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씨의 인문학개론

18강, 죽음 이해하기

아이루다 2017. 2. 26. 12:39

 

흐음, 철학을 하는 고양이, 빙고에요.

 

오늘 강의 시간에서는 지난 시간 끝에 잠깐 다뤘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갈게요.

 

그리고 그 전에 잠시 왜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할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보기로 하죠.

 

저는 지난 강의들에서 많은 것들의 원인으로 두려움을 말해왔어요. 그런데 그런 두려움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해서 생겨날까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바로 고통이죠. 사람들은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해요. 아픈 것이 싫은 이유죠. 그리고 고통은 바로 죽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요. 그래서 죽음은 두려움의 가장 근원적 원인이에요. 죽음이 있기에 고통이 존재하고, 고통이 있기에 두려움이 생기며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원하던 행복이 생겨나죠.

 

그리고 바로 전 시간에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어요. 그것은 바로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가치 있어지고, 그런 가치가 있기에 행복이 생겨난다는 것을요.

 

이것은 죽음이 있기에 배고픔의 고통이 생겨나고, 배부름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또한 죽음이 있기에 누군가의 자기 희생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점도 말해주죠.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행복으로 연결 되죠.

 

어떤 경로를 통해 얻어졌던 간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원인이 되는 죽음 그 자체가 행복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행복을 이해하고, 행복을 이해함으로써 삶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 이유로 인해서 당신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히려 죽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행 학습이에요. 그리고 삶을 이해할 때 당신은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죠. 삶은 죽음의 반대인데, 죽음을 이해해야 삶을 이해할 수 있다니 말이에요. 하지만 사실 이것은 결코 아이러니한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바로 이런 원리로 구성되어 있어요.

 

선과 악은 서로 반대말이죠.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악이 없다면 선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선이 없다면 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잘 생각해보세요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선과 악은 반드시 한 쌍이어야 해요. 수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 악당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악당이 없으면 선한 주인공도 존재할 수 없죠. 악은 선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혹시 한없이 착한 사람과 같이 살아보신 적이 있나요? 좋을 것 같죠? 하지만 가끔 당신은 그 사람의 선함으로 인해서 피해를 받게 될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의 선함은 당신의 숨겨진 악함을 드러나게 만들 테니까요. 선한 남자는 악처를 만듭니다.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하죠. 그리고 이 빛 역시도 어둠이 있기에 빛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온통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면 그것을 어떤 명칭으로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둠 역시도 빛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언제나 낮만 계속된다면 낮이란 개념도 사라집니다. 낮은 밤이 있기에 생겨난 개념이죠낮이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밤이 필요하고밤 역시도 낮이 있음으로써 그 가치를 가질 수 있어요.

 

아래가 있으니 위가 있고, 좌가 있으니 우가 있어요. 여자가 있으니 남자가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하는 사람이 있죠. 이기적으로 구니까 이타적인 것이 의미를 갖고, 비겁함이 있으니 용기가 있고불행이 있으니 행복이 존재할 수 있죠. 이런 것에는 만남과 헤어짐, 태어남과 죽음, 배신과 신뢰 등등 너무도 많죠.

 

이런 것들은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혹시라도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한쪽도 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이 둘은 정말로 나눠서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삶과 죽음, 선과 악, 낮과 밤, 밝음과 어둠비겁과 용기, 이기적이 것과 이타적인 것, 불행과 행복, 만남과 헤어짐, 태어남과 죽음, 배신과 신뢰를 서로 나누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다소 황당한 질문 같지만, 이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해요.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어둠은 어두운 것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죠. , 어둠의 정의는 빛의 부재입니다. 그렇다면 어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지금 그림자를 떠올려보세요. 그림자는 어둠입니다. 빛이 무엇인가에 막힌 형상이죠. 그렇다면 그림자는 실체일까요? 아니면 빛이 없는 부분일까요?

 

불행은 무엇일까요? 불행은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죠. , 불행은 행복의 부재입니다. 그렇다며 불행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같은 원리로 헤어짐은 만남의 부재, 비겁함은 용기의 부재, 배신은 신뢰의 부재이죠.

 

그렇다면 죽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죽음은 삶이 끝난 것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삶이 끝난 상태죠. , 죽음은 삶의 부재입니다. 그러면 죽음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럴 듯 하면서도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좀 찜찜한 그리고 말장난 같은 표현이에요. 그럼에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그런 말이기도 하죠.

 

사실 이해하기 좀 어려운 내용이긴 합니다만, 이것에 대해서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죽음에 대한 당신이 가졌던 가장 근본적인 생각 자체를 바꿔 놓을 수도 있는 설명입니다.

 

당신은 확실하게 당신의 죽음의 주체이지만, 당신은 당신의 죽음의 순간을 경험할 수 없고 또한 죽음 후의 세상을 경험할 수 없는 존재 중 하나죠. 왜냐하면 죽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죽었으니까요.

