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나 그리고 우리

아이루다 2018. 1. 9. 08:42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 살길 바란다.

 

내가 먹길 바라고, 내가 잘나길 바라고, 내가 이기길 바라고, 내가 성공하길 바란다. 내가 목표를 갖길 바라고, 내가 결혼을 하길 바라고, 내가 아이를 낳길 바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가 살길 바란다.

 

각자의 삶에 있어서 ""는 선택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흔히 봉사나 희생과 같은 남을 위한 행동조차도 그 내면을 깊숙이 바라보게 되면 여전히 ""가 존재하고 있다. , 인간에게 있어서 ""는 절대적 조건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런데 이 명확한 진실에 조그마한 의문을 던진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패신저스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아주 단순히 보면 우주 여행 중에서 생긴 우연한 한 사건으로 인해서 두 남녀가 사랑을 하고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 조건으로 알려진 ""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감독이 정말로 이런 질문을 하려고 이 영화를 찍은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완벽히 차단된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두 남녀의 삶을 다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삶에 대한 온전한 집중을 의미한다. 그러니 당연히 삶의 의미, 가치, 존재적 의문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터전으로 향해 하는, 장장 120년이 걸리는 여행 중에서 우주선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은 모두 수면 상태에서 120년간을 보내야 하는데, 겨우 30년이 흐른 후 기계고장으로 인해 한 사람이 깨어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남자가 먼저 깨어난다. 그리고 남자는 1년을 버텨본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로움, 고독, 우울함, 지겨움의 반복에 불과하게 된다. 특히나 때가 되면 먹을 것이 나오고, 아프면 자동으로 치료가 되는 의료기기가 있는 그곳에서, 이 남자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행동 조차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차라리 무인도라면 나았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삶이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무의미한 삶이 지속된다.

 

감독은 이 설정을 통해서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생존활동이다. 그런데 생존 활동을 하려면, 어떤 행동이 실제로 생존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당장 버튼만 누르면 먹을 것이 나오는데, 일부로 사냥을 떠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구라면 떠날 수는 있다. 단순하게 유희를 위한 사냥이다.

 

하지만 우주선이란 공간은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그 어디에도 자연이 없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사냥을 할 수 도 없다. , 남자는 살아야 하지만, 그 어떤 생존 활동도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니 우울함, 지겨움, 고독이 밀려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삶은 그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되고 만다.

 

결국 남자는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날, 그는 운명의 여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는 한참 이 여자를 깨울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남자는 유일한 말 상대인 로봇에게, 자신이 백만배 행복해질 기회가 있는데 이것이 도덕적인 일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 물론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감독은 이 질문의 통해서 두 번째 질문은 던진다. 그것은 바로 행복의 도덕성에 관한 질문이다.

 

질문 하나하나가 답하기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복은 거의 절대적 선이지만 모든 행복이 도덕적일 수는 없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나름대로 도덕적인 행복을 추구했다고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한가지 비도덕적인 일이 있다. 바로 자연이다.

 

인간의 먹거리로 태어나 살다가 죽는 수 많은 동물들, 옷이 되기 위해서 껍질이 벗겨지는 동물들, 지구 문명화와 온난화로 인해서 터전을 잃고 있는 동물들 등등, 인간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동안 수 많은 생명체들이 피해를 입어 왔다. 그리고 지금도 입고 있다.

 

동물들뿐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한 사람의 행복이 그저 그 사람의 행복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경쟁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누군가 고가의 옷을 사면, 그 옷을 사지 못한 사람들은 질투심을 느끼고 부러움으로 인해서 기분이 상할 수 있다. 자신의 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여파가 생긴다. 누군가 승진을 하거나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 승진에 탈락하는 사람들과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흔하고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행복은 어쩌면 도덕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자는 결국 여자를 깨운다. 자신의 의지로 여자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깨어난다. 그리고 자신도 남자처럼 우연히 사고로 깨어난 줄 알게 된다. 여자 역시도 처음엔 남자처럼 힘들어하지만, 적어도 혼자가 아니었기에 삶은 다르게 흘러간다.

