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진짜인가?

아이루다 2016. 8. 4. 10:37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만약에 인간에 관한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리를 하나만 정해야 한다면, 바로 이 말이 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아이가 행복할 때,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증거는 명백하다.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과 자식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이 충돌이 나면 바로 자식을 설득한다. 혹은 강제로 막는다. 이것이 바로 부모들이 하는 일이다. 물론 좋은 의도로 한다.

 

신념을 쫓는 사람들은, 그 신념의 실현을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한다. 거짓말이다. 그 신념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신념이 실현되고 나면, 무엇인가 대가를 바란다. 그것이 명예이든, 권력이든, 역사적 기록이든 간에 말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오직 차이점은 과연 무엇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느냐이다.

 

누군가는 고행을 통해서 몸에 큰 고통을 줌으로써 행복하고, 누군가는 끝없이 남을 도움으로써 행복하다. 누군가는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믿음의 존재로써 사는 것이 행복하다.

 

여기엔 거의 예외가 없다. 거의 없다는 표현은, 예외가 있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적다.

 

그런데 이렇게나 중요한 행복은 늘 진짜일까?

 

황당한 질문이긴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실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 어처구니 없지만, 생각해 볼 만하다.

 

대부분의 행복한 사람들은 지금 현재 자신이 누리는 행복에 상당히 만족하다. 거의 절대적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자신의 배우자,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의 자녀, 자신이 가진 능력, 자신의 지인들, 자신의 외모 등등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가끔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일단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원천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실 이것이 행복이 가진 아주 중요한 속성이기도 하다. 행복이 단 하나로 획일화 되어 있다면, 이 세상은 불행한 사람이 넘쳐났을 것이다. 행복은 다양하기에 좋다.

 

또한 행복은 인생의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삶이란 문제를 풀어서 낸 최상의 결과이다. 그 답이 좋을수록 행복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답이 여러 개이다. 행복이 다양한 만큼 그 답이 인간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학문에서는 답이 여러 개인 문제는 사실상 정답이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답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정답이 될 수 있겠는가?

 

물론 행복에 대한 각자의 답은 이런 입장에서 바라봐서는 안 되는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생각을 해 볼 여지는 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두 부부가 있다. 둘 모두 각자 지극히 행복하다. 그래서 그 행복을 누구와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중 한 부부는 아이가 없다. 그래서 행복하다. 매년 해외 여행도 가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국내 여행도 다닌다. 아이를 키우지 않고 맞벌이를 하기에 시간도 넉넉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하다. 비록 아이가 없어서 노후의 외로움이 걱정되긴 하지만, 지금은 서로 너무 잘 맞아서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이 행복하다.

 

반면에 다른 한 부부는 아이가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힘들게 얻은 아이가 커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과연 이 아이가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아이 없이 살았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비록 시간도 부족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지만, 지금이 너무 좋아서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이 행복하다.

 

이 두 부부는 각자 행복하다. 둘은 아이에 관해서 전혀 다른 선택을 했지만, 그 선택 덕분에 행복하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서로 완전히 반대를 선택했음에도 그 이유로 인해서 각자 최고로 행복하다.

 

잘 생각해보자. 이 부부가 만족스러움을 얻는 배경은 과연 어디로부터 일까?

 

이 두 부부를 어느 날 서로 바꿔보자. 바뀌었다는 것도 모르게 각자의 기억을 리셋시키고, 반대의 상황에 놓아보자. 그렇다면 이 두 부부는 어떤 말을 할까?


아마도 아이가 없던 부모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것이고, 아이가 있던 부모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부들이 각자 현재 상태에서 자신의 행복에 만족하고 그것을 누구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완전히 반대가 되었음에도 그들의 행복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즉,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 할 것이라고 믿어졌던 그 조건의 의미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히치콕 감독의 유명한 영화 중 '싸이코' 라는 영화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모텔을 경영하던 남자는 자신과 자신의 엄마의 인격을 모두 가진, 일종의 이중 인격자로 나온다. 이중 인격이라고 표현하니 좀 이상하긴 한데, 아마도 제대로 된 용어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일 것이다.

 

한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분리된 여러 인격이 나타나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 사례는 실제로 꽤나 자주 보고 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도 정신 분석학계에서 명확하게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으로도 꽤나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한 사람의 몸에 여러 인격이 있다는 말은, 한 사람이 느끼는 행복의 종류는 여러 가지라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소극적인 인격은 집에서 노는 것이 행복하고, 적극적인 인격은 밖에서 남과 어울리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럴 경우 이 사람에게 행복이란 도대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각자의 인격은 각자가 행복을 느끼는 것을 진실이라고 우길 텐데 말이다.

 

이 중에서 어떤 행복이 최고라고 뽑아 줄 수 있을까?

 

물론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니까 그렇다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들도 이런 경험을 한다.

