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의 함정, 그것으로부터 탈출

아이루다 2016. 8. 1. 09:57

 

흔히 함정이라고 하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늪에 빠진 것이나 혹은 커다란 곰 덫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혹은 영화 '스팅' 속 이야기처럼 누군가 잘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서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조차 모른 채 지나갈지도 모르는 것이 상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럴만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는 늪 근처에 갈 일도, 곰 덫이 설치된 장소에 갈 일도, 특별히 원한진 적이 없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파 놓은 함정에 빠질 일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평생 함정에 빠질 일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함정에 빠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져 있는지, 아니 함정에 빠져있다는 사실 조차도 자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이 경계가 아닌, 사실은 함정의 테두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잦은 가정 폭력에 노출되고도 그것을 끊어 낼 방법을 강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확실히 함정에 빠져 있다.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거나 해야 하는데, 그 둘 모두를 못한 채 겨우 겨우 살아간다.

 

바람을 피우거나, 큰 빚을 지는 등, 배우자가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는 행위를 한 것을 알고도 그것에 대해 적절한 해결책을 내 놓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용서를 하든, 아예 갈라서든 해야 하는데, 그 둘 모두를 못한 채 그 안에서 괴로워하면서 살아간다.

 

직장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딘가 다른 직장으로 이직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매일 힘들게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는 함정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뿐, 아주 다양한 형태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실상 결정 불능의 상황이 바로 모두 함정에 빠진 공통된 증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늪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기다리지도 못한다. 우리는 그저 끝없이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탈진해서 정신을 잃고 죽게 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사는 삶에서 빠질 수 있는 함정은 그런 무서운 늪은 아니라는 점이다. 늪은 실제로 함정이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함정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덫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 덫 자체를 스스로 파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하다. 사실 준비 과정이 필요가 없다면, 누가 함정을 빠져 나오기가 어렵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니 준비가 필요함은 인정하는 게 맞다.

 

가장 첫 번째로 알아야 할 점은, 자신이 함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함정에 빠져 있는 이유는 폭력을 쓰는 누군가도, 바람을 피운 누군가도, 직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잘못으로 야기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잘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없이 외부적 상황에 핑계를 댄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우리는 그 함정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함정에 오랫동안 빠져있음으로써 이미 충분한 자신만의 합리화를 만들어 냈다.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그 폭력을 쓰는 사람이 보통 때는 잘해준다고 말한다. 착한 사람인데, 술만 먹으면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주일에 일곱 번 술을 먹는다. 그럼에도 잘해줄 때는 잘해주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함정을 변호한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 것을 대한 사람들도 비슷하다. 어떤 이유 때문에 같이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자의 경우엔 보통 아이를 내세운다.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부부의 신뢰조차 없는 사람이 아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키워 줄 사람이 없기에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 아이를 키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냥 받아들이고 살면 된다. 여자든 남자든 상대가 바람을 피우건 말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같이 살면 된다. 아이를 키운다는 목적만으로 살면 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함정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마음 속에 돌덩이를 얹고 사는 것처럼 묵직하다.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함정에 빠져 있는 증상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해야 한다. 삶은 한 번만 살 수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불행함을 견딜 것인가?

 

직장의 함정에 빠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딱히 갈 곳이 없다면 그냥 그 직장에 최대한 만족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끝없이 자신은 다른 곳을 찾아서 갈 것이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주변 다른 동료들에게 신뢰만 잃을 것이다. 곧 떠날 사람에게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니 마음 먹고 떠나든지 아니면 남기로 결정하고 열심히 일하든지 해야 한다. 하지만 매일 자신이 어딘가를 떠날 수 있다고 합리화를 한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음을 스스로 용서한다. 하지만 남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남들은 합리화에 공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회사 생활은 더욱 더 나빠진다.

 

두 번째로 알아야 할 점은 심리학적 현상으로, '확증편향' 이란 증상을 이해하는 일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사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하다.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함정에 빠졌음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함정을 함정으로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함정을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로 본다.

 

어떤 마을의 외곽에 커다랗게 쳐진 울타리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외부의 적을 막아주는 역할이다. 또 다른 역할을 내부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모든 울타리에는 문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외부의 적을 막는 역할로 인식하느냐, 내부의 사람이 밖으로 나갈 자유를 뺏는 역할로 인식하느냐는 개개인의 몫에 달렸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어떤 식으로 인식했냐 에 따라서 서로 완전히 다른 확신의 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점이다. 즉, 각자 믿는 대로 울타리는 보호의 역할이나 자유를 억제하는 역할로써 각자가 확신에 차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찾아봐도, 이 두 입장은 각자의 입장에 대한 확고한 근거만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보호의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은 안정의 가치에 대한 글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주장을 할 것이고,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가치에 대한 글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주장할 것이다.

 

이 둘은 분명히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의 가치를 선택한 사람에게는 그 가치만이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바로 확증편향의 흔한 예가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는 그것을 잘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우리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매우 희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탈출해서 새 삶을 살고 싶지만, 그 사람 눈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가 탈출한 사람들 중에서 후에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이야기만 쳐다본다. 혹은 보복 살인을 당해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만 골라서 본다.

 

그러니 점점 더 탈출할 용기가 없어진다. 그리고도 혹은 오랫동안 견뎠더니 결국 폭력을 행했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용서를 구했다는 아주 희귀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를 보면서 그것에 깊게 공감한다. 자신에게도 그런 행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어한다.

