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씨의 인문학개론

20강, 나를 넘어서 - 2부

아이루다 2017. 3. 3. 09:12


[1부에서 계속]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무엇과 일체화 되어야 할까요? 자아가 답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아주 곤란해요.

 

그런데 오히려 이런 곤란함이 바로 인간을 본능과 자아를 넘어선 새로운 존재로 정의해야 한다는 변화의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어요. , 인간은 본능을 넘어서 자아를 거쳐 이제 세 번째로 정의되어야 할 시점을 향하고 있어요. 이미 어느 정도 오기도 했고요.

 

이런 변화의 요구가 가진 진정한 의미는, 현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자아가 추구하는 행복이 이제는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과거 본능을 통해 느낀 먹고, 자는 행복이 자아가 등장함으로써 경쟁과 인정의 행복으로 바뀌어버렸듯이, 이제는 자아를 넘어서 새로운 형태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대가 요구되고 있죠.

 


하지만 여기엔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너무 짧은 시간에 변화의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점이에요.

 

이 세 번째 변화 가능성은 지난 백여 년에 걸쳐서 급격하게 높아졌어요적어도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에 걸쳐서 천천히 이뤄져야 할 변화가 단 백 년 만에 이뤄져야 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기술 문명이 최근 백 년 사이에 눈부시게 발전한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요.

 

최초 문명의 발달과 사회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 인간의 정의를 본능에서 자아로의 변화를 이끌었다면, 지금은 고도화 된 기술 문명이 다음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아직도 본능의 영역 조차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고 더해서 자아의 영역에서는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이것은 마치 외모는 변했는데 정신 수준은 전혀 변하지 않은, 갑자기 자라서 어른이 된 아이와 비슷해요. 그래서 속으로는 아이처럼 겁이 나는데 밖에서는 어른 취급을 받으니 중간에서 엄청난 괴리감이 발생하는 것이죠.

 

이 괴리감이 바로 바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수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에요. 사회의 발달은 이미 자아의 시대를 훌쩍 뛰어 넘고 있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아를 통해 얻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불필요한 경쟁과 비교를 통해서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망치는 짓을 하고 있죠. , 비교할 필요도, 해봐야 도움도 안 되는 비교를 한 후에 쓸데없는 질투심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며, 외로움을 느껴요. 더해서 괜히 기대를 했다가 상처를 받고, 피해의식을 경험하며, 결국 집착을 하죠.


과거 자아의 시대엔 그런 단점이 있더라도 관계를 계속 유지했어야 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요. 하지만 이제는 혼자 살아도 충분히 생존이 가능해요. 관계 속에서 살면 더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해지면서까지 관계 안에 있을 필요가 없죠.

 

억지로라도 관계 속에 머무른 것은 원래는 행복 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결국엔 자아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불행해져 버린 것이죠. 괜한 경쟁을 통해 비교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상처를 받는 것을 평생 동안 반복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근원적인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 번째 인간의 정의가 될 것이에요.

 

그 변화의 결과를 바로 '행복한 인간' 이라고 불러야 옳겠네요.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한 행복은 자아가 추구하는 행복과는 완전히 달라요. 지금 말하는 행복은 홀로 경험할 수 있는 절대적인 행복을 의미하고 있어요. , 남들과 전혀 상관없는 오직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죠.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요? 많은 현자들이나 조언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남들과 상관없이 오직 당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라'

 

이제 요즘 시대에 이런 말들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제대로 이해가 가시죠? 이것은 선택이 아니에요. 필수죠지금은 행복에 대한 방법론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시대에요. 경쟁, 비교, 승리, 인정과 같은 관계 속에서 추구하는 행복 말고 혼자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그런 행복을 추구해야 해요.

 

물론 그런 행복을 찾기란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결국 그런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자아가 만들어내는 있는 많은 나쁜 것들, 질투, 분노, 상처, 피해의식, 열등감 등등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래서 이 변화는 당신이 남은 삶을 정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사실 그런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어요. 점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각자 혼자서 즐기는 것들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어요. 이제 혼자 살아도 돼요.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나아요. 결코 홀로 사는 것을 스스로 불안하게 여기거나 비참하게 여기지 마세요.

 

물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사세요. 하지만 지속적으로 힘들다면 변화하세요. 아니, 진보하세요. 인간의 세 번째 정의를 향해 가세요. 바로 당신의 행복을 위한 삶 말이에요.