 

남자의 삶 역시도 완전히 달라진다.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우울했던 삶이 이제는 온통 장미 빛이 된다. 삶은 살만한 것이고, 오히려 삶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감독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이 바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이다.

 

사람들은 모두 ""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모든 경쟁에서 "내가" 이기길 바란다.

 

만약 인류 모두가 승부를 겨루고 최종 승리자만 살아남는 상황에 놓였다면, 모든 사람들을 다 이기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정말로 ""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서 마지막 승리자는 영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자살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 ""를 위해 살지만모두 ""를 통해 존재할 수 있다. ,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가 되었을 때 진정한 삶이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모두들 각자 자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지만, 정작 나를 의미 있게 하고 가치 있게 해주며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 남이다.

 

결국 나는 사라지고 우리만 남는다. 더 깊이 들어가보면, 어떤 면에서 ""라는 개념 자체가 그저 살고 싶기에 존재하게 되는 두려움의 다른 표현일 뿐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나는 허상이다. 경쟁 속에서 생겨난 괴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홀로 남는 순간, 그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터진 물거품은 그 자체는 사라지지만, 그럼으로써 거품을 만들어 낸 본질 그 자체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우유거품이 터지면 그 거품을 만들었던 아주 작은 분량의 우유는 다시 전체 우유에 섞일 수 있게 된다. 나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왜 지구를 떠나 새로운 터전으로 가고자 했냐고. 왜 지구에서 맺은 모든 관계들과의 단절을 무릅쓰고 이 여행을 떠날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

 

감독은 여자의 인터뷰를 통해 네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도대체 사람은 무엇을 통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남자는 새로운 터전에서는 자신과 같은 엔지니어가 쓸모가 있기 때문에 가고자 한다고 답한다. 삶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쓸모 있길 바란다. , 선택적 존재이거나 언제라도 교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필수적 존재 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런 필수성은 꼭 이런 기술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종류이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필수성의 정체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의 생존 본능 중 하나이다. 사람은 많은 돈을 벌었을 큰 성공을 거뒀을 때, 강한 권력을 가졌을 때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저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의미가 있어지고 행복해진다. , 성공, 권력도 그저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일 뿐이다.

 


비밀은 영원히 지켜질 수 없는 법, 결국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고의로 깨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엄청나게 분노를 하고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둘은 결국 서로를 투명하게 여기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 인공지능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감독은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다섯 번째 질문은 바로 삶의 목표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다. 여자는 자신을 깨운 남자에게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 비난한다. 자신이 목표했던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없게 했다고 미칠 듯이 화를 낸다.

 

이해는 간다. 그녀는 작가였다. 그래서 새로운 터전에 가서 새로운 글을 쓰고 다시 지구로 돌아오고자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불가능한 목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화가 안 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과연 정말로 그런 목표는 실체적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그 둘은 결국 그 우주선 안에서 살다가 늙어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완벽히 서로에게 집중하는 삶, 그것만큼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또 어디에 있으랴.

 

인간 세상은 끝없이 목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삶을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사람은 그냥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에게 집중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 그것을 찾아 헤맨다. 여행도 가보고, 모임도 참석하고, 수 많은 책을 읽어보아도 절대로 채워지지 못한다. 오직 사람으로만 채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해서 여섯 번째 질문이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상처와 용서에 관한 것이다.

 

단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상대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삶은 결국엔 또 다른 무의미함을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언젠가는 여자는 결국 남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상처를 입었지만,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삶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분노가 가득한 여자는 자신을 더욱 더 불행한 쪽으로 가게 만든다.

 

이런 종류의 일은 인간의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 스스로를 불행한 쪽으로 향한다. , 용서하고 같이 살면 행복한데, 도저히 용서가 안되니 그냥 불행하게 살아가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용서를 하지 못할까? 그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인데도 왜 그렇게 용서를 하지 못할까? 그래서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평생 동안 붙잡고 살아간다.