 

당신이 죽는 사건, 그러니까 당신이 태어난 사건과 함께 당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 중 하나인 죽음은 당신에게 경험되지 못해요. 또한 당신은 당신이 죽은 후를 경험하지도 못하죠.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에요죽음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물론 당연히 죽음은 존재하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다가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경험이 아닌 지식입니다. 책으로 읽은 것과 같죠. 사랑을 책으로 배우고 나면 사랑이 존재함을 알 수는 있죠.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경험해야 합니다. 문제는 죽음은 사랑과 달리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죠.

 

알고는 있지만 경험이 불가능한 어떤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죠. 죽음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런 접근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죽음이 진짜로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인지에 대해서 조금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해야 할 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길 수 있을 것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명확히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에요. 단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당신이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바로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당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에요. 무엇보다도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 전환이죠. 과거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에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처럼 그런 것이죠.

 

이 사고의 전환 덕분에 당신은 죽음을 지금까지 아는 죽음 하고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기회가 있어요. 또한 그로 인해서 당신의 삶 역시도 기존의 알아왔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이해가 가능하죠.

 

그런데 죽음의 실체성을 살펴보다가 보면 인간 사회에서 많이 알려진 흥미로운 가정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무엇이냐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혹시 떠올랐나요? , 그렇지 않아도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후 세계, 즉 천국과 지옥 그리고 영생에 대한 가정입니다.

 

일단 지금 시점에서 저는 천국과 지옥, 즉 사후 세계가 존재하느냐 않느냐를 가지고 논쟁할 생각은 없어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진정한 의미의 불가지론이죠. 또한 사후 세계의 존재 여부가 신의 존재 여부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도 잊지 말아주세요. 다음 강의때 또 다시 설명하겠지만, 그 두 가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를 해왔던 삶에 대한 많은 이해들을 흔히 알려진 사후 세계와 연결시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돼요. 사실상 모든 것이 다 뒤죽박죽 되고 말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하죠. 하지만 많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요.

 

사후 세계, 즉 영혼의 세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현재 살고 있는 삶의 주체, 즉 당신이란 존재의 연장을 의미해요. 원래 죽으면 사라져야 할 당신은 사후 세계를 통해서 계속 살아갈 수 있죠. 더군다나 그것은 끝도 없는 무한대의 삶, 즉 영생이에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해요. 이것은 또한 두 가지 행복을 발생시키는 이유이기도 하죠.

 

첫 번째는 고통의 두려움이죠. 사람의 몸에 상처가 생기면 상황에 따라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오죠. 심지어 어떤 고통은 삶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어요.

 

그런데 고통은 삶을 살기 위해서 생겨나요. 만약 고통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칼이 찔린 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게 돼요그러면 죽죠. 고통이 느껴져야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요. 그래서 치료를 하죠. 또한 그런 고통의 기억은 무엇인가를 조심하고 무모한 일을 하지 않도록 막아줘요. 물에 빠져 고통을 겪어보면 그 후로는 물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죠.

 

고통은 그래서 삶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사람들은 고통으로 인해 최초의 두려움을 갖게 되죠.

 


두 번째 두려움은 바로 존재의 소멸에 대한 것이에요. 그것은 바로 삶을 살고, 감정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며,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내고가족을 사랑하고 사랑 받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정을 받는 그래서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당신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이것은 고통만큼 현실적인 두려움은 아니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이 죽기 싫은 이유는 이것일 정도로 깊은 두려움을 갖게 해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없어진 세상,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요?

 

신체적 고통은 죽음을 막는 1차 관문이죠. 뭔가를 조심하게 만드니까요. 안전함을 위해 노력하게 만들죠.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죽음 자체를 막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결국 죽음이 찾아오죠. 그런데 그때가 되면  참을 수 없는 소멸의 두려움이 밀려와요.

 

그런데 신체의 소멸은 막지 못해도 존재의 소멸은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그것이 바로 영혼 그리고 사후 세계의 존재에요.

 

사후 세계는 존재의 소멸이 아닌, 존재의 영속성을 보장해주죠.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그리고 얼마나 원하던 것인가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겨나요.

 

보통 사후 세계는 보통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있다고 해요. 뭐 나눠있지 않더라도 지옥보다는 천국의 형태가 더 낫겠죠? 그리고 천국과 지옥은 현생의 삶을 판결해서 결정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 어떤 원리로 그것이 결정될지 알 수도 없지만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지옥과 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그 모습을 상상하다가 보면 생각보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요.

 

, 그럼 천국과 지옥을 각각 상상해 보도록 하죠.

 

지옥은 쉽게 상상할 수 있어요. 유황불이 불타고 매일 고통스러운 고문이 반복 돼요. 사람들이 가진 신체적 두려움이 지배하는 곳이죠. 이곳에서는 영원히 고통 받기 때문에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진정한 지옥인 셈이죠. 거기엔 아무런 희망도 없으니까요.

 

지옥을 설명하고 지옥을 표현하는 것은 꽤나 쉬워요. 그래서 많은 영화나 소설 등에서 지옥은 자주 설명 돼요. 그것은 어둡고, 불에 타고, 배가 고프고, 영원한 절망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곳이죠. 듣기만 해도 금세 공감이 돼요.

