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혐오의 시대

아이루다 2016. 7. 22. 10:17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 중에서 혐오와 연민이라고 불리는 감정이 있다. 이 두 감정은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 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혐오는 보통 부정적 감정으로, 연민은 보통 긍정적 감정으로 분류가 된다.

 

하지만 전혀 달라 보이는 이 두 감정은 같은 하나의 감정의 양면이 뿐이다. 즉, 사실상 같은 감정이다.

 

더러운 거지를 보면 혐오감이 생기지만, 연민도 생긴다. 이것이 혐오냐 연민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더러운 거지의 역할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대상을 혐오로 느끼느냐, 연민으로 느끼느냐는 보통 당사자의 관대함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관대한 사람일수록 연민을 느끼고, 관대함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혐오를 느낀다. 또한 관대함은 보통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따라 결정이 된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는, 신의 사랑에 대한 추종자로써 관대함을 갖는 경우도 있다.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긴 하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 수준과 공감 능력에 따라 모두 다른 정도의 관대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행복할수록 연민을 느낄 가능성이 높고, 불행할수록 혐오감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즉, 행복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너그러워지기 때문에 연민을 느끼게 되고, 반대로 불행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팍팍해지기 때문에 혐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혐오가 극단으로 향하면 증오가 된다. 반대로 연민이 극단으로 향하면 사랑이 된다.

 

이런 식으로 양 극단으로 향한 증오와 사랑은, 뿌리는 같이 시작했지만 결국 어떤 사람의 전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이제는 같은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멀어져 버린,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감정이 되어 버리고 만다.

 

행복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회의 행복 지수를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얼마나 많은 혐오가 발행되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즉, 혐오의 수준이 낮을수록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이며, 반대로 혐오가 심화될수록 병들고 불행한 사회인 것이다. 더해서 증오의 수준을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서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갈등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고, 증오가 실제적인 범죄로 까지 이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이미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한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조차도 그렇다.

 

행복한 마을에 가면 갈등이 적고 다툼이 적다. 불행한 마을에 가면 갈등이 많고 다툼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마을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숫자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불행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크게 부풀려지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두 사람이 가볍게 부딪힐 경우, 행복한 마을은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지나가고 끝인데, 불행한 마을에서는 왜 앞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니냐고 서로를 탓하거나 결국 주먹 다툼까지 벌어진다. 심지어 살인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다 보니, 뭔가 연관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그렇다.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내용들은 갈등과 다툼 그리고 혐오스러운 소식들만 전해진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증오의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너무 혐오스러워서 극단적인 증오를 하면서 상대를 심하게 욕하고, 사람에게 벌레 ‘충’자를 붙여서 수 많은 인간 벌레들을 만들어내었다. 연민은커녕 혐오를 뛰어 넘어서도 한참 뛰어 넘었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 하기 바쁘다.

 

누군가 뭔가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더라도, 그 사람으로써는 그럴만한 근거가 10%라도 있을 것인데, 90%만의 사실을 가지고 100%로 비난을 한다. 설령 비난을 하더라도, 상대가 그럴 수 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려고 해야 하는데, 상대를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간적으로 비난하다 못해 대놓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 누구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 어디에서 우리 자신의 그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 인간은 모두 부족한 존재임에도, 우리가 남들로부터 평가 받을 땐, 모든 것을 다 잘하고, 모든 것을 다 잘 알고, 모든 것을 실수 없이 해내야 하는 존재를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우린 언제나 그 기준에서 탈락한다.

 

100을 잘하다가도 1을 잘못하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 도대체 조그만 여유도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참 각박한 세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상대의 부족함에 좀 더 관대해질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그래서 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우리 자신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혐오하기 보다는 연민을 가지고 살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우리들 모두가 그럴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우리가 지금 다들 불행하니까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불행해졌을까?

 

이 답도 너무 쉽다. 이 사회가 문제가 많아서 그렇다. 이 사회엔 너무도 많은 불평등함이 존재하고, 기득권의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는다.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타인의 가치를 함부로 짚 밟는 사람들도 너무 흔하게 보인다.

 

그 혼탁함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그리도 소중한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가지게 되고 결국 의욕 자체를 잃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피해의식을 갖고 살게 된다. 딱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피해를 입고 있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숨만 쉬는데도 피해를 입는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매일 미세 먼지를 들여 마셔야 한다.

 

그러니 행복하게 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제대로 표현하면, 행복하기 힘든 수준이 아니라 사실 불행하다. 매일 상처 입은 마음은 언제나 성질이 나 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결국 타인에 대해서 날 선 반응을 보인다. 1Km의 거리를 재는데 1mm라도 틀리면 윽박지를 태도가 되어 있다.

