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원망, 분노의 확장

아이루다 2018. 1. 15. 07:22

 

우주 여행을 떠나 오랜 시간을 수면 상태에서 보내던 한 남자가 기계 고장으로 인해서 깨어난다. 영문도 모른 채 깨어난 남자는 자신이 늙어 죽을 때까지 목적지조차 도달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 , 그는 우주선에 탄 유일한 이유, 목적지인 새로운 터전에 도착하려면 90년이 남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절망한다. 특히나 대화 상대라고는 유일하게 바에서 일하고 이는 인공지능 로봇밖에 없던 상황에서 남자는 절대적 외로움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남자는 한 여자를 깨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녀의 수면 장치를 고장을 낸다. 역시나 똑같이 영문을 모른 채 깨어난 여자는 자신의 수면 장치를 남자가 의도적으로 고장 냈음을 모른 채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남자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녀가 살고자 했던 삶의 계획이 모두 틀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망하고 원망한다. 이 두 남녀의 공통점은 절망이었고, 차이점은 원망이었다.

 

여기까지 영화 '패신저스'의 줄거리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 많은 어려움들을 겪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겪는 사고들은 크게 '인재' 천재로 나뉜다. ,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고를 인재라고 하고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고를 천재라고 한다.

 

건물이 무너지고, 불이 나고, 배가 침몰하고, 다리가 무너지는 등등 각종 현장에서 사고가 나는 것들은 대부분 인재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나고, 홍수나 해일이 발생하고, 운석이 떨어지는 것 등은 천재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때 마다 운 없이 거기에 휘말린 사람들은 크게 다치거나 혹은 죽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여파는 주변 가족들에게까지 퍼져 나간다.

 

그렇다면 인재와 천재의 차이점은 정확히 무엇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인재는 사람들의 불찰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고이며, 천재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 둘이 가장 큰 차이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경계가 애매하다. 지진이 났을 때 무너지는 건물과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인은 천재이지만, 결과는 인재로 나는 경우가 매우 많다. 특히나 제대로 짓지 않은 건물, 부실한 관리, 불법적인 구조변경 등으로 인해서, 단순한 사고로 넘어갈 것들도 큰 사고로 번지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도대체 어디쯤에서 이 둘을 구분 져야 할까? 이것을 풀어내기 위해서 영화 패신저스의 두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돌아가 보자.

 

우주선이 운석과 충돌하여 생겨난 기계고장으로 인해 깨어난 남자 주인공은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자가 일부로 깨운 여자의 경우는 그야말로 인재이다.

 

그리고 이 둘의 최종 차이점은 바로 원망의 대상이 존재하느냐의 여부이다. 혹은 어떤 원망을 품고 있느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 모두 깨어났을 당시에는 자신의 유일한 목적, 새로운 터전에 도착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로 인해서 절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로 인해서 평생 불행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반응한다. 왜냐하면 남자와 달리 여자는 자신을 깨어난 것이 우연히 일어난 천재가 아니라 남자의 의도에 의한 인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원망을 갖게 된 여자는 남자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미련도 쉽게 떨쳐 놓지 못한다어쩌면 떨쳐놓지 못하기에 원망이 계속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자신이 살고자 한 삶의 모습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누가 그것을 아무런 원망과 분노 없이 버텨낼 수 있겠는가?

 

이것을 통해서 인재와 천재를 구분해 낼 수 있다. 원망의 대상이 있으면 인재가 되는 것이고, 없으면 천재가 되는 것이다.

 

인재든 천재든 상관없이 어떤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매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원망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불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고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원망의 대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이후 삶에 있어서 아주 큰 차이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우주선 안의 남자와 여자처럼 말이다.

 

원망의 대상이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것에 따른 상처는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된다.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지만, 적응하면 살아갈 만 한 것이다. 그렇게 10년 정도만 지나도 그것에 대한 기억이 많이 흐려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가끔 아쉬운 정도로 끝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자기보호본능인 망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망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원망이 해결되지 못하면 그것을 잊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스스로 끝없이 그것을 상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니, 상기하고 싶지 않아도 머리 속에서 끝없이 되살아난다. 마음 속에서 화가 나기 때문에 끝없이 상대에 대한 원망이 샘솟는다. 그러니 그것을 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과정으로 인해서 자신을 불행해지더라도 결코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원망은 해결도 되지 않고, 잊혀지지도 않으며 10년이 지나도 전혀 바뀌는 것이 없게 된다. 아니, 그 오랜 시간을 원망으로 보냈으니, 불행해져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더 심각해진다.

