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감정 경험은 진실한가?

아이루다 2018. 1. 1. 09:33

 

인간을 개와 같은 동물들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을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언어 능력일까? 공감 능력일까? 혹은 직립 보행 능력일까?

 

,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지만, 아마도 지적 능력이 그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물론 인간들 사이에서도 지적 능력이 크게 차이가 나고, 동물들 중에서도 꽤나 똑똑한 존재들이 있으니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와 구분할 수 있는 것을 지능이라고 할 때, 요즘 시대에는 새로운 문제가 하나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로봇의 존재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로봇은 인간만큼이나 똑똑할 수도 있고 오히려 훨씬 더 똑똑해질 것이다. 당장 지금 시점이라고 해도 장기, 체스, 바둑 분야만큼은 그렇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을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질문의 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수십 년 전부터 이미 그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 답은 바로 감정의 유무이다, 로봇은 지적 능력은 더 나을 수 있지만,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최종적으로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와도 다른,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답은 뭔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감정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느끼기 때문이다. , 감정은 결코 인간만의 고유의 것이 아니다. 특히 포유류 수준의 생명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것을 근거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로봇의 팔다리를 10개로 만들어 놓고, 너희들은 팔다리가 4개가 아니니, 인간하고는 다르다 라고 주장하는 꼴과 비슷해 보인다. 이것을 좀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 감정이 정말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한 가지 질문은 던져보자. 감정이란 것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그토록 자신하면서 그것을 로봇과의 차이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일까? , 인간은 감정을 어떻게 느끼기에 그렇게 확신 있게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는 확실한 증거로 내세울까?

 

그 답은 바로 진실함이다. ,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을 진실하다고 믿는다. ,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길 떄, 누군가를 너무도 좋아할 때, 즐거울 때, 슬플 때, 화가 날 때, 외로울 때, 두려울 때 등등 어떤 감정을 느끼는 상태일 때, 그 순간만큼은 그 감정에 온전히 빠져있다. 그래서 진실하다.

 

사실 진심이란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뜻이 바로 진실된 마음을 의미한다그리고 여기에서 마음은 바로 감정을 뜻한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아니다. 누구도 생각이 진실되다고 여기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한다.

 

반면에 로봇은 누군가의 의도로 프로그램 화 된 것이기에 머리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진실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믿어진다.

 

이와 달리 인간의 본질은 머리가 아닌, 가슴을 통해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그것이 무엇이든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토록 진실한 것일까? 그냥 원래 진실한 것일까?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 사실 인간이 감정을 진실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그저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아무런 생각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감정의 진실성의 근거는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어떤 감정을 느낄 때 경험하게 되는 몰입으로 인해서 그렇다. ,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거나큰 기쁨을 느낄 때나, 누군가를 너무도 좋아할 때, 신나고 즐거운 게임을 하고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 감정에 완전히 빠져 있다. , 완벽한 무의식 상태로 존재한다.

 


,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고, 다른 어떤 감정도 없는 듯 느껴지는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그 순간만큼은 그 감정으로 인해서 100% 순도를 가진 상태이다. 그러니 그 감정이 끝난 후에는 그것이 당연히 진심이고 진실이라고 판단되고 기억된다.

 

반대로 로봇은 그런 몰입이 불가능하다. 사실 그런 완벽한 무의식 상태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무척 위험한 상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갑자기 달려드는 차를 보면 사람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그 자리에서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있을 수도 있다. 이 역시도 공포감으로 인해서 100% 몰입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무척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로봇이라면 최대한 재빠르게 가장 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만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결국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를 지켜내거나 혹은 그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 상태의 몰입은 즐겁고 행복한 것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반대로 두렵고 불행한 것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그러니 로봇에게는 불필요한 기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은 무의식적 몰입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과 로봇의 차이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을 인정하더라도 아직도 한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그 감정의 연속성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어떤 감정이 아무리 진실되더라도 그 감정은 결국 사라져버리고 다른 감정에 의해서 또 다른 몰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화가 났다가, 즐겁게 웃다가, 슬픔에 잠겨 우는 것이 바로 인간이니까 말이다.