 

그것을 남이 붙잡으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안다. 하지만 그저 그 자신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와 화해를 해야만 자신의 삶이 행복한 것을 뻔히 아는 여자이지만, 끝까지 그것에 저항을 한다. 하지만 결국 우주선에 커다란 문제가 생긴 후에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밖에 없게 된다. 아니, 마음을 바꿀 작은 이유만 하나 있었으면 되었다.

 

결국 우주선을 고치기 위해서 아주 위험한 외부로 나가는 남자에게 여자는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부탁한다. 살아 돌아오라고 말이다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말한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말로 남자가 죽으면, 자신도 죽는 상황이다. 우주선의 고장을 고쳤더라고 해도 말이다. 혼자 사는 삶은 삶이 될 수 없음을 여자는 따로 경험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인간은 완벽한 혼자가 되었을 때, ""의 무의미함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의미 있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남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그렇게 이기적으로 사는 존재이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생존에 대한 두려움뿐임을 알려준다. 삶이 만약 생존 그 자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사람들은 그 자신을 그런 생존 기계로 여기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남자 주인공처럼 홀로 살아가 죽어야 할 삶을 계속 지속할 수 있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감독이 놓친 질문들을 생각해보자여섯 개의 질문만 해도 대단하긴 하지만약간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니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사람들은 왜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할까? 사랑하고, 대화하고, 같이 놀고, 서로 인정해줄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한 가지 공통적 특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상호간의 공감능력이다.

 

, 공감능력이 인간을 서로 의미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리고 공감능력은 각자 자신이 경험하는 감정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기능이다.

 

, 자신의 감정을 공감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나쁜 감정을 해결할 방법이 쉽지 않다. 두려움, 지겨움, 분노, 질투 등등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수 많은 종류의 나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래도 불행한 삶이 된다. 불행한 삶이란 말 자체가 바로 나쁜 감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쁜 감정만 그런 것이 아니다. 좋은 감정들도 역시나 공감을 받아야 한다. 즐거운 일, 기분 좋은 일, 재미있는 일 모두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공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다. 또한 사람이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살아야 하는 이유 역시도 공감능력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정받지 못한 감정만큼 감당하기 힘든 것도 없다. 억울한데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기쁜데도 누구도 그 기쁨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슬픈데 그 누구도 그 슬픔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등이 그렇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깨우기 전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로봇에게 말을 한다. 너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대사는 인간이 로봇에게 아주 자주 써 먹는 대사이다. 감정이 없으니, 인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다. 이 말은 틀린 것은 없다. 하지만 사실은 틀렸다.

 

로봇은 감정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라자신을 공감해주지 못하기에 인간이 아닌 것이다. , 로봇이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상대가 자신을 공감해주고 있느냐의 여부는 정말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니 개에게도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개는 인간의 감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약간 아는 듯 군다. 그래서 인간은 개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보다 더 말이다.

 

수 많은 영화를 봤지만, 이 영화만큼 다수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없었다. 대놓고 삶의 의미나 가치를 설명하려고 했던 수 많은 명작 영화들보다 훨씬 더 건조하고 단순한 어투로 질문을 던진다.

 

그것도 단 네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말이다.

 

생존에 관한 기본적인 해결을 다 해놓은 채, 고립된 채 단절된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통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며,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진실에 다가간 해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 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평론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여자를 깨운 비도덕적인 결정의 합리화, 사랑으로 모든 것을 결말짓는 뻔한 결론, 그래서 전혀 새롭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독은 이런 평가를 통해 예기치 않게 추가적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더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제한된 수준의 이해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인가를 잘 아는 척 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일같이 사랑, 정의, 도덕, 가치, 삶을 말하고, 그것을 통해 남을 평가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것들이 정작 무엇인지는 전혀 모른다.

 

그리고는 자신의 경험한 세상을 통해서 그것을 이해하는 척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모든 것이 뻔하다고 한다. 결국 그래서 이 영화 역시도 뻔한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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