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있고, 없고

아이루다 2016. 7. 18. 08:11

 
사무실에서 일하는 많은 현대인들은 일년, 365일을 일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한다. 여름의 그 더운 날도 사무실에서는 냉방기가 작동하여 시원하고, 그 추운 겨울날도 난방기가 작동하여 따뜻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집보다 사무실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특히 냉방기가 없는 집에서 후덥지근한 여름을 보내야 할 때 같은 경우에 더욱 그렇다.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출퇴근 시에 사용되는 교통 수단들 역시도 일년 동안 동일하게 유지가 된다. 버스나 지하철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그 안에서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물론 매일 조금씩 차이는 있다. 누군가는 휴가를 내서 며칠을 쉴 것이고, 누군가는 집안에 경조사가 있어서 쉴지도 모른다. 여름 휴가를 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출산 휴가를 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각을 해서 늦게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단 결근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도 비슷하다. 방학이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사실 직장인과 학생들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학기 중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같이 등교를 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도심의 특징이기도 하다. 현대의 도시는 날씨의 변화에 따라서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시골은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일단 시골은 주로 외부에서 일을 하는 형태가 많다. 즉,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농사는 겨울철에는 쉰다. 물론 비닐 하우스를 이용해서 하기도 하지만, 전체 비율로 보면 그리 많지는 않다.
 
아무리 바쁜 시기라고 해도 비가 많이 오면 쉬어야 한다. 원래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거나 하는 것은 맑은 날 해야 하는 작업이다. 특히 밭을 갈 때는 땅이 젖어 있으면 안되므로, 날을 잘 골라야 한다.
 
오래 전 과거에 이 땅에 살던 우리들의 조상은 주로 시골의 특징을 가졌었다. 대다수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활 양식이 완전히 바뀌어서 대다수가 도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젠 아예 도심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스스로 착각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계절과 날씨의 변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착각이다.
 
사실 우리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늘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 옷을 바꿔 입는다는 점만 빼면 여름이나 겨울은 다를 것이 없다. 밤과 낮의 차이도 별로 없는 경우도 많다. 많은 술집이 밤을 새워서 문을 열고, 전국에 엄청나게 퍼져 있는 편의점은 365일, 24시간 열려 있다. 
 
단지 여름엔 비가 많이 와서 우산을 자주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겨울에 눈이 오면 미끄럽다는 불편함은 있다. 또한 낮에는 자외선을 조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밤은 어두워서 불편한 점이 있다.
 
그런데 이때 '불편함' 이란 단어를 잘 이해해야 한다.
 
불편함은 불가능함이 아니다. 불편함은 단지 편하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할 수는 있는데, 예전처럼 편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불편함이다. 그런데 불편함과 불가능함은 완전히 다른 말일까?
 
과거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여름에 얼음을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게 완전히 불가능이 아닌 이유는, 아주 많은 노력을 하면, 사실상 가능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얼음을 먹기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왕이나 그런 호사를 누렸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과거엔 분명히 불가능했던 것들이 불편함으로 바뀐 것이 많다. 이것은 당연하기도 한데, 기술 문명 자체가 인간을 좀 더 편하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편리할까를 연구하고 사람들의 요구에 잘 맞는 제품들이 크게 히트를 쳤다. 이것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일어난 기술 혁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직접 하기는 불가능한 '혼자서 하늘을 날기' 등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가능하다. 아직도 불편한 것은 많으나,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정말로 많은 것이 편해졌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불편함과 불가능함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기본적으로 불편함과 불가능함은 아예 다른 개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것은 그리 먼 개념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좋아하는 음식점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음식점은 차를 타고 가도 2시간이 넘게 가야 한다. 가기가 많이 불편하다. 이때 이 사람은 이 음식점에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 음식을 얼마나 먹고 싶은가 의 여부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음식점이 이 사람의 집 코 앞에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론 이때도 그 음식점의 맛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하지만 이럴 경우, 이 사람이 그 음식점을 가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동의 불편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 가게가 2시간 거리에서 4시간 거리로 늘어났다고 해보자. 이럴 경우라면 이 사람이 그 음식점에 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진다.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를 따져보면, 불편함이 불가능함으로 변한 것에는 단지 거리의 변화, 즉 환경 변화만이 작용한 것이다. 물론 억지로라도 한다면 하겠지만, 4시간 거리가 떨어진 음식점을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해외라면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확실하게 환경적 변화를 받는다. 주변에서 무엇인가가 변화되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불가능이 불편함으로, 불편함이 불가능으로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자신은 주변 환경 변화에 연계되어 있지 않는, 사실상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앞의 경우에 2시간 떨어진 음식점을 가지 않는 이유는, 언제고 갈 수 있지만, 그저 오늘 별로 그 음식이 먹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 음식점이 너무 멀어서 안가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불편함을 감수할만큼 먹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때 불편함이 불가능함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단지 먹고 싶지 않아서 안 간 것이다. 이 착각 덕분에 음식점과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해도, 이 사람의 판단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멀어도 언젠가 기분이 내키는 날이 오면, 갈 수 있다고 말이다.
 
