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불안장애

아이루다 2018. 1. 24. 07:52

 

200년 전쯤 이 땅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을 때, 당시에도 분명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척박한 환경이라서, 태어난 후 1년만 살아남아도 ''이라는 잔치를 해 줄 정도로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는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을뿐더러치료법도 거의 없었던 다양한 병들주변의 위험한 환경들, 심지어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까지도 두려워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어리고 약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심정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요즘 시대에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있다.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먹거리, 수 많은 질병에 대한 예방주사, 자라나는 동안 거의 흉터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의 안전한 환경, 동물원에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호랑이 등등이 바로 요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돌잔치도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할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200년 전에 아이를 키우던 부모들과 요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누가 덜 불안함을 느낄까?

 

논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현대의 부모들이어야 옳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래 보이지가 않는다. 오히려 요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불안함과 두려움은 정말로 심각해 보인다.

 

물론 과거의 부모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고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 사실은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어딘가 나가서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아도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래된 일도 아니다. 겨우 30년 전까지도 그랬다.

 

당시 아이들에게 있어서 동네는 안전한 공간이었다. 그러니 부모들이 꼭 아이들을 꼭 지켜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어른들은 어떤 아이가 어느 집 아이인지 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밭에 가다가, 읍내에 나가다가, 주막에서 술을 한잔 하다가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아이가 보이지 않더라도 몇 집 건너서 물어보면 금세 마지막 아이가 목격된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또한 혹시라도 아이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사고가 생기면, 마을 주민들은 다 함께 그 아이를 찾아줬다.

 

이렇게 부모 말고도 아이를 잘 알고 걱정해주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통계치에 의하면 미국의 국민들 중 25% 정도가 평생 한번 정도의 불안장애를 경험한다고 한다. 생각보다 꽤나 많은 비율이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불안장애를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미국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은 개척의 역사이다. , 지난 200년 동안 미국의 동부에서 시작해서 서부로 끝없이 확장되어 왔다. 그런데 그 주체는 국가가 아니었다바로 개인이었으며 가족이었다. , 온 가족을 마차에 태운 채 서부로 달려간, 소위 말하는 '골드 러쉬' 가 바로 그런 일을 해낸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공권력이 다다르지 못한 곳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다. 도둑, 강도, 살인 등등 수 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범죄자들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보안관이란 제도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리 신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총을 들고 다니는 세상에서 보안관은 언제라도 총을 맞고 죽을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한 시기엔 모든 안전의 단위는 결국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다. 한 집에 사는 사람들, 즉 가족 말이다. 그리고 이때 집안의 가장인 남자는 가장 힘이 센 존재로써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역할에 무한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지금도 모든 인간관계가 바로 가족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 미국에서 가족애는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냉정히 표현하면 가족은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관계이고 나머지는 언제든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는 희생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남의 가족의 소중함도 인정할 수 있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가정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이런 문화적 특징은 지금도 미국 영화에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그래서 미국 영화에는 유독 가족간의 유대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가족은 가족이다", 이 말은 미국 사회의 모든 관계의 기본을 설명하는 말이 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사회도 천천히 이런 형태로 바뀌고 있다. 물론 미국처럼 집안의 가장이 가족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안전함의 단위가 가족 중심으로 된 것은 맞다.

 

, 과거 대한민국이 조선이라고 불리던 시대에 존재했던 마을 공동체 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그런 문화가 가진 장점도 컸지만, 딱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도 함께 지내야 했던, 불편함의 문제도 컸기 때문이다. 또한 내 일도 아닌데 나서야 하는 귀찮음도 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아이의 엄마들은 아주 중요한 안전장치를 하나 잃게 되었다. 부모 이외에는 누구도 그들의 아이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 과정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불안증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관계 속에서의 고립이다. , 단절이다.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서 고립되고 단절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수 많은 불안증에 노출되게 된다. 사실 불편하긴 해도 다수의 무리에 속해 있는 것만큼 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셋이, 셋 보다는 넷이 더 안전하다. 그 숫자가 늘어나면 날수록 점점 더 그렇다. 하지만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 날수록 점점 더 불편해지는 것도 사실이며, 개인적으로는 별로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하는 문제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또한 많은 경조사에 참가해야 하는 귀찮음과 그때 발생하는 비용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몇 십 년 전부터 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이제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숫자를 줄이려고 애쓴다. 넷에서 셋으로, 세에서 둘로, 둘에서 결국 하나로까지 줄어들고 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고, 귀찮지도 않고, 불필요한 비용도 줄어들게 된다. 보고 싶은 사람만 골라서 만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른 사람 때문에 양보할 필요도 없다.

