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논리적인 생각 - 3

아이루다 2018. 7. 18. 08:07

 

지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사람들이 논리를 오용하는 문제와 논리 자체가 가진 한계점으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논리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누군가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하려는 것이다. ,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 등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혹은 어떤 상황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는 의도라는 뜻이다.

 

이 중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쓰이는 논리는 그나마 논리적이다. 당연하다. 설득을 하는데 논리적이지 못하면 어떻게 설득이 되겠는가? 그래서 설득에서 쓰이는 논리는 화자에 따라서 차이가 날 뿐, 근본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 만약 설득하는 사람이 비논리적이라면 설득되지 않고 끝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감정의 정당성을 위해서 이용되는 논리는 다르다. 처음부터 감정이라는 비논리적 상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이다.

 

어떤 회사의 직원이 직장 상사가 시킨 일을 했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오지 못했다는 강한 질책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이 직원은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녁에 친구를 만나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자신의 기분을 풀려고 할 것이다. 이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의 직장 상사를 씹는 일이다

 

그래서 업무 지시를 할 때 설명을 해주지 않은 것일이 다 된 다음에야 그것을 말한 것자신을 질책할 때의 태도, 표정 더해서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 과거에 그 사람이 저질렀던 실수들, 별로 좋지 않은 버릇들까지도 다 동원하여서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들 것이다.

 

그런 얘기까지 듣게 되면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그 직장 상사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더라도 같이 흥분해서 욕을 할 것이다. 뭐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이 있냐고 할 것이다나중엔 회사 옮겨야 할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말을 꺼낸 직원은 직장을 옮길 마음은 전혀 없다. 그 사람은 그저 오늘 자신이 깨져서 얻은 상처를 공감 받고 치료하고 싶었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내일 회사에 가면 다시 열심히 자료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질책을 받은 직원이 자신의 친구에게 한 말들은 논리적으로 나름 타당하다. 업무 지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는 점, 개인적으로 싫은 이유들 등등, 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보인다. 그것은 바로 정말로 자신이 논리적으로 옳다면 그것을 혼자 생각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확실하게 옳다면 그것을 친구를 만나서 설명하면서 동의를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결국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본인도 자신의 논리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를 받은 감정을 처리할 목적으로 논리를 이용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겨난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두려움을 느낄 때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해봐야 별 다른 소용이 없다.

 

자신이 일을 제대로 못한 것과 직장 상사도 그런 실수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이 일을 못하는 것과 직장 상사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직장 상사의 외모, 버릇 등등 모든 것이 자신이 한 실수와 연관이 없다. 설령 업무 지시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점은 자신의 실수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두려우니 자신이 한 실수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들을 끌어다가 자신이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한 이유로 삼은 것이다.

 

이런 일은 매일 흔하게 일어난다. 상처를 받을 때마다, 기분이 나쁠 때마다, 뭔가 본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마다 일어난다. 논리적인 핑계가 생겨나고, 논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그리고 각자마다의 상황논리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런 심리에 언제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함을 줄이고 싶다는 욕구만이 가득하다.

 

여기에 잘못된 논리의 사용과 논리 그 자체가 가진 문제, 즉 정보 부족이 겹쳐지게 되면 폭발적 효과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특징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머리가 똑똑한 사람일수록 머리 속에 담아 둔 정보의 양이 많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보이고, 반대로 그렇지 못할수록 비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머리의 똑똑함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남녀간의 차이로 인해서 생겨나는 경우이다.

 

흔히 남자는 이성적 존재, 여자는 감정적 존재라는 표현을 한다. 물론 이 말은 기본적으로는 틀렸다. 남녀 상관없이 인간은 무조건 감정적이다. 단지 남자는 감정을 억눌러서 둔하게 만들었고 여자는 그렇지 않아서 남자에 비해서 예민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 남자가 좀 더 논리적으로 보이게 된다. 이성적이니 당연히 더 논리적인 것은 맞다.

 

그런데 왜 남녀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남자들은 왜 여자들에 비해서 좀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을까?

 

남녀간의 이런 차이엔 생각보다 아주 깊고 오래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만이 유일하게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점과 같이 살아갈 때 각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느냐에 따라서 아주 오랫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온 결과이다.

 

남자는 임신을 할 수 없다오직 여자만이 임신이 가능하다. 그리고 남자는 동시에 여러 아이를 임신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여자는 한번에 오직 한 명이 아이만을 임신할 수 있다. 이 차이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여러 여자를 동시에 임신시킬 수 있는 남자는 기본적으로 승자독식이 가능한 경쟁구도이다. ,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황이라면 잘난 남자 하나가 수 많은 여성을 임신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 문명화 되면서 그런 일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사실 조선시대만 해도 잘난 남자들, 즉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본처 이외에 첩을 두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현대에 들어서 일부일처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음으로써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경우는 많이 줄었지만, 냉정히 말하면 이것은 제도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한 것이지 사람 자체가 변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 남자들은 문제만 없다면 언제든 더 많은 여자들을 임신시키려고 할 것이고, 여자들은 가능하면 잘난 남자를 통해서 임신을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본능적 욕구에 비해서 가정과 육아가 가진 가치와 영향력이 훨씬 더 강하기에 이제는 누구나 한 명의 짝과 살아가는 것을 선호한다. 남자는 확실한 자신의 아이와 안정적인 가정을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여자는 충성스러운 남자의 도움을 통해서 육아와 삶의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성적 역할의 차이점으로 인해서 남자와 여자의 경쟁 구조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남자는 기다리다가는 후손을 남길 기회조차 얻지 못하기에 언제나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 형편이고, 여자는 임신한 여자들은 알아서 경쟁자 무리에서 빠지기 때문에 남자들에 비해서는 훨씬 덜 경쟁적이다.