 

이런 감정의 변화 상태를 다르게 표현하면, 진실이 끝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어떤 감정에 사로잡힌 순간만큼은 진실된 것이니 상관없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진실이 사라진다는 것이 말이 될까? 아니, 금세 사라지는 것이 진실이 될 자격이 있을까?

 

물이 오늘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내일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면 과연 중력의 법칙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당연히 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의 감정 역시도 진실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진심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제는 거지가 불쌍해서 돈을 줬지만, 내일은 도대체 거지같은 존재들은 왜 있는지 욕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입장에 따라서 내면의 감정은 수시로 바뀐다.

 

오늘은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들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거지에게 돈을 줬지만, 내일은 출근을 하기 위해서 빨리 뛰다가 거지의 깡통에 걸려 넘어져 크게 다쳐서 결국 취직 자체가 취소되었다면 거지를 욕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가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단 한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그 감정을 경험을 했다는 근거로 서로 이성적으로 설득할 때조차 그것을 내세운다.

 

내가 경험했으니까 믿어야 한다. 내가 느꼈으니까 진짜다 라고 말한다.

 

감정은 끝없이 변하는데, 어느 한 순간 느낀 감정을 근거로 그것을 진심이며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도대체 이 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본 영화가 참 재미있었다는 이야기 할 때, 자신이 느낀 감정을 기반으로 이야기 한다. 이러저러한 것들을 느꼈으니 그 영화는 참 재미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기 자신 안에서 머물 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제는 남들과 함께 그 영화를 평가할 때 생겨난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의 느낌을 근거로 영화를 욕하고, 또 다른 누군가도 자신의 느낌을 근거로 그 영화를 칭찬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싸운다.

 

그리고 여기엔 각자가 느낀 감정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이고, 매일 경험하는 갈등의 정체이다. 바로 감정에 대한 확신, 그것이다.

 

디자인 시안을 두고 서로 그런 얘기를 한다. 각자가 느끼는 느낌을 근거로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한다. 옷의 코디를 두고 그런 얘기를 한다. 영화나 책을 두고 그런 얘기를 한다. 수 많은 가치, 개념, 종교, 관계 등을 두고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기반으로 그것들을 판단한다.

 

이것이 과연 정말로 맞는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사실 감정의 본질은 진실성이 아니라 순수성이라고 봐야 한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는 오직 그 감정만 느끼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런 감정의 순수성 역시도 결국 감정의 강도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 강렬한 감정일수록 그 사람을 온통 사로잡는다. 그러니 감정의 순수성은 그저 감정의 강도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그렇다면 약한 감정은 순수하지 않고, 강한 감정만 순수한 것일까? 혹은 이것을 감정의 진실성에 대입해보면, 약한 감정은 진실이 아니고 강한 감정은 진실이 되는 것인가?

 

누군가가 불쌍하다고 느낄 때 100원을 주면 진실도 아니고 순수하지도 않으며, 만원을 주면 진실이 되고 순수한 것인가?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때문에 그것의 순수성을 믿으며 또한 그것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아무런 감정이 없더라도 사지가 마비된 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없이 보살피는 로봇과, 한 순간의 감정에 휘말려서 며칠 병수발을 들다가 결국 손발을 들고 마는 봉사 체험자 중에서 도대체 누가 더 진실이어야 할까?

 

인간의 믿음처럼 어떤 한 순간에 온 몸이 마비된 환자가 너무 불쌍해서 자청해 며칠간 간병을 하다가 결국 힘들어서 그만두고 마는 사람이 더 진실한 것일까? 처음 그 순간만큼은 100% 순수성을 가졌으니 진실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냥 거기까지라도 인정해준다고 치자.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감정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잘못 정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감정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정체성을 감정에 두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감정은 인간의 절실한 생존활동이다. , 인간은 생존을 하고 싶기에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생존 가능성이 줄어들 때 나쁜 감정들인 짜증, 분노, 질투, 두려움 등을 느낀다. 반대로 생존 가능성이 늘어날 때 기쁨, 즐거움, 상쾌함 등의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감정은 완벽한 이기적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최대한 살기 위해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긴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분명히 이타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생존 활동 중에서는 바로 남들과 잘 지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야만 생존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이타심의 정체이다. 오늘 내가 풍족할 때, 부족한 남에게 먹을 것을 나눠줘야 다음에 내가 부족할 때 먹을 것을 얻어 먹을 수 있다.