 

세상이 점점 안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안전의 가치는 점점 덜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제 관계로부터 오는 안전함을 위해 투자하기 보다는 자신이 더 좋아하고 즐거운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주말이 되어서 영화를 보러 가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장례식 소식이 들려오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는 상관없지만, 뭔가 재미난 일을 하려는 순간 방해를 받으면 기분 좋기가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관계를 가볍게 하려고 한다. 자신이 누리고 싶은 행복을 방해한다 싶으면 언제라도 끊을 수 있으며, 또한 언제라도 다시 이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가볍고 넓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SNS만큼 좋은 도구도 없다.

 

하지만 여기엔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현 시대가 안전해진 것은 맞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안하다아니, 오히려 더 불안하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오직 그 자신밖에 없으니 아이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어느 정도 안전해지기는 했지만, 완벽히 안전해지지 않은 것은 결국 안전함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다. 아주 작은 불안요소도 결국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은 결국 불안증세를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고 만다. 머리 속에서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관계를 무겁게 맺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로움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쓴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은 여전히 안전에 대한 신뢰를 하지 못하고 있다. , 감정은 끝없이 불안함을 경험하는데, 생각은 그 불안함을 무시하는 것이다.

 

문을 잘 잠그고, 큰 길을 걷고, 낯선 사람을 보면 경계하고, 남을 가능하면 믿지 않고, 경찰이 언제든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자신은 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머리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대낮에 경찰 앞에서도 칼에 찔릴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그런 뉴스나 기사를 볼 때마다 무의식은 불안함을 경험한다. 이런 형태의 생각과 무의식의 갈등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신경증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안장애로 나타나게 된다.

 

, 불안장애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바로 안전함에 대한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욕구인 셈이다. , 자신의 무의식은 끝없이 안전하길 원하지만 실제 삶은 늘 행복한 쪽으로만 가려고 하기 때문에 발행하는 문제이다.

 

물론 행복한 삶은 좋다. 하지만 언제나 행복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입에 단 사탕을 매일 먹다가는 당뇨병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기에 끝없이 잘나고 싶어한다. 남들보다 잘나서 인정을 받을수록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남들이 잘 못하는 것이나 많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비교를 통해서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갖고 싶어한다. 그래야 자기 정체성이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홀로 움직이길 원한다. 그래야 뭔가 결정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기 때문에 끝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차별적 존재가 되길 원한다. 또한 남들과 비교해서 우뚝 서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관계에서 분리되길 원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제 행복해졌을까?

 

일단은 그런 것 같다. 삶을 살아온 훈장이 가득하니까 말이다. 남들이 안 해본 것도 많이 했고, 여권에 수 많은 도장이 찍혀 있다.남들보다 잘하는 것도 많고, 어디에 가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사람이 24시간 행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가끔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시간에 혼자 있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오는 것이 싫다고 느낀다. 외롭고, 불안하고, 끝없는 걱정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 속을 다른 것으로 돌리려고 애쓴다. TV를 보고, 잠을 자고, 게임을 하고,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그러면 생각이 멈추고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또 다시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돌아온다.

 

이것은 정말로 행복한 것일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관계형 존재이다. 이것은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 구조가 그렇다. , 인간의 두뇌 능력은 관계를 맺는데 가장 최적화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 속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안전함, 도움, 즐거움, 인정, 위로, 공감, 충만함, 이득까지 모두 관계에서 나온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관계가 가벼워서는 안 된다. 물론 가벼운 관계에서 정보나 즐거움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단순한 위로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가 주는 가장 중요한 가치들, 즉 안전함과 공감 그리고 충만함 등은 결코 얻을 수가 없다. 이것들을 모두 관계의 진지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무거운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스스로는 모르고 있지만, 다들 이런 무거움으로부터 나오는 진지함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 과거에 비해서 관계의 무거움이 많이 사라진 요즘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지만, 실제로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린 가치들을 희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마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신뢰, 자신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의 경험, 이런 것들을 본능적으로 바라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오히려 남과 나를 구분하며 그 경계를 더 명확하게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남들과 다른 잘난 자신을 만들어서 분리시키기 위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음을, 그리고 과거엔 그렇게 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는 끝없는 불안장애 속에서, 한 순간의 틈도 없이 머리 속을 외부 자극으로 채운 채 살아가다가, 결국 그 삶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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