사실 이 기분이 문제이다. 기분은 보통 감정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 주변 환경에 의해서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비가 오는 날의 기분과, 맑은 날의 기분과, 더운 여름날의 기분과, 추운 겨울의 기분이 날씨에 상관없이 거의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날이든 상관없이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지 너무 덥고 습해서 짜증이 나서 싸움을 하더라도, 그 싸움의 원인을 날씨로 찾지는 않는다. 불쾌지수라는 공식된 수치가 존재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의 변화가 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다. 웃을 만 해서 웃고, 화를 낼 만 해서 낸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남들과 싸울 때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감정의 정당성, 그것이 우리가 싸움에서 가장 많이 하는 주장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제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자신이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이 거의 없고, 단지 변화에 따른 불편한 것들만 존재한다고 느낀다. 사계절, 밤낮으로 우리는 늘 일정한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자신의 다른 환경들의 변화들, 즉 어떤 제품을 사거나, 직장을 옮기거나, 새로운 지역으로 옮기거나, 전학을 하거나, 주변에 어떤 상점들이 새로 들어서거나, 최근 몸에 불편한 점이 생겼다든지 에 대해서, 그것들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우리는 원래 생소한 것을 접하면, 적응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적응의 기간이 끝나면, 거기는 익숙한 것이 된다. 새로운 제품을 사도 그렇고, 새로운 장소에 가도 그렇고, 주변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도 그렇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낯선 것을 불편해하기에, 가능하면 무엇이든 적응하려고 한다. 물론 결국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적응의 기간을 통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의 자신을 원래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응 전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기도 힘들어 한다. 적응 전 자신의 모습이 아득하고 기억도 잘 안 난다. 심지어 왜 그랬는지 과거의 자신이 이해가 안가는 경우도 많다. 이때 자신은 변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단지 적응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우리는 새로운 것을 접하면서 과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나의 예를 보자.
 
어떤 사람이 차를 한 대 샀다. 이 사람이 차를 산 것은, 이 사람이 그저 차를 산 상황에 불과하다. 물론 주차장이 필요해졌고, 보험에 들고, 세금을 내고, 기름을 넣고, 운전을 하고, 어딘가 멀리 갈 수 있는 차이는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를 산 것은 아주 큰 일은 아니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차를 사자마자 동네의 좁은 주차장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에 들어가는 돈으로 인해 쓸 수 있는 돈의 여유도 많이 줄었다. 물론 좋은 점도 많다. 주말에 여자친구와 멀리 여행도 갈 수 있었고, 더운 날이나 추운 날 힘들게 걸어 다닐 필요도 없다.
 
그런데 차를 산 어느 날 눈이 왔다. 그런데 과거에 걸어 다닐 때, 눈은 그저 좀 미끄러운 존재였다. 사실 눈이 내리면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런데 차가 있는 상황에서 눈이 오니,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되었다.
 
차를 끌고 나가야 하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엄두가 안 나게 된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차를 끌고 나온다. 그러다가 도로 위에서 사고가 났다. 다른 차와 접촉 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가 나자, 사고도 사고지만 짜증이 밀려왔다. 아침 출근 시간에 자동차 접촉사고는 사실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귀찮고 짜증나는 사건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사고 처리를 맡기고 회사에 늦게 간 후에도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더군다나 지각 덕분에 회사에서 자신이 한 일에 문제가 생겨서 윗사람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그리고 저녁에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도 오다가 미끄러져서 다리를 살짝 삐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위로를 해달라고 했다.
 
남자는 가능하면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했으나, 이미 자신도 기분이 상한 상태라서 평소와 다르게 말을 실수 하고 말았다. 걸을 때 좀 조심하지 그랬다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여자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오늘 왜 그러냐고, 여자 친구가 다쳤다고 하면 그냥 위로만 해주면 될 것을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말하면서 화를 냈다.
 
여자가 화를 내자 남자 역시도 폭발했다. 아침에 접촉 사고가 난 것과, 회사에서 일 때문에 한 소리 들은 것이 함께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둘은 아주 크게 싸우고, 결국 헤어지자는 소리까지 나온 후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정말로 헤어졌다.
 
