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씨의 인문학개론

19강, 그 모든 것들의 시작 - 2부

아이루다 2017. 3. 1. 08:04


[1부에서 이어짐]

 

여기까지 이해를 하고 나서 지금부터는 중요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죠.

 

첫 번째 질문은, '상태 판단을 위한 경쟁과 비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에 대한 것이에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순위를 매기는 아주 흔히 쓰는 방법이 바로 학교에서 보는 시험이에요. 그런데 시험의 원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어요. 시험은 원래 학생들의 학습 진도 상황을 파악하는 목적이었죠. 뒤쳐진 과목이 없는지, 어떤 과목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순위를 매기면서 뭔가 목적이 바뀌어 버렸어요. 그 목적이 상태 파악이 아니라 경쟁 유발이 된 것이죠.

 

순위는 좀 더 자세한 비교를 위해서는 필요하긴 하죠. 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요? 다리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 볼 때 그 사람이 100M 를 몇 초에 뛰는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까요? 그냥 달릴 수 있으면 되는데?

 

물론 경쟁을 시키고 비교를 하면 잘난 순서가 정해지고 각자는 그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켜요. 왜냐하면 자아는 심각하게 겁쟁이거든요.

 

겁쟁이 자아는 최대한의 안정함을 원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해요. 사람들이 끝없이 돈을 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요.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에서 적당히 만족할 줄을 몰라요.

 

원래 시험을 본 후 통과, 실패만 정해진다면 별 일 아닌 것이, 성적을 매겨서 1등부터 꼴등까지 순서가 정해지면 1등이 되지 못한 모든 자아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게 돼요.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자아는 엄청난 압박을 받는 것이죠.

 

원래 시험은 학생들이 자신이 잘하고 있거나 못하는 과목을 인식할 수 있는 용도였어야 했어요그것을 알아야 무엇에 재능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다면 노력해서 보강할 수 있죠하지만 순위를 매김으로써 자아가 가진 두려움이 크게 자극되고, 그 커진 두려움은 연쇄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켜요.

 

그것이 바로 질투, 열등감, 상처 등등 지금까지 다뤘던 많은 나쁜 감정들이에요. 그런데 잘 생각해봐요. 이것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요? 단지 걸을 수 있기만 하면 되는데 아주 잘 달려야 할까요?

 

 

걷기만 하면 모두 걸을 수 있는데, 잘 달려야 하면 잘 달리는 아이와 못 달리는 아이가 생겨나게 되죠.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만의 장점이 있어요. 당연히 단점도 있죠. 그런데 그것과 상관없이 모든 분야를 경쟁시키고 순위를 매겨서 늘 겁이 많은 자아를 더욱 더 두렵게 만들고 있어요. 그러니 자아가 상처를 받고, 힘들고, 좌절을 하고, 열등감에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해요. 피해의식이 생겨나고 끝없이 상황을 확대해석 해요.

 

물론 불필요하게 자극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심하게 두려움을 느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두려워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1등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좋은 말로 노력이지 사실은 두려움에 의한 집착이죠더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나요그것이 바로 자부심과 우월감이에요그들은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혀를 차죠.

 

결국 자신보다 앞 선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고 자신보다 뒤쳐진 사람을 보면 한심하게 여기거나 동정이나 혐오를 느끼는 것이죠. 평생을 그러면서 살아요. 직장 이름, 번 돈, 졸업한 학교, 살고 있는 지역 등등으로 사람을 평가하려고 하죠.

 

이것이 노력한 사람의 결말이에요. 당연히 노력에는 시간과 돈이 들어갔을 것이고, 그러니 가치가 생겼죠. 가치가 생기면 그것을 근거로 사람을 평가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에요.

 

그럼 노력하지 않은 대다수는 괜찮을까요? 아니에요. 그들은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포기하지는 않아요. 왜냐고요? 자신도 잘하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러니 그것에 집착해요. 그리고 거기에서 가치를 만들어요. 그래서 사실 노력을 하든 안 하든 둘의 결론은 비슷해요.

 

못하는 것을 노력해서 극복하는 것이나 잘하는 것을 더욱 더 노력해서 더 잘하게 되는 것이나 결론은 똑같아요. 모두 가치를 만들어 내며모두 집착이에요. 그럼에도 후자가 나아요.  결과도 좋고요. 그래서 잘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행복하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버려진다는 것은 그토록 두려운 일일까?' 에 관한 것이에요.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어해요. 사람들이 당신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말해주길 바라죠. 친구들 사이에서도,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대체 불가능하며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길 바래요. , 그럴 수도 있죠.

 

이 특징이 바로 요즘 사람들이 SNS를 그렇게 많이 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그것을 관심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관심 역시도 버려짐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요. , 관심을 많이 받는다는 뜻은 버려질 가능성이 낮다는 뜻인 것이죠. 그러니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 그토록 목을 메는 것입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도, 크게 성공한 사람도, 인류사적 업적을 남긴 사람도, 한 나라의 대통령도, 큰 기업의 사장도 그래요.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단지 크게 성공을 하면 남들이 알아서 관심을 가져주기 때문에 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에요.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을까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서?

 

아니죠. 그것의 본질은 바로 무리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에요. 홀로 되지 않기 위해서죠버려짐은 생존에 있어서 치명적 단점이거든요. 그것은 바로 외로움의 근원이거든요. 진정한 두려움이죠.

