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자존감의 단계

아이루다 2019. 8. 1. 08:15

 

흔히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 이것을 자존감이라고 한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거나 사랑하는 마음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자존감에는 사실 단계가 있다.

 

방금 설명한 자존감이 가장 낮은 수준인 1단계 자존감이다또한 1단계 자존감은 자존감 보다는 자기애라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린다. 그러다 보니 이 수준의 자존감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면 진짜로 자존감이 낮아서 고생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자기 모멸감에 가득 찬 사람도, 늘 자기 비하를 하는 사람도, 뭐든 자기 탓이라고 하는 자기 확신이 부족한 사람도 그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으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단지 그런 마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꺼내 놓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자신감 부재이다.

 

이런 사람들은 말로는 자기 비하를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은 스스로를 빨간 머리라고 자학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빨간 머리라고 놀리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나중에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길버트가 그것을 잘못 말했다가 그 후로 앤으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미움을 받는다.

 

결국 입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더라도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고 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으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미리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맞을 것 같으니 미리 스스로를 때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을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사람은 없다. 다들 남들에게 맞는 것이 너무 아프니까 조금이라도 덜 아프려고 먼저 때리는 것뿐이다.

 

누군가 자신을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로 느끼는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당신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 당신의 신장이라도 내놓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된다. 그때 정말로 신장을 내놓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자신을 하찮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그 누구도 자신이 가진 소중한 권리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훨씬 더 강하게 반발을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그런 소리를 들으면 그냥 미친 소리라고 넘기면 될 일을 그것이 자신을 심하게 무시해서 하는 소리로 알아듣고 참지 못해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오히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신장을 내어 줄지도 모른다. 자신이 신장을 기여함으로써 누군가 생명을 건질 수 있다면, 그것에 가치를 느끼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존감이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자존감이다.

 

가장 낮은 수준의 1단계의 자존감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존감이다. 이것은 자신을 어떤 수준 이상으로 올려놓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한다그런데 그것보다 한 단계 더 위에 위치한 2단계의 자존감은 자신을 어떤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1단계의 자존감이 위에 있으려고 하는 노력이라면, 2단계의 자존감은 어디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자존감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을 한다. 소중한 자신의 신장이라고 해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릴 수 있는인류애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1단계의 자존감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할 수 없다. 나만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2단계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남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 중에서는 당연히 2단계 자존감이 더욱 더 단단할 수 밖에 없다.

 

1단계의 자존감인 나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마음은 언제든 깨질 수 밖에 없다. 살다가 보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험을 하기에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어느 순간엔 상처를 받게 된다. 어쩌다가 일이 잘 풀리고 다룬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들으면 자존감이 높아질 수도 있지만운이 나빠서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이라도 받게 되면 금세 추락하는 자존감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쉽게 올릴 수 있는 자존감이기에 흔히 자존감을 올려야 한다고 말하는 많은 책 등에서 주로 소개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또 다시 제자리로 오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2단게에 올라서야 한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남을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특히 2단계의 자존감은 위기 상황에서 빛이 난다. 자신을 어떤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는 의지이기에, 어떤 위기 상황에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심지어 누군가 머리에 총을 겨눠도 동료를 배신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그런 위기를 겪으면 겪을수록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더 자존감이 높아지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단단해진 자존감은 내면에서 아주 강한 힘이 되어서 삶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줄여준다. 그래서 매우 안정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너그러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2단계 자존감도 단점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삶을 안정적으로 살 수는 있지만 행복하기 살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삶이 늘 위기를 극복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행복하게 누리면서 살기가 쉽지 않다. 원래 사람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 해야 한다. 놀이공원에 놀러 가서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면 어떻게 그것을 즐기겠는가?

 

놀 때는 아이처럼 놀아야 한다. 하지만 2단계 자존감에 다다른 사람들은 너무 진지하다. 그래서 즐기기가 힘들다. 위기 상황엔 아주 좋은 능력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너무 무겁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별로 안 좋아할 경우도 생긴다. 사람은 참 좋지만 너무 진지해서 평소에 그리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해서 그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적 오만함도 문제이다. 사실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그냥 연민을 느낄 수는 없다. 그 상대를 자신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존재라고 인식할 때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2단계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타인에 대한 소중함은 사실 다른 사람들을 밑으로 깔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진 오만함의 근원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동안 역경을 넘어선 것에 대한 자신감도 아주 충만하다.