 

하지만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있죠. 왜냐하면 아직도 사람들은 자아를 통해 경험하는 행복만큼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거든요그래서 여전히 경쟁이 필수적이라고 믿고, 성공하고 인정받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믿고 살아가게 되죠.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방식에 집착하는 것이에요. 변화를 거부하는 행동이죠. 또한 그 댓가를 치뤄야 합니다. 언제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언제나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서 결국 언젠가는 자아가 상처를 입고 우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죠.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에요. 이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로부터 오는 행복을 무조건 거부할 필요는 없어요. 대신 조절이 필요합니다. 경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자아가 기뻐할 때, 그 자아를 당신과 일체화 시키지 마세요. 이긴 것도, 인정 받은 것도 당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그것은 패배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한없이 우울해지는 당신의 일부가 느낀 감정일 뿐이에요. , 자아가 하고 있는 일인 셈이죠.

 

그래요. 이제 자아는 당신의 일부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직까지는 자아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어요. 직장에서 인정을 받아야 오래 다닐 수 있고, 경쟁을 하면 이겨야 더 이득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정 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을 집어 삼키도록 놔두지는 마세요. 경쟁의 노예가 되지 마세요. 인정받기 위해서 당신의 행복을 해치는 짓을 하지는 마세요.

 

더군다나 좀 더 미래가 되면 상황은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인간의 생산성은 더욱 더 높아질 것이며, 혼자 살아도 큰 문제가 없는 세상이 올 것이에요. 어떤 과학 기술보다도 바로 로봇이 보급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로봇은 혼자 사는 인간이 가진 가장 치명적 단점, 늙고 병이 들었을 때를 대비하는 최고의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 번째 변화를 겪은 후 살게 될 인간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여전히 비교 행복과 상대적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 분명히 본인은 행복하길 원하는데 그 방법론이 자체가 아주 오래된 잘못된 방법을 이용한 것이에요.

 

자아는 기본적으로 상대적 행복이에요. 그리고 상대적 행복은 근본적 문제가 있죠. 내가 행복하면 남은 그만큼 불행해져요. 남이 불행해져야 내가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것이죠. 순위를 매기니까 어쩔 수 없어요. 당신 성적이 오르면 다른 사람 성적이 떨어져요.

 

과연 이것이 행복을 위한 정답일까요?

 

아니죠. 인간은 이제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야 해요.

 

그럼에도 대다수의 인간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생성된 자아의 늪에 빠져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그래서 지금은 무엇보다도 그 늪에서 빠져 나와서 절대적 행복을 향해 가야 해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먹는 것이, 남들이 쉽게 먹지 못하는 것을 먹는 것이, 비싼 것을 먹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그저 배부르게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행복이어야 해요.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남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남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이 행복이 이 아니라, 그저 자기가 필요한 수준의 돈을 벌어서 쓰면서 만족하는 행복이어야 해요.

 

남들보다 더 매력이 있으며, 남들에 비해서 더 자주 이득을 얻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한 감정 속에서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야 해요. 그래서 불필요한 질투, 열등감 등을 느끼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당신의 삶에서 '' 은 이제 좀 빠져야 해요. 당신의 자아는 어쩔 수 없이 끝없이 ''을 의식하고 살겠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선에서 제어가 되어야 하죠.

 

이제는 상대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행복해야 해요. 지금 새로운 기회가 왔어요. 이제는 생존을 넘어서서 절대적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그러니 당신의 시간과 노력을 바로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쓰세요. 남들과 경쟁하는데 쓰지 말고요.

 

, 이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진정한 답을 찾으셨나요?

 

지금 시점에서는 '당신 홀로 행복한 존재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해내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에요. 특히 당신이 가진 가치에 대한 순위 개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정말로 실천하기가 힘들 것이에요.

 


원래 가치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상대적 개념이에요. 가치는 다른 사람의 인정으로부터 만들어지거든요. 그리고 가치는 당신과 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도 쓰여요. 그래서 절대적으로 행복 하려면 가치 자체를 버려야 해요.


당신이 만약 스스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통해 남보다 우월하려고 하는 순간, 당신은 다른 사람의 가치로 인해 열등한 존재가 될 입장에 놓이게 되요.

 

행복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하든 온전히 동등해야 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들이 순위가 매겨져서는 안 되요. 단지 건강을 해치거나 많은 돈이 드는 것 등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죠이 말은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지 어떤 행복이 또 다른 어떤 행복보다 더 낮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행복에는 높낮이가 없어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도 없죠. 더 가치가 있는 것도 없어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본인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절대적 의미를 가져야 해요.

 

이것이 당신이 추구해야 하는 진짜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일까요? 인간을 그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정의하고 나면, 당신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존재라고 정의하고 나면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인간에게 더 이상 뭔가가 의미 있는 것이 없을까요? , 인간의 네 번째 변화는 없을까요?