 

배우자의 바람도 비슷하다. 이혼을 한 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본다. 편 부모 밑에서 잘못되고 어긋난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만 본다. 혼자서 잘 키운 사례들도 많지만, 혼자서 잘 못 키운 사례만 본다. 이것도 확증편향의 증상이다.

 

이혼을 하고 난 후, 자신과 자신의 자식이 잘못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지만, 그 판단 근거 자체가 이미 편향되어 있으니 제대로 된 결론일 수는 없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어딘가로 옮기고 싶다가도, 주변에 직장을 잘못 옮겨서 후회가 심한 사람들 이야기만을 듣는다. 사실 자신이 옮기기가 두려우니 그런 사례만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제안이 와도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제안을 준 회사는 뭔가 문제가 있는 회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떠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못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안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기 싫다면 그것을 실패한 사례만 보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것이 무엇이든 성공한 사례만 보는 사람은 휘발류 통을 들고 불덩이로 들어가도 말릴 방법이 없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확신은 좋은 점이 있다. 확신이란 말 자체가 가진 의미는,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다.

 

우리가 매일 반복적으로 같은 길을 걸을 때 편안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길 주변의 거의 대부분의 정보를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디가 위험한지, 어디가 조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안전하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하지만 낯선 길은 다르다. 그냥 길 자체는 비슷한 길이지만, 익숙함과 낯섦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경계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그러니 편안하지 않다.

 

어떤 생각이나 사상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갈등의 상황이나 무엇이 옳은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때, 우리는 신경이 곤두선다. 마음이 쓰이고 그래서 불편함을 느낀다. 그래서 어서 갈등이 없어지고 무엇인가 확실해지기를 바란다.

 

확신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아무리 누추해도 오랫동안 살아 온 집이 제일 편한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확신은 분명히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미 말했던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증상이다. 더해서 모든 종류의 확신은 바로 익숙함을 만들어 내고 결국엔 지루함과 권태를 야기 시킨다.

 

우리가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함정에 갇힌 이유가 결코 남이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에도 그 함정이 함정이 아닌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라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함정이 함정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하고,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의 질책으로 그것이 함정이 아님을 알더라도, 금세 그것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낸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함정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도, 그 함정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누군가 만든 것이기에 결코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변명한다.

 

이런 상황이니 어떻게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어떤 함정에 빠져 있을까? 만약 없다고 해도 정말로 없는 것일까? 혹은 인식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합리화를 해서 빠져나올 필요 자체가 없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알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함정이 가장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함정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알 방법이 있다. 그것도 생각보다 쉽다. 단지 우리는 그 방법을 통해서도 그것이 함정으로 인해서 그런 것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만약 어떤 함정에 빠졌다면, 나타나는 증상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각자의 불행함이다. 즉,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함정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스스로 빠져 나올 능력이 되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렇다.

 

물론 삶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함정에는 실제로 늪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거나, 큰 빚을 졌거나, 더 이상 일할 회사를 찾지 못하거나, 큰 죄를 저질렀거나 하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것조차도 빠져나올 수는 있다. 단지 정말로 많이 어려울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심각한 함정에 빠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들 대부분이 빠진 함정은 사실 적당히 노력만 하면 충분히 빠져나올 정도이다.

 

어떤 경우엔 그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쉽게 탈출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변화이다. 어떤 식으로든 함정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 그것을 빠져나올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사실 믿음의 수준이 아니다. 정말로 가능하다.

 

우리가 현재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우리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 함정의 종류는 너무도 다양해서 다 나열하기는 불가능하다. 명예의 함정, 승진의 함정, 돈의 함정, 성공의 함정, 외모의 함정, 남들만큼의 함정, 믿는 가치의 함정 등등 우리가 욕망을 품는 그 모든 것은 다 함정의 후보가 된다.

 

그것을 함정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 아니면 단지 재수가 없어서 갖지 못한 것이라고 믿느냐는 개인의 판단 영역이다. 외부에 쳐진 울타리를 보호의 의미로 해석하느냐 자유를 억압하는 의미로 해석하느냐가 개인의 판단인 것과 같다.

 

단지 중요한 점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편이든 확신을 가지면 안 된다는 점이다. 확신은 함정을 빠져나올 수 없게 만다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확신이 심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신을 없앨 수 있을까? 이것은 어렵지만 방법은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 지속적으로 의심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익숙한 길도 마치 처음 가는 길처럼 긴장하고 신경을 날카롭게 해야 한다.

 

그래서 매일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어제 한 결정은 어제만 옳았다. 오늘 한 결정은 오늘만 옳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신념이나 믿음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확신 있는 행동은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런 태도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다. 단지 내부적으로까지 확신을 가지면 안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확실하게 믿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반대가 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확신이 가진 가장 무서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남자만이 최고의 생명체라고 믿으면, 인류의 반인 여자는 의도치 않게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생명체라고 여기면, 이 지구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무의미한 존재이거나 혹은 단지 인간의 소모품으로 여기게 된다.

 

자유를 최고의 가치라고 믿으면, 안전함의 가치는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것이 되고 만다. 안전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개인의 자유는 불필요하고 나쁜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오늘 날 좌와 우로 나뉘어서 진보와 보수가 싸우고 있는 현장이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 진영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평생 그것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모두 각자 중요하다. 물론 저울의 추가 너무 기울어서 어떤 경우엔 자신의 믿음이 더 중요한 순간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지나고 나면 그때만 옳았던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언제든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고정되지 않아야 함정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 모든 고정된 것들은 그 자리에서 썩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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