 

이것이 모든 인간 관계의 기본이고, 이것이 바로 완벽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여유가 있을 때는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신장은 두 개 이기에 남에게 기증할 수 있고, 심장은 하나이기에 절대로 남에게 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여유의 진정한 의미이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주기란 쉽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해낼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인간은 그것을 해내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은 바로 '감정 이입' 이라고 부르는 능력이다.

 

감정이입은 바로 남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가정해서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남의 불행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감정이 움직여서 결국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감정을 정리하면, 생존에 대한 욕구가 최초의 두려움이란 감정을 만들어 내고, 이 두려움이 늘어날 때는 수 많은 나쁜 감정들로 파생이 되어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이 두려움이 줄어들 때는 좋은 감정들이 파생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의 본질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두려움이 늘어날 때를 불행하다고 하고, 두려움이 줄어들 때를 행복하다고 한다.

 

결국 감정은 인간이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내면의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감정의 본질적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결국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용도로 감정을 사용하는 것은, 그저 로봇은 '죽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사람들끼리는 감정을 너무도 소중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정의할 지 모르지만, 사실 로봇 입장에서는 감정이란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죽지 않기 위해서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는 모습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인간은 로봇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정을 내세웠지만, 참으로 볼품없는 짓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죽기 때문에 느낄 수 밖에 없는 어떤 무의식적 몰입 상태를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해서 감정으로 느꼈다면, 그 경험을 절대적으로 믿는 어리석은 짓도 매일 매 순간 하고 있다.

 

물론 감정은 중요하다. 살아야 하니까 당연히 중요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러니 감정이 중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옳다고 말 할 수는 없다.

 

행복은 감정들 중에서 좋은 감정들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두려움을 최대한 덜 느끼는 상태이다.

 

그리고 누구나 가장 원하는 것이다. 당연히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큰 돈을 벌었거나, 새로운 이론을 생각해 냈거나, 봄에 뿌린 씨앗으로부터 수확을 하거나,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바로 그런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모두가 생존 가능성을 높여서 두려움을 줄였거나 혹은 두려움 자체를 잊은 시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고 그것이 절대적 선 이길 원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면, 돈을 벌어서 두려움이 줄었지만, 원한을 샀기에 두려움이 늘어서 결국엔 행복해지지 못한 상태가 될 수 있다. , 어떤 행복을 위한 노력은 그냥 두려움을 줄여주는 역할로 끝나야 한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지,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것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먹는 맛있는 스테이크가 어떤 소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어떤 행복함을 경험하는 순간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게 되면 그 행복감은 현저하게 감소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감정들은, 특히나 좋은 감정들을 경험할 때는 아무런 생각없이 완벽한 무의식 상태로 그 감정에 몰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닌, 필수적 조건이다.

 

그리고 그렇게 몰입이 되어서 경험되는 감정들은 큰 행복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마치 절대적 진실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술을 먹게 되면 감정적으로 변하는 이유도 바로 이 원리이다. 술을 먹게 되면 사고 능력이 떨어져서 감정의 몰입이 쉽게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작은 감정의 변화도 크게 일어나고 결국 강렬한 감정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생존하고 싶기 때문에 행복하고 싶고, 행복하고 싶기 때문에 잡생각이 없는 몰입된 감정을 경험하고 싶고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몰입된 감정의 경험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로봇과 인간의 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큰 상관은 없다. 아무리 감정의 문제점을 알아도 결국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죽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 사람은 살고 싶어하는 한, 감정에서 단 한발국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문제는 인간은 결국 누구나 죽는다는 점이다. 이것만 아니라면 원래 감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죽기 때문에 결국 감정을 통해 한 그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결론이 바로 감정이 옳을 수 없는 가장 슬프고도 확실한 이유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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