원래 남자는 출퇴근의 목적보다는 주말에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 차를 샀다. 그런데 차를 사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여기에서 남자에게 일어난 변화는 차를 산 것이다. 그리고 눈이 온다는 또 다른 변화가 합해지면서 일어난 최종 결과는, 처음 차를 산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때 남자는 자신이 차를 샀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생겼다고 느낄까, 아니면 눈이 와서 그렇다고 느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그날 그저 재수가 없었고, 여자 친구는 원래부터 좀 문제가 있었다고 느낄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TV를 생각해보자. 각 가정에 있는 TV는 원래 그저 TV일 뿐이다. 처음에 TV가 없다가 있을 경우, TV는 아주 신기한 물건이다.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TV는 그 집의 분위기를 바꾼다. 저녁 시간마다 거실에 모여서 시끄러웠던 그 집은 이제 조용하고 오직 TV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리는 집으로 변한다.
 
물론 모두 거실에 나와 있는 것은 같다. 단지 이때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방향만을 보고 있는 것만 달라졌다. 그리고 웃긴 하지만,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 아니라, TV 속 화면을 보고 웃는다.
 
이것은 단지 TV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
 
그렇게 수 년이 지나고 나면, 아마도 부모는 자식과의 대화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도 모른다. 또한 아이들이 너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하다. TV를 보다가 보면 대화를 할 시간도, 책을 읽을 시간도 별로 없다. 우리의 시간은 모두 유한하기에, 어디에 그 시간을 쓰면 다른 것들은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요즘처럼 각자 스마트 폰이 생겼다고 해보자. 이젠 뭐가 달라질까? 달라지는 것은 TV조차 외면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실에 모이는 일도 줄었다. 이젠 각자 방에서 자신의 스마트 폰을 바라보고는 저녁 시간을 보낸다.
 
이런 변화는 결국 무엇을 야기할까? 대부분의 가정 문제에서라면 결국 가족 구성원들끼리의 대화 부족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당연히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앞에서 말한 연인의 싸움과 같다. 장시간 대화의 시간을 잃어버린 부부는 결국 다투다가 이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남자는 스마트 폰을 보다가 낯선 여자와 채팅을 할 수도 있고, 여자는 드라마만 보다가 자신의 삶이 우울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자녀들과 부모간의 갈등도 비슷하다. 모든 대화가 없어진 관계는 오해가 생기기 쉽다.
 
물론 모든 가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TV를 보면서도 여전히 화목한 가정도 있고, 스마트 폰을 보면서도 잘 지내는 가족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서 조차 각자 스마트 폰만 바라보다가 오게 되면, 다음에 그 친구를 왜 만나야 할지 고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대화라는 것이 재미있는 점은, 할수록 더 많은 대화거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만에 만난 친구보다 어제 만난 친구와 더 할 얘기가 많은 것이 일반적으로 정상이다.
 
그런데 자꾸 서로 대화를 하지 않으면, 언제 시간을 내서 대화를 하려고 노력 해도, 좀처럼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상대에 대해서 뭘 알아야 대화를 할 수 있는데, 너무 장시간 대화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 그것이 힘들다.
 
사실 TV나 스마트 폰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사실 막대하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해서 자신이 그것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여길 뿐이다. 심한 경우 중독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어떤 문제를 느낄 때가 있다. 불안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다. 뭔가 막연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양한 해결책을 생각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불안을 벗어나고, 새로운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이 크게 변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극복하고, 평소에는 엄두가 안나던 하기 힘든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도전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좌절한다. 이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삶이다.
 
하지만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 방법은 생각보다 매우 쉽다. 왜냐하면 변화는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집의 거실에 TV를 없애고 스마트 폰을 보는 버릇만 없애도 아주 크게 바뀔 수 있다.
 
그 후로 수 년간 시간이 지나면, 매일 자전거를 열심히 타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집에서 많은 책을 읽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카메라를 메고 전국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꾸준히 만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봉사 활동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어떤 형태의 사람으로 변할지는 각자의 성격과 환경에 따라 다르다. 
  

스스로에게 심심한 시간을 만들어 주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니 변화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반드시 잉여 시간을 만들어 줘야 한다. 이때 정말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자신의 의지보다 주변 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안 다니던 영어 학원을 다니고, 헬스 클럽을 등록해서 운동을 배우고, 뭔가 힘든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사실 이런 것은 실패할 위험성이 높다. 하려고 하는 것이 의지적이고 자기를 이겨내야 하는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저 우리는 주변만 변화시키면 된다. 그래서 몇 가지 물건을 치움으로써 혹은 더함으로도 자기 자신은 크게 변화될 수 있다. 즉, 집에서 화초를 키우는 것이나, 애완 동물을 키우는 것도 우리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 변하고 싶다면, 힘들게 나를 변화시킬 궁리를 하지 말고, 자신의 주변을 변화시키면 된다. 그러면 나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시장 주변에 살면서 조용한 삶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용히 살고 싶다면 사람이 없는 장소에 가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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