 

인간이 가진 자기보호본능인 망각을 전혀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똑같은 상황이라도 10년이 지나게 되면 원망이 없는 사람과 원망이 있는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벌어지게 될까?

 

물론 이것을 단순하게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답은 뻔하다.

 

사부의 원통한 죽음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20년간 산속에 들어가 무술을 연마하고 결국 복수를 한 사람과, 그냥 그것을 잊고 평범하게 살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산 사람은 어떤 차이를 보이게 될까?

 

어떤 삶이 더 낫다고 평가하는 것이 애매하긴 하다. 하지만 행복이란 관점에서만 보면 가족을 이루고 산 사람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도대체 복수를 하고 난 후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부분이 정말로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원망은 왜 생기는 것일까? 사람들이 믿듯이 정말로 원망의 근거가 되는 수 많은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이유들로 인해서 생기는 것일까? 옳고 그름에 따라서 판별되는 것일까? 선과 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냥 감정이다. 그리고 나쁜 감정이다. 절망스러운 감정이며, 피를 토할 정도로 힘든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만들어 낸 '대상' 이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 대상이 없었다면 그냥 소멸될 감정일 뿐이다.

 

원망 뿐만이 아니라 어떤 나쁜 감정도 그 대상이 없다면 그냥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하지만 그 나쁜 감정을 만들어 낸 대상이 있는 경우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스스로 끝없이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여자는 자신이 남자로 인해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알고 난 후에는 완전히 마음을 닫는다. 이해는 충분히 간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닫은 채 늙어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과연 얼마나 현명한 선택일까?

 

영화 속에서는 다행히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 다가갈 상황이 생겨난다. 목숨이 걸린 상황이 벌어지니 여자의 원망은 금세 사라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원망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며, 그것을 할 만한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 원망인 것일까? 그렇다면 평생 동안 용서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조차도 얼마나 허상의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 낸 감정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냉정히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저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정말로 불필요한 행위인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어떤 원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이 말에 심하게 반발할 것이다. 도대체 네가 나의 처지를 얼마나 아냐고 말이다. 당연히 그렇게 말할 자유는 있다. 권리도 있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도 간다.

 

하지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원망을 품고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냐고 말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평생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고 사는 삶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궁금하다.

 

물론 그것을 품고 해결하려고 평생 노력하는 정도라면 괜찮다. 강한 욕망, 강한 두려움, 강한 분노, 강한 원망은 모두 어떤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20년 간 산속에서 무술을 연마한 죽은 스승의 제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평생 동안 자신이 사는 삶, , 복수를 위해서 삶을 다 소비하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지, 또한 그 복수 자체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좀 생각해봐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감정에 상처를 입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처가 깊은 것은 맞다. 하지만 감정은 원래 끝없이 바뀌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떤 원망이 생기게 되면 스스로 감정을 붙잡는다. 자신을 매우 불행하게 만드는 감정임에도 스스로 놓지 못한다.

 

처음부터 놓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맞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야 할 감정이다. 그 어떤 나쁜 감정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직 스스로 붙잡을 때만 사라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왜곡되기까지 한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 없던 것을 더하고, 있던 것도 바꾸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스로 원했고 행복한 삶이라면 괜찮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삶이 행복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야 행복한 존재이다. 그러니 미워하고 원망하는 삶은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이다.

 

물론 생각하면 억울할 것이다. 미칠 듯 화가 날지도 모른다. 도대체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이다. 그러니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냥 보내줘야 한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망각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과거에 자신을 온통 집어 삼켰었던 어떤 감정조차도 그저 웃음으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의 삶에서도 크고 작은 원망이 생길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 때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이다. 실망하고, 상처받고, 배신을 당한다. 누구나 각자마다 자신이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이때마다 그것들을 제대로 해결하든지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할 때 빠르게 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쥐고 있어봐야 본인만 힘들다. 이것이 바로 행복하기 위한 삶이다.

 

그래야 무엇인가가 남지 않는다. 원래 마음에 남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기가 힘들어진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안장애  (0) 2018.01.24
인간의 효율성  (0) 2018.01.18
나 그리고 우리  (0) 2018.01.09
감정 경험은 진실한가?  (0) 2018.01.01
행복의 정체  (0) 2017.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