 

사실 있다고 알려져 있긴 해요. 하지만 여기에서부터는 저 역시도 완벽한 미지의 영역이에요. 그럼에도 지식적으로 설명해드릴 수는 있어요.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껏 숨겨 놓았던 신의 존재를 끄집어 내서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을 이해를 위해서 오래 전 인간의 사회에서 나타났던 위대한 두 분을 알아야 하죠워낙 유명해서 분들이라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에요.

 

한 분은 부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예수님이라고 불렸어요. 그리고 이 두 분이 이해하고 그분들이 깨달은 생각을 듣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네 번째 변화가 과연 어떻게 되는지 추측해 볼 수 있어요.

 

, 이 두 분은 세 번째 단계를 넘어서 이미 네 번째 단계로 변화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그랬을 것이란 증거는 그분들에 얽힌 이야기나 하신 말씀으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해요.

 

부처님은 다른 사람이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 웃었고예수님은 원수가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내밀라고 가르쳤죠.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이야기에요.

 

혹시 누군가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었거나 혹은 원수는 커녕 친구가 뺨을 때렸더라도 그것을 그냥 넘길 수 있으세요? 불가능하죠. 침의 더러움이나 뺨이 아픈 것은 고사하고 무시를 받았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당신은 화를 참을 수가 없게 돼요. 그런데 이 두 분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그 분들의 내부에 있던 자아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서 그래요.

 

이해하기 어려우신가요? 잘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이 무시를 받아서 화가 나는 이유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에요. 즉, 자아의 역할이죠. 하지만 자아와 자신이 완전히 분리되고 결국 자아가 소멸하게 되면 어떤 감정적 흔들림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네, 맞아요. 극도로 이루기 힘든 일이지만, 두 분은 그것을 이뤄낸 분들인 것이죠.

  

그리고 이 두 분들이 이뤄낸 단계가 바로 인간의 네 번째 정의인 '사랑' 이에요. 즉, '나 = 사랑으로 가득찬 존재' 의 단계죠. 그리고 이 단계가 바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 두 분이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인간의 정의는 생존에서 자아로, 자아에서 행복으로, 결국 행복에서 사랑으로 변한 것이죠. 그리고 이 사랑은 '자아' 가 없는, 즉 생존을 위해서 관계를 맺고 서로 이득을 주고 받는 계산법이 빠진 사랑이에요.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적 사랑이라고도 하죠.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단계에요. 그러니 안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어요.

 

단지, 인간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잊지 마세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죠.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해주고, 건강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에요.

 

하지만 이 신은 바로 '자아' 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신이죠. 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이득을 거래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상대적일 수 밖에 없어요. 누군가 시험에 붙으려면 누군가는 떨어져야 해요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돈을 잃어야 해요.

 

인간이 본능으로 정의되던 시절, 신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존재로 정의되었어요. 이 세상을 만들고 유지시켜주며 당신을 보호해주는 존재였어요. 그리고 인간이 자아로 정의되던 시절, 신은 당신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는 존재이며, 당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가 되었죠.

 

하지만 세상을 만들고, 당신을 보호해주고, 당신에게 복을 주며,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신은 모두 본능과 자아가 가진 근원적 두려움이 만들어 낸 신이에요. 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어야 해요.

 


이것은 결코 신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신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말이죠신은 결코 기복을 비는 대상이 아닌, 오직 사랑의 대상이어야 해요.

 

그래서 만약 당신이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믿는 어떤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당신이 현재 알고 있는, 자아가 믿는 신에 대한 이해를 모두 날려 버려야 해요.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은 진정한 신의 의미와 신이 가르쳐준 사랑과 자비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에요. 그리고 당신 역시도 그런 신의 뜻에 따라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죠. 이것이 바로 신을 믿는다는 말이 가진 의미여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역시 날려 버리세요. 당신이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간다고 여기고 있는 그 신은 인간들의 자아가 만들어 낸 신이에요. 그것은 원래부터 잘못된 믿음이죠.


그리고 당신이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지 마세요. 당신을 오직 사랑으로 가득찬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세요.

 

만약 당신이 인간의 세 번째 정의, 행복한 인간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면, 이런 설명들은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아직도 두 번째 정의, 자아가 주는 행복에 갇혀 있다면,  설명은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는 신에 대한 불경한 태도이며,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현혹하는 만드는 황당한 궤변이라고 여길 것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여부는 오직 당신의 선택이에요.

 

, 여기까지 해서 이제 모든 설명이 끝났어요.

 

이제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당신만의 답을 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었어요. 그러길 희망해요.

 

긴 강의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