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0에서 1, 1에서 2

아이루다 2016. 4. 15. 08:25

 

가끔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거기에서 먹었던 라면 맛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추억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힘들고 지루했던 군대 생활 중에서, 어찌 보면 유일한 낙이 바로 그때 먹은 라면 맛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대를 한 후,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때 라면 맛을 느낄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기억을 채색하여 추억으로 바꾸기 때문에, 결코 정확한 기억을 하고 있지는 못한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맛있는 라면에, 훨씬 더 풍족한 환경에서, 훨씬 더 편하게 끓여 먹는 라면임에도 불구하고, 김치조차 없이 먹었던 그 당시 라면 맛을 못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당연히 심리적인 맛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모든 물리적인 조건은 우월한데, 맛은 떨어지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심리적 요소는 아마 경쟁이나 기타 상황에 의해서 일어난 '부족함' 일 것이다.

 

예전부터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었다. 말 그대로 배고프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사실 현대인들은 시장을 반찬으로 여기면서 먹을 수 있는 경험을 하기는 힘들다. 그나마 남자들은 군대에 있을 때 그럴 경험을 할 수 있지만, 보통의 삶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었다고 해도, 이것은 부족함의 심리로 인해 맛이 있어지는 것보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기분이 나빠지는 부분이 훨씬 클 것이기에, 이것을 경험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군대의 라면 맛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추운 겨울날 집에서 멀리 떠나 어딘가에 텐트를 치고 덜덜 떨면서 밤에 힘들게 불을 피워서 라면을 끓이면 된다. 그것도 라면을 두 개 끓여서 세 명이 먹게 되면, 정말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힘든 상황과 경쟁을 통해 부족함을 연출해 낼 수 있다면, 그때 라면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상황 하나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흐름 하나를 잡아 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부족함으로부터 오는 행복이다.

 

물론 부족함은 사실 너무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거의 모든 상황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긴 하다. 라면도 부족하지만, 해외 여행이 부족하거나, 값 비싼 밥을 먹는 경험이 부족하거나, 최고의 다이아몬드가 되기에 부족하거나, 99억은 1억이 100억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말도 모두 부족하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래서 단지 부족함 하나로 만으로는 행복의 필수 요소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

 

숫자 0에서 1과 숫자 1에서 2는 모두 1의 차이이다. 만약 이 차이를 부족함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두 쌍의 숫자간의 부족함 차이는 완전히 동일하다. 0은 1에 비해서 1이 부족하고, 1도 2에 비해서 1이 부족하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이 둘의 차이가 동일할까?

 

로봇 장난감이 하나도 없던 아이에게 로봇 장난감이 하나 생기는 것과,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 더 생기는 것이 같을까?

 

스마트 폰이 없던 아이에게 스마트 폰이 생기는 것과 이미 하나 가지고 있다가 다른 기종으로 바꾸는 아이가 경험하는 행복이 같을까?

 

해외 여행을 처음 가는 사람과 이미 한 번 다녀온 사람이 다시 가는 여행에서 느끼는 기분이 같을까?

 

사실 이런 경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특별히 생각하기 위해서 '첫' 이란 글자를 붙여서 표현한다.

 

첫 사랑, 첫 눈, 첫 만남, 첫 경험, 첫 직장 등등이 바로 그런 예이다. 그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첫' 자가 붙은 말 중에서 어떤 단어들은 개인적 경험에 따라서 어떤 특별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특별한 감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할 때, 그 경험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 비해서 훨씬 강렬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거기엔 부족함이 채워지는 만족감뿐만 아니라, 두려움, 흥분, 호기심 등의 일반 경우보다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감정들이 함께 따라 오기 때문이다.

 

그리도 가지고 싶어했던 자전거를 처음 산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상상해보면 알 수 있다. 아이의 마음 속엔 뿌듯함, 자랑, 만족감, 걱정, 흥분 등등 정말로 복합적인 감정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뭉쳐서 결국 아이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원래 아이들이 행복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이들은 경험이 적고 걱정도 적다. 이러니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처음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반복 경험으로부터 오는 행복과는 비교 불가 수준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언제나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처음은 늘 한 번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많은 경험을 쌓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엔 매일 무엇인가를 첫 번째로 경험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일년 동안 단 한 번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 없을 경우까지 생겨난다.