 

비록 인격적으로 많이 완성이 되었기에 그런 마음들이 밖으로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 그 내면에 존재하는 깊은 어둠이 있는 것이다자신에 대한 거의 무한대의 자신감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한 오만함이 바로 그 어둠의 정체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특징과 이 어둠이 합쳐지게 되면 불행한 삶은 아니지만 행복하기 힘든 삶을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무조건 1단계 자존감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물론 선택을 해야 한다면 2단계의 자존감이 훨씬 더 낫긴 하다. 그리고 사실 자존감이란 단어의 진짜 의미는 2단계가 맞다.

 

그렇다면 아무런 단점이 없는 자존감은 없는 것일까? 뭔가 제대로 된 자존감을 갖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도 3단계 자존감이 있다문제는 이 자존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념 그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3단계의 자존감은 나 자신을 완벽히 낮추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니까 1단계의 자존감이 나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면, 2단계를 나를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버티는 것이고, 3단계의 자존감은 나를 가장 낮은 위치로 낮추는 것이다. 그래서 2단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1단계의 자존감은 머리에 총을 겨누는 순간 터뜨리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게 된다. 2단계의 자존감은 두렵지만 버틴다. 3단계의 자존감은 상대가 총을 쏘든 쏘지 않든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거의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쏘지 않으면 좋겠지만, 쏘겠다고 해서 두려운 것도 아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 죽음도 별 것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해봐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 3단계의 자존감을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자존감인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가장 먼저 '인간 우월감' 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지구 생태계의 정점에 있다. 이 말은 우리는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에 생사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이 강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수 많은 생명체를 죽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은 생태계의 근본 원리인 강자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문제는 강한 것을 잘난 것으로 믿는 마음이다. 강한 것을 선택 받은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강해서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랑이가 사슴보다 잘난 것인가? 이렇게 강한 것이 잘난 것은 아닌데 인간 사회에서는 강한 것을 잘난 것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강한 주먹이 가졌다고 해서 잘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강한 주먹이 잘난 것의 증거였던 시절은 분명히 있었다. 과거 몇 천년 동안 인류는 그렇게 여겨왔다. 단지 시대가 바뀌면서 머리가 좋은 것이 강한 주먹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머리를 가진 것이 잘난 것일까? 사실 그 어떤 것도 잘난 것은 없다. 그저 좀 더 환경에 적응하기가 편한 것이다. 과거엔 강한 주먹이, 현대는 좋은 머리가 그 역할을 한다. 미래에 온난화가 심해져서 지구 전체가 바다로 변하면 돌연변이 능력으로 갖게 된 아가미 호흡 능력이 잘난 것의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원숭이가 나무를 잘 타는 것, 코끼리가 코로 먹는 것, 기린이 높은 곳의 풀을 뜯는 것, 인간이 머리가 똑똑한 것은 삶을 더 잘 살 수 있는 장점일 뿐 잘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의 머리가 좋은 것을 통해서 최상위의 포식자가 되었기에 그것을 인류 전체가 잘난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이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았고, 인간은 별도로 창조된 존재라고 믿었다. 그리고 더해서 인간 자체가 신으로부터 선택된 존재라고 믿고 싶어했다. 지금도 자신의 민족만이 유일하게 신으로부터 선택되었다고 믿고 있는 민족이 존재한다.




 

이런 믿음들이 바로 인간 우월감의 원재료가 된다. 이 세상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이다. 하지만 결국 완벽한 착각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때 3단계의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간다. 인간 우월감을 벗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또 다른 우월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우월감이다.