 

그런데 반대로 천국을 생각해보죠. 당신은 지옥보다는 천국을 가길 바랄 것이니, 당신이 천국에 갔다고 상상해봐요.

 

과연 무엇을 상상하실 수 있나요?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 껏 먹고, 보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보고,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고, 가고 싶은 여행을 마음대로 다니고, 아는 사람들과 모여서 수다를 떨고, 심지어 마음껏 섹스를 하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정 해보죠.

 

우리는 지금까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웠어요. 그래서 행복의 근원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도 배웠죠. 행복은 고통, 즉 두려움을 통해서 생겨난다는 것도 배웠어요.

 

그런데 천국엔 죽음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고통도 없어요. 그렇다면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는 삶에서 과연 행복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영원한 삶이에요. 1만년 정도는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사실 10년만 되도 지겨워질 것 같긴 한데, 이 우주가 넓으니 그 정도 시간을 잡죠. 그러면 10만년 후에, 1조년 후에 어떨까요?

 

그때도 맛난 것을 먹으면 행복하고, 사람들과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이 행복할까요?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아는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동화 속 이야기들이 왕자와 결혼하고 끝나는 이유에요. 그들은 하나같이 많은 고생을 한 후 행복을 얻죠. 그들은 그때 가치의 행복을 얻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 후로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매일 파티를 하면서?

 

그 후의 삶은 가치가 없이 재미로만 사는 삶을 의미해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죠. 하지만 가치가 없는 삶은 결국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치는 인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고, 그 의미는 사는 이유를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재미로만 사는 삶은 언젠가는 지루하고 권태를 느낄 수 밖에 없답니다.

 

결국 가치가 없다는 것은 사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사는 이유가 없는 삶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무한한 영생인데 말이죠.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죠?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바로 사후 세계에서 존재하게 될 사람들의 영혼은 현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존재가 되는 방법이에요. , 현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게 사는 존재인 것이죠.

 

예를 들면 마약을 하는 것처럼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행복하다든가 혹은 매일 기억이 초기화 되어서 늘 새롭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것 같은 것이요. 하지만 전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상상조차도 뻔한 것이죠. 그것은 전혀 다른 형태의 어떤 것일 거에요.

 

아무튼 이것은 참 좋은 것이에요. 단지 문제가 하나 있어요.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서 고통과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행복을 추구했어요. 그럼으로써 다양한 의미와 가치도 생겼고 소중한 것들도 생겼어요. 그런데 만약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복할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현재의 삶에서 만들어진 모든 의미와 가치 그리고 소중한 것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렇다면 그 존재는 계속 당신일까요?

 

이름은 같을 수 있지만, 그 존재가 당신의 연장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심각하죠. 기억은 유지되나 당신이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감하는 존재가 될 테니까요. 그것은 마치 당신의 기억을 컴퓨터 속에 기록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일 수 있어요. 당신의 기억을 옮겼다고 해서 컴퓨터가 당신이 되진 못하죠.

 

이런 식으로 당신의 연속성이 깨지면 결국 현재의 삶을 살았던 당신은 소멸한 꼴이 되고 말아요. 당신은 비록 계속 존재하긴 하지만 더 이상 당신이 알고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닌 셈이죠.

 

그러면 죽음이 가진 두 가지 두려움 중 하나인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생길 수 밖에 없어요.

 

이것이 바로 사후 세계가 가진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지금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 하지 않는다고 판별하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그것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세계는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이해하시겠죠?

 

정리하면, 당신이란 존재는 사후 세계의 존재와 상관없이 죽음을 통해 반드시 소멸하게 돼요. 설령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윤회론을 받아들여도 마찬가지에요. 전생의 어떤 기억도 없는 당신은 전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전생을 다룬 작품들에서는 그것의 인연을 기억하는 오래된 존재들이 나오곤 하죠. 그래야 그 가치가 유지되니까요.

 

죽음이 가진 두려움 중에서 신체적인 부분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어요오래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고요그런데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정말로 계속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그 어떤 해결책도 없고, 더군다나 이것은 실체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저 머리 속의 생각이죠.

 

당신이 죽은 후에는 본인이 죽음을 알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을 경험할 존재 자체가 이미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죽음이 끝이든, 영혼으로 사후 세계에 가 있든, 윤회를 해서 새로 태어나든 말이에요.

 

이 비 실체적이고 해결 방법도 없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채 평생 동안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생각과 행동일까요?

 

신체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어요. 아프고, 아프면 죽으니까요. 하지만 존재의 소멸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사후 세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계속 연장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행동이지 않을까요?

 

이것을 제대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이에요.

 

죽음이 진짜로 존재하는 실체인지에 대한 의문, 왜 존재의 소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 이 두 가지가 죽음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길을 열어 줄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거의 최종 마무리 단계에 도달하고 있는 중이에요.

 

이제는 이 모든 것의 주체, 즉 행복 하려고 하고, 다양한 감정적 경험을 하고, 외로움을 느끼며, 피해의식과 확대해석을 하고, 상처를 받으며,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존재의 소멸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있는 그 존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할 때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 존재를 알고 이해하게 됨으로써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결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엔 그 존재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죠.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