 


그런데 이것 역시도 잘 생각해 봐야 해요. 버려진다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그토록 절실한 문제일까요? 혼자 사는 것이, 홀로 지내는 것이 그토록 치명적으로 생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에요. 세상은 많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동물떼가 아니에요. 같이 살면 좋지만, 꼭 같이 살 필요만은 없어요현대는 유행보다는 개성이 더 중요한 시대에요

 

그리고 SNS에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정말로 버려짐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그런 것은 거의 도움이 안돼요. 당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가족이죠. 결코 SNS 속에서 당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SNS 속의 사람들은 당신이 잘 살고 있을 때만 필요해요.

 

, 이제는 세 번째 질문을 해보죠. 그것은 바로 '그렇다면 자아는 그대로 둬도 괜찮은 것인가?' 에요. 그리고 이 질문이 이번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아는 당신 그 자체이죠. 하지만 자아는 불필요한 두려움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요. 특히 자아가 가진 두 가지 두려움, 즉 뒤쳐짐과 버려짐의 두려움은 너무 과도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왜냐고요? 왜냐하면 이것이 거의 본능화 되었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아주 오래 전 약하고 힘없던 인류의 조상이 무리를 지어 살게 되면서 가지게 된 두려움이에요. 무리에서 뒤쳐지면 죽고, 무리로부터 추방당하면 죽었던 그 시대부터 생겨난 두려움이죠.

 

그래서 문명이 잘 발달된 현대에서 이 두려움은 그다지 의미 있지 않아요. 물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하고, 관계 속에서는 패자보다는 승자가 되는 것이 좋겠죠. 더군다나 관계에서 쫓겨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죠. 하지만 패자가 되거나 쫓겨난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덜 행복할 뿐이죠.

 

하지만 자아는 그런 상태에 놓이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요. , 엄청나게 확대 해석을 한 후에 도움도 안되고 필요도 없는 나쁜 감정들을 마구 만들어 내고 말죠.

 

부럽고 말아야 하는데 질투를 느끼고, 살짝 기분이 나쁘고 말아야 하는데 상처를 입어요. 조금 손해 본 것뿐인데 엄청난 손해를 입은 것처럼 확대 해석하고, 결코 해결이 안 되는 것임에도 포기를 못하고 집착을 해요.

 

그 모든 것이 당신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요. 결국 단지 행복하지 않은 것뿐인데 자아의 판단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불행해지고 말아요.

 

자아는 원래 행복을 원했어요. 그런데 자아가 가진 두려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오히려 불행해지고 말았어요. 더군다나 이것은 사실상 진짜 불행도 아니에요.

 

돈을 원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냥 말아야 했어요. 하지만 돈이 없으면 불행해져요. 무엇인가 욕망을 느끼면 그것을 못하더라도 그냥 말아야 했어요. 하지만 그것을 못하는 자신을 비참하다고 여겨요.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스스로를 비난해요.

 

이것이 바로 자아가 가진 확대 해석된 두려움이에요.

 

그래요. 세 번째 질문의 답은 바로 이것이에요. 자아가 가진 두려움은 대부분 해결된 것들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당신과 일체화 시켜서는 안돼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세요?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빨간 색으로 밑줄 쫙~

 


자아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 역시도 자아가 아닙니다. 이것은 분리되어야 해요.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답으로 '자아' 혹은 '에고라고 했다면 그것은 결코 답이 아니에요. 이것은 명백한 오답이에요.

 

물론 자아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주체이기도 해요. 잘나면 행복하고, 인정 받으면 행복하니까요. 그렇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불행해질 필요는 없어요. 그냥 행복하지 않아야 해요그 시점에서 제대로 분리가 일어나야 해요.

 

당신은 그저 행복해지지 못한 것 뿐이죠. 결코 불행한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잘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당신이 죽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결론이에요. 아주 오래 전 과거에나 맞는 결론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당신의 자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어요. 그럼에도 완벽한 분리를 하지는 못해도 당신과 당신의 자아 사이에 작은 틈을 만드는 것은 가능해요그것을 어떻게 하냐고요?

 

거기엔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어요. 그것은 당신 자신을 꾸준히 바라보는 것이에요. 매일 잘나길 원하고, 매일 인정받길 원하는 당신의 모습을 스스로 바라보세요.

 

도대체 왜 그러고 있는지 다른 사람을 바라 보듯이 바라보세요.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가끔 황당하기도 할 것이에요.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기도 할 것이고요.

 

하지만 당신 역시도 그래요. 그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니 그 모습 뒤에 숨겨진 아주 오래되어 이제는 본능에 가까운 자아의 두려움을 바라 보세요.

 

당신이 매일 사람들과 만나서 하는 이야기나 혹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 보세요. 모두 자신의 자아를 좋게 평가하는 일이나 혹은 자신의 자아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를 말할 뿐이에요. 사람들은 자기 자랑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기에 모두들 아주 조심스럽게 돌려서 말하기 때문에 알아 차리기가 쉽지 않을 뿐이죠.

 

그리고 또 하나 '자아 실현' 이나 '자아 성취' 등의 말은 모두 처음부터 자아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란 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해요. 자아는 오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자아가 당신이 아님을 스스로 받아들여야 해요.

 

그런데 이런 결론이 나면 또 다시 이 질문의 답이 궁금해지네요.

 

'자아가 내가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미안해요. 오늘도 그 답을 제대로 내지 못했네요. 이 질문의 답은 마지막 20강에서 다루도록 할게요.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