 

말 그대로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이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행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여기엔 없던 것에서 있던 것과 이미 있던 것에서 하나가 더 더해진, 0과 1 그리고 1과 2 사이의 차이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미 한 번 경험한 것은 다음 경험할 때, 그다지 감흥이 없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하나가 더 더해지는 것은 그다지 감흥이 없다. 그럼에도 감흥이 있으려면 기존의 1을 거의 0과 같이 만들 수 있는 확실히 차별된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던 사람에게 적어도 유럽 여행은 가야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 폴더 폰을 쓰던 사람에게 스마트 폰이 그런 경험을 줄 수 있다. 스마트 폰을 사진을 찍던 사람에게 고급 DSLR 카메라가 그런 경험을 줄 수 있다. 싸구려 중고 차를 타던 사람에게 고급 세단이 그런 경험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생각해도 이런 추가적인 경험이 기존 경험을 압도하려면, 일단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경험에 필요한 돈에 비해서 두 번째 경험이 첫 경험만큼이나 감흥을 주려면 필요한 돈은 두 배가 아닌, 수십 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더욱 더 많은 돈이 든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그런 경험을 얻으려면 이젠 우주 여행을 가야 한다. 스마트 폰은 아예 다음엔 나온 것도 없다. 아이 패드와 같은 류가 나오긴 하지만, 추가적인 만족 수준에 불과하다. 고급 카메라에서 좀 더 고급으로 가려면 가격은 급 상승한다. 고급 세단을 타던 사람은 이제 자가용 비행기 정도 타야 그 정도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행복을 얻기가 힘들다. 처음엔 만 원만 있으면 남부럽지 않게 행복했는데, 이제는 그런 행복을 얻으려면 백 만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렵게 그것을 하고 나니, 이젠 일억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들이 행복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들 마음 속에 돈에 대한 욕망이 자라난다. 첫 경험을 할 때 느꼈던 것 같은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큰 돈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돈은 각자마다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은 결국 돈의 의해서 막힌다. 그러니 누구나 돈을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지만 돈이 무한정 있다고 해도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스마트 폰이 그랬던 것처럼, 그 다음이 없다. 우주 여행을 다녀 온 사람은 그 다음엔 갈 곳이 없다. 가장 비싼 카메라를 샀다면, 다음 살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후로 나오는 모든 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조금 더 좋은 수준일 뿐, 사실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즉, 돈이 있건 없건 간에 상관없이 우리의 첫 경험을 통한 얻었던 행복은 언젠가는 막힌다. 보통은 돈이 없어서도 그렇게 되고, 돈이 충분해도 그 시점만 늦어질 뿐, 결국 그렇게 된다.

 

그리고 돈이 충분해서 막히는 경우엔, 해결 불가능한 지루함과 권태라는 무서운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보통 사람들이 남극을 탐험하는 것을 경험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이 모든 경험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경험 가능한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부족한 상태를 0으로 가정한다면, 우리는 각자 한정된 0을 가지고 있으며, 살아가면서 점점 0을 소모하여 1로 만듦으로써 행복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지고 있는 0의 숫자 하나 하나는 얼마나 소중할까?

 

이미 가지고 있는 0을 거의 다 써버린 사람들이 다시는 그때의 행복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미 경험한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고 자랑함으로써 유지하려고 애쓰게 된다. 혹은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새로운 0을 만들어 내려고 애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다. 돈을 벌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그 모든 것의 목적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처음 경험하는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갑자기 큰 돈이 생겨서 새롭게 경험할 것들이 많이 늘어난 사람은 몇 년간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행복에 대한 보물 창고를 찾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보물 창고에 있던 0도 금세 다 소모 되어서 결국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다음 보물 창고를 찾으려면 너무도 큰 행운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럴만한 운이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런 뻔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있든 없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바로 '선택' 과 '집중' 이다.

 

보통 선택과 집중은 성공의 열쇠로 많이 회자되는 단어들이다. 너무 많은 목표를 갖지 말고, 정말 필수적인 것들만 집중해서 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의 열쇠라고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행복을 위한 노력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까?

 

그것은 바로 0의 숫자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 우리는 행복하기 싶어 하기에, 자꾸 가진 0을 소모시킨다. 그리고 이때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양과 행복의 기간은 사람마다 크게 차이가 난다.

 

새로운 스마트 폰을 얻었을 때, 누군가는 3개월도 못되어서 새로 나온 폰으로 갈아타지만, 누군가는 삼 년을 넘게 쓴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성격일 수 있다.