 

남들 것보다 조금이라도 작으면 불평등함을 조장한다고 따지려고 한다. 혹시 남들이 그것을 그냥 넘어가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조언해준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딸인 아이들에게도 거침이 없다. 경험이 부족하고 초보자들의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않는다. 사납게 몰아 붙이고 눈물 콧물을 쏙 빼놔야 기분이 풀린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냥 넘기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소중하지만, 남이 소중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러는 이유는 사회가 각박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들 개개인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 각박함에 한 손씩 거들었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것이다.

 

이것은 끊을 수 없는 연쇄 반응이다. 내가 오늘 어딘가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다른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행동한다. 갑질을 당한 사람이 어딘가에 가서 갑질을 한다. 이것은 끝없이 반복된다.

 

해결책이 없을까? 물론 쉬운 해결책이 있다. 각자 자신을 좀 더 관대하게 해질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러려면 좀 더 행복해지면 된다. 그래서 결국 쉽지만 할 수 없는 해결책이다.

 

이 문제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들 전체가 같이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그것을 공론화 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미 매일 갈등이 발생하고, 이미 매일 서로 상처 입히고, 이미 매일 피해를 입하고 피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상황은 전쟁터에서 서로 총을 쏘고 있는 것과 같다. 총을 쏘는 것을 멈추려면 동시에 멈춰야 한다. 한쪽이 먼저 멈출 수는 없다. 멈추는 순간 죽을 것이라는 공포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공포이다. 우리는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대함으로 보이면, 우리들 자신에게 큰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더 이성적으로, 더 매몰차게, 더 계산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 타인을 이해하라고 조언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적어도 그들의 상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줘야 한다. 그리고 난 후 그 조언을 해야 한다.

 

하지만 조언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결국 비난에 가까운 조언이다. 그렇게 살면 스스로 힘들어질 것이라고 경고만 하고 있다. 누구도 서로를 품어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서로 이성적으로 판단해줄 뿐이다.

 

이것은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팩트에 근거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어휘가 아니다. 사람은 따뜻하게 안아주고, 같이 울어줄 때 변화된다.

 

착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결코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온전히 감정의 존재이다. 우리는 단지 이성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유추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매일 그런 짓을 하는 이유는, 감정으로 인해 잃을 수 있는 이득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렇다. 즉, 우리는 손해보기 싫어서 이성을 이용한다.

 

그러니 누군가를 설득할 때,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는 것은 이득과 손해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이것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감정은 오직 감정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공감 능력이라고 부른다.

 

행복은 오직 감정으로만 느낄 수 있다. 이성적으로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니 백날 이성을 붙잡고 논리를 펼쳐도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리가 없다.

 

인간은 공감 할 수 있기에 인간이다. 또한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교감과 공감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열쇠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득을 위해서 관계를 맺지만, 정작 우리가 얻는 행복은 바로 교감과 공감에서 나온다.

 

혐오를 연민으로 바꾸는 힘도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인정하려면 반드시 공감이 필요하다.

 

이렇게 조금씩 혐오가 연민으로 바뀔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씩 안정되어 갈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혐오하다가 못해 증오로 가는 길을 되돌릴 수 있다.

 

사실 혐오가 판치고, 증오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사회적 약자이다. 어린 아이들, 노인들, 몸이 아픈 분들, 여자들이 바로 혐오와 증오로부터 파생되는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법은 사회 모든 영역을 지켜주지 못한다. 경찰서 조차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법원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를 지키는 힘은, 결국 사회의 건강함 밖에 없다. 자신의 아이, 자신의 부모,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면,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조금만 더 너그러워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끝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이 매일 무의식 중에 하고 있는 행위들에 대해서 자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이것을 멈출 수 있다.

 

남을 손가락질 하는 손 끝이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우리는 늘 부족하다. 그러니 끝없이 변화하는 수 밖에 없다. 고치는 수 밖에 없다.

 

무엇을 믿든지 어느 시점에 그것이 고정이 되는 순간, 폭력이 되는 것이다. 회의하지 않는 진리는 반대하는 사람들에겐 그저 어처구니 없는 똥 고집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 그런 똥 고집과 싸우면서, 정작 자신이 그 똥 고집의 일원이 되고 있음을 인지 하지 못한다. 즉, 자신의 적은 자신이다. 자신의 논리는 자신의 논리로 반박 당한다.

 

자각이 없는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결국 편견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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