 

그래서 결국 남자들의 경쟁은 매우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것에 반해서 여자들의 경쟁은 은밀하고 간접적으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 전략이 차이가 더해진다. 그것은 바로 남자들은 주로 밖에서 사냥과 같은 협업의 형태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해왔다면 여자들은 육아를 전담하거나 만약 생계를 위해서 뭔가를 하더라도 근처에서 개별적으로 채취를 하는 형태로 이뤄져 왔다.

 

,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서 기본적으로 협동이 필요했다. 힘 쓰는 역할을 담당했던 남자들은 외부 적으로부터 마을을 감시하거나, 전쟁이 나면 같이 싸우거나, 새로운 땅을 탐험하거나 할 때 모두 동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있어서 협업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결국 경쟁의 치열함, 생존 활동에 있어서의 협업, 사실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인데 남자들의 세계엔 이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 남자들에게 있어서 다른 남자의 존재는 경쟁자이면서 동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입장은 다르다. 여자들과 다른 여자의 존재는 잠재적 경쟁자이긴 하지만 일단은 잘 지내는 것이 더 유리하다. 또한 동료라고 부를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기 보다는 그냥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맺고 그렇지 못하면 끊는, 그런 적당한 거리가 있는 관계 수준으로 유지가 된다. , 덜 경쟁적이며 적당히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경쟁구도이기에 어떤 주장에 있어서 허점이 존재하면 그것이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상대방을 공격해야 자신이 더 잘난 사람이 되기에 어떤 사람의 주장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 그 점을 공격한다. 더해서 협업을 해야 하기에 이런 논리적 충돌은 정말로 필요하다.

 

경쟁적 목적을 숨긴 채 협업에 따른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치열한 논리적 토론이 이뤄진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남자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냉정히 토론에 임해야 함을 스스로 깨닫는다. 그리고 최대한 많이 아는 것이 결국 토론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된다.

 

결국 어떤 논리를 펴는 사람이 토론에서 이기게 될까? 그것은 바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최대한 전체가 두루두루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논리를 펴는 사람이다. 당연하다. 각자 이득이 최대한 많아질 수 있다고 해야 전체가 설득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있어서 공공적 이득 추구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된다. 설령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더라도 그것을 공공적으로 이득이 있다고 꾸며야 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잘 지내는 것이 목적이니 상대방 말에 논리적 문제가 있어도 딱히 그것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해봐야 상대방 감정만 건들고 미움을 받게 되니까 말이다. 적이 많아지면 뒷담화의 대상이 되고, 따돌림만 당할 뿐이다. 그러니 일단 상대방 편을 들어주는 것이 몸에 배여 있다.

 

또한 남자와 달리 협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일단 자신의 이득을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자식 입으로 들어가는 먹을 것이 중요하지 남의 자식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남자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체계경쟁적이고 수직적인 관계, 우리를 기반으로 한 관계, 공공의 이득에 대한 관심이라는 특징을 갖게 되고,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공감이 우선시 되는 사고 체계친화적이고 수평적 관계, 나를 기반으로 한 관계, 전체보다는 개인적 이득을 우선시 하는 특징을 갖게 된다.

 

물론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부부의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남자들은 그 일을 객관적으로 보고 잘잘못을 따지려고 하는 반면, 여자들은 일단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감정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일단 자신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편 입장은 곤란하다. 이미 의식의 흐름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흐르는 것이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최초에 여자나 남자나 모두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남녀는 성적 역할의 차이와 생존 전략에 따라서 서로 다른 형태로 분리가 되었다.

 

남자는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진행되었고, 여자는 감정을 그냥 그대로 둔 채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해 받는 관계중심 형 삶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 동안 남자들이 우세했다. 당연하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끝없이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였으니 더 우월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애 뒤치다꺼리 할 때 남자들은 사회에 진출해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의 능력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현대 문명에 이르러서 이 구조는 극적으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과거엔 장점으로 작용했던 남자들의 특징은 오히려 문제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해서 여자들의 관계 맺기 능력은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서 더 많이 늘어난 여유 시간을 어떻게 행복하게 잘 보낼 수 방법에 있어서 아주 극적으로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

 

, 생존이 아닌 행복이 목적이 된 시대에 남자의 과도한 경쟁 의식과 상황을 가리지 않는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태도는 관계를 맺는 것에 매우 큰 단점이 되었고, 비록 비논리적이긴 하지만 여자들이 가진 공감능력은 관계를 맺고 행복하게 사는 일에서 아주 큰 장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 여자들이 가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직장은 기본적으로 협동을 해야 하는데, 여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판단 순위가 되기에 결국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할 때 문제를 일으키고 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모습을 보인다. 더해서 여자 고유의 특징인 여유로움과 이해심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숫자는 별로 많지 않은 점이 문제이다.

 

지금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행복은 감정이다. 그런데 감정은 논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맛난 것을 먹을 때 행복해지는 것이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부터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과도한 경쟁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하고,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에 놓였더라도 그 자체가 큰 문제가 아니라면 그냥 넘어가주는 여유로움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삶은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지 논리적 이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자들 역시도 자신이 비논리성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감정이 옳을 수는 없다. 감정은 그저 감정일 뿐인데 왜 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려고 하는가? 정말로 주장을 하고 싶다면 적어도 남자들처럼 객관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남자들은 여자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자신이 가진 한계를 벗어날 수 있고, 여자들은 남자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자신이 가진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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