 

각자 어린 시절에 행복했던 것이 지금도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즉, 행복의 조건이나 방식이 바뀌었다. 어린 시절엔 로봇 만화나 인형 놀이가 행복했지만 어른이 되면 골프를 치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나이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만약 각자의 행복이 진실이라면 왜 변할까? 진실이 변한다는 말은 듣기에 좀 이상하다.

 

물론 그 순간에는 진짜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고 싶지만, 할 수 없기에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에 대해서 끝없는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이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최면을 걸듯이 말이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두 부부의 행복은 사실 하나로 합쳐질 수도 있다. 분명히 아이를 키우면서도 시간이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이 존재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주변의 도움과 돈만 충분하다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합쳐진 삶은 완벽한 행복일까? 아닐 것이다. 그런 삶을 산다고 해도 어떤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아이에게 문제가 있거나, 기타 어떤 종류의 문제라도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문제가 없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늙고 죽는 문제가 남는다.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우리가 경험하는 행복은 어느 지점에서 멈춘 것이 분명하다. 더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타고난 외모나 타고난 지적 능력, 타고난 건강, 타고난 기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바꿀 수 없기에 자신의 욕망을 멈춘다.

 

우리가 경험하는 행복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각자가 느끼는 행복 자부심으로부터도 충분히 드러난다.

 

즉,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는 어디에서나 자신이 경험하는 행복이 최고라고 말하고 다닌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조건이야 말로 최고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이 그것으로 채워진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말을 아끼지만, 그럴 때조차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행복 조건을 듣고는 속으로 비교하면서 자신의 행복 조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자신이 없어지면, 상대의 조건을 부러워한다. 그러다가 질투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도하게 행복 자랑을 했다가는 관계가 다 떨어져 나간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자신의 불행함을 주로 이야기 한다. 물론 거기엔 은근히 행복 자랑을 끼워 넣는다. 아니, 상대가 그것을 말해주길 바란다.

 

아이가 너무 공부만 해서 건강이 걱정이라고 말하면, 친구는 공부라도 잘하니 어디냐고 맞장구 쳐준다. 만약 거기에서 그렇게 공부만 하다가 건강이 상해서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고 같이 진심으로 걱정해줬다가는 바로 그 둘의 관계는 끊겨 버리고 만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남의 행복 조건과 자신의 행복 조건을 끝없이 저울질 한다. 그러니 자신의 행복을 절대로 남과 바꾸지 않겠다는 말 자체가 통용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보고 산다면, 이런 말은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행복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남들도 각자 행복하겠지만, 자신이 경험하는 행복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을 보면 금세 친해지고 어울린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엄마는, 아이가 있는 엄마들과 어울린다. 아이가 없는 여자는 아이가 없는 여자들과 어울린다. 이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이 무시당하는 곳을 가는 것을 싫어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틈에 있을 수는 없다. 싸우든가 떠나든가 해야 한다.

 

결국 우리 각자가 경험하는 행복은 자신의 능력과 환경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 조건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이 진짜일 수는 없다. 비록 그것은 정답에 가깝긴 하지만 결국엔 오답이다.

 

우리가 진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거기엔 한 점의 불행함도 없어야 한다. 단 하나의 문제도 없어야 한다. 단 하나의 고민이나 두려움도 없어야 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자랑할 필요가 없다. 사실 행복 자랑의 행위 자체가 행복이 부족함을 말해 줄 뿐이다. 부족하니까 자꾸 말해서 채우려고 한다.

 

더군다나 인간의 삶에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행복이 진짜가 아니니 버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정답에 가까운 오답이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한계이니 어차피 살 거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단지 스스로 가진 행복 자부심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이 더 나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은 의도치 않게 타인이 누리는 행복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자신은 그저 자신이 행복한 것을 남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남의 행복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페이스 북이나 카카오 스토리,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사는지 기록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남의 행복에 대한 무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은 그저 자신의 행복 경험을 공유한 것이라고 강변할 것이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국 틀린 말이다.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 환경, 운에 따라서 얻게된 우연한 조건들이 결정되고, 거기에 만족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행복이란 것이 원래 자기 만족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의 행복을 남에게 자랑하거나 자신의 행복에 대한 확신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우연히 갖게 된 조건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더 정당한 위치에 놓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각자 서로의 행복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말은 그럴듯 하게 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행복이 더 옳은 방향이고, 더 낫다고 믿는다.

 

그러니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복 조건과 행복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행복에 대한 확신이 강해질수록, 타인이 누리는 행복에 대한 가치는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만 기억한다면, 얼마든지 행복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이다. 행복은 자랑의 대상이 아니다. 행복은 그저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행위는 자신도 망치고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할 뿐이다. 

 

'진짜로' 행복하다면 모든 표현을 멈춰야 한다. 말이나 글이나 사진이나 모두 말이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매일 그것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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