 

인간 우월감이 인간 전체가 가진 공통된 것이라면 개인 우월감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개인별로 가질 수 있다. 다 같은 인간이지만 내가 그 중에서 가장 잘났다고 믿고 싶어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그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점점 더 위로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우월감에 기반한 자존감은 잘해야 1단계 자존감에서 머무른다. 물론 그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그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답은 하나뿐이다. 바로 살고 싶어서 그렇다. 모든 인간들이 잘나고 싶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잘날수록 오래 산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실이다. 그래서 다들 잘 나려고 그리 노력한다. 오직 오래 살고 싶어서 그렇다.

 

죽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잘나고 싶다는 욕구를 만들어 내고, 잘남이 증명될 때마다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잘남의 행복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이다. 하지만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안엔 그저 죽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만 존재할 뿐이다.

 

많은 종교가 사후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죽음을 통한 존재의 소멸이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으면 모든 종교가 사후세계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만들어 놓았다. 만약 사후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죽음이 조금이라도 덜 두려울 수 있으니까 그렇다. 그것이 진짜로 존재하냐 여부에 상관없이 사후세계에 대한 그렇게나 다양한 이론들은 오히려 인간들이 자신의 소멸을 얼마나 끔찍이 두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인간 우월감과 개인 우월감이 가진 진실, 그러니까 결국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는 그 진실에서 조금만 벗어날 수 있다면 3단계 자존감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다. 설령 죽음 그 자체는 두려울지라도 자신의 삶이 언제 어느 순간에 끝이 나더라도 그리 억울한 마음 없이 받아들일 수는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되면 도대체 왜 살아야 하나요? 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꽤나 타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된다. 불행한 것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행복하면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매일 행복하게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단지 그 행복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행복이 아닌, 행복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면 된다.

 

운이 나쁘게 행복하지 못하거나 불행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또 다시 행복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매일 행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상관없이 사는 삶이다.

 

행복한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할 필요도 없고, 불행한 자신에 대한 비관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매일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만 할 뿐, 거기엔 어떤 가치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3단계 자존감의 현상이다.

 

물론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젊은 시절엔 1단계 자존감을 갖는 것도 쉽지 않아서 그것을 가지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나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좀 더 쉬워진다. 삶에 있어서 많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포기할 수 있어서 그렇다. 그 포기 과정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면에 존재했던 불필요한 우월감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

 

내가 먹는 오늘 한끼에 대한 감사함이 생겨나고, 남보다 나은 나를 통한 행복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아주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매일 감사할 것들이 넘쳐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기분이 좋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된다.

 

자존감이란 단어가 사람마다 각자 다르게 해석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나를 사랑하는 1단계, 나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하는 2단계, 모두 존재를 사랑하는 3단계를 각자 자존감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리고 아예 진입도 하지 못한 0단계도 있다. 1단계가 되기도 전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0단계에 있는 분들은 대부분 1단계의 자존감을 바란다. 하지만 사실 2단계로 바로 가는 것이 더 낫다. 일단 1단계는 대부분 타고나는 것이라서 그것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니까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1단계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나를 사랑해도 될 만큼 충분히 잘나게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러니 잘나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잘나질 수 없기에 1단계 자존감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외모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 받다가 성형수술이 아주 잘되어서 되는 경우는 있다. 오랫동안 준비한 중요한 시험에 합격하는 경우도 있다. 운 좋게 큰 돈을 버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은 얻기가 쉽지 않다. 또한 역설적으로 쉽지가 않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통해 갑자기 1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0단계에서 1단계를 거치지 않고 2단계로 바로 올라갈 때는 딱히 자신이 잘날 필요가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만 가지면 된다. 물론 아주 어려운 일이다. 0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마음 속에서 억울한 것들이 너무 많고 피해의식도 잔뜩 가지고 있어서 더욱 더 힘들다. 그 고통스러운 과거를 어떻게 쉽게 잊겠는가?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창살이다. 언뜻 보기엔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발적으로 감옥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부수고 나올 수 있다. 타인과 나를 분리시켜 놓은 그 창살을 부수고 나올 때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내면에 존재하는 수 많은 억울함의 기억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남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3단계로 올라서는 유일한 계단이다.

 

2단계에 올라선 후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뿌리깊은 오만함만 볼 수 있다면 그때 3단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끝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진다. 결국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비록 제대로 도착하지는 못하겠지만, 그것 만으로도 삶은 얼마든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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