 

그럼에도 0에서 1로 변할 때와 1에서 2로 변할 때와 100에서 101로 변할 때의 차이는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 달 이나 일 년이면 될까? 물론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평균적으로 우리가 충분한 경험과 제대로 된 응용을 위해서는 최소 일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 많다.

 

수영을 배워도 일 년은 배워야 어느 정도 수영에 대해 익숙하게 된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몸을 쓰는 운동들이 다 그렇다.

 

카메라에 대해 배우는 것은 일 년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 그것은 수 년간, 아니 수 십 년간 반복할 때 정말로 제대로 된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다.

 

스마트 폰도 그렇다. 사실 우리는 그 기계를 단지 채팅이나 인터넷 서핑 그리고 게임을 하는 데만 써서 그렇지, 그 기계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가지 사용법만 익히고 나면, 한 달도 안 되어서 금세 익숙하게 기계를 다룬다.

 

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카메라를 산 후, 겨우 일 년 정도, 그리고 서너 번 출사를 나간 후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조금 힘들고 지루하다 싶으면, 자꾸 쉬운 방법을 찾는다. 좀 더 편하게 그것을 할 수 있는 요령을 찾는데 많은 노력을 한다. 물론 불편함을 없애는 것은 좋다. 하지만 너무 편하면 금세 질려 버리게 된다. 그러니 이젠 다른 것으로 흥미를 돌린다.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또 다른 0을 소모한다.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을 불편하다. 그래서 수동 타자기를 쓴다. 그러다가 전동 타자기를 쓰고 나중엔 컴퓨터로 쓴다. 편지 역시 우편으로 보내다가 메일로 보내다가 이젠 문자로 보낸다. 한 번 붙이면 일주일이 걸리던 편지가 초 단위로 전달된다. 편해진 것은 맞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소모한 것일까? 우리는 이제 상자 안에 있는 오래된 편지를 보는 즐거움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이렇게 자꾸 0을 별다른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소모하게 되면,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0의 숫자는 금세 줄어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또한 열심히 산다는 명목 하에, 하루에도 여러 가지 종류를 겹쳐서 하는 경우도 많다. 하나도 하기 힘든 상황에 여러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면, 결국 바쁘고 정신 없기에 결국 각자마다의 요령을 찾는데 열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래봐야 그 각자를 제대로 해낼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너무 쉽게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우리는 행복을 잃게 된다. 입안에 사탕이 들어오면, 최대한 오래 빨아서 그 달콤함을 느껴야지, 금세 씹어서 먹어 버리고 만다.

 

사탕의 개수가 무한대라면 상관없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 한정된 사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각 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을 때마다 최대한 오래 먹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사탕을 먹고 난 후, 다음 사탕을 먹기 전에 입 안에 남은 사탕의 맛을 지워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탕이 들어올 때, 그 사탕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선택이 바뀌는 순간의 여유로움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여유로움은 잉여로움일 수 있고, 지루함일 수 있고, 권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여유로움이 없다면, 우리는 0을 소모하는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은 세상을 빨리 경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의 경험 없음이 부럽다. 왜냐하면 그 경험 없음이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지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자신이 아직 쓰지 않는 0을 쓰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무의미하게 소모해 버리고 만다.

 

해외 여행을 처음 간다면, 여행 가기 일년 전부터 자신이 갈 여행지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디가 유명한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역사와 문화를 모르면 어떻게 그 장소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 조차 그저 거대한 건축물일 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모나리자를 봐야 그저 자주 봤던 그림일 뿐이다.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여행은, 그저 눈요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모르고 갔든지 알고 갔든지 상관없이 한 번 경험하게 되면, 그때는 이미 0이 1로 바뀐 상황이다. 아무리 다시 공부를 하고 간다고 해도 0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경험은 다시는 불가능하다.

 

행복하고 싶다면, 자신이 아직 쓰지 않고 남은 0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0을 경험하기 위해서 최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택과 집중이다. 하나씩 소모하는데 만도 수 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20개만 남아 있어도 평생 행복할 수 있다.

 

제대로만 된다면 하나 하나의 0을 소모할 때마다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뿌듯하기도 할 것이다. 단지 너무 급하게 행복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 하나에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0과 다른 0 사이엔 최대한 게으름을 피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다음 0이 더욱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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