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공감에 대한 조금 다른 시선

아이루다 2016. 1. 21. 08:05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 아마도 이 설명이 대충 공감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가 맞을 것이다.
 
공감은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서 참으로 위대한 것 중 하나이다. 사실 공감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멸종했거나 혹은 지금도 아주 소수의 무리를 지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코 현재와 같은 문명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비슷하게 느끼는 능력인데, 사실 사람마다 매우 큰 편차가 있다. 즉, 어떤 사람은 타인이 느낀 감정을 아주 크게 느끼는 반면, 어떤 사람은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잘 느끼는 사람을 보통 '인간적'이다 라고 표현하고, 잘 느끼지 못한 사람을 '냉정하다' 라고 표현한다. 또한 아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이코 패스' 라고 따로 정신병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사이코 패스를 반사회적 성향이 강하다고 말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공감 능력 자체가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감을 통해서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도움, 관용, 배려, 위로 등등의 다양한 형태의 선한 행동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이 각자가 이기적인 우리들을 한 울타리 속에서 참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원리로 공감을 할까?
 
우리는 보통 공감이 타인의 감정을 복사하듯 비슷하게 느끼게 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흔한 착각이다. 우리는 타인의 현재 상태에 자신의 상황에 놓고서 그때 자신이 어떤 기분을 느낄지를 상상한 후, 그때 자신의 기분이 어떨지를 가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 기분에 따라서 상대의 상태를 예측한다.
 
즉, 우리가 상대로부터 복사해오는 감정은 전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상대에 상관없이 홀로 만들어내는 감정이다. 이때 상대는 단지 어떤 상황 정보만 준 것 뿐이다.

 
사실 이 말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이 아닌,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 뜨거운 물에 데거나, 넘어졌을 때 우리는 그 고통을 상상만 할 뿐, 절대로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서만 만들어진다.
 
하지만 아무튼 스스로 만들어 낸 감정이라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되기 시작하면, 상대가 불쌍하게 생각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슬픔에 같이 울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눈물은 상대를 향하고는 있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상대의 처지가 되었다는 상상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상상되어 눈물이 날 때는, 자신의 죽음이 떠올라서 우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슬프면 슬플수록 누군가의 죽음은 더욱 더 슬퍼지게 된다. 사실 공감은 이런 식이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아이를 잃은 사람의 고통을 훨씬 강하게 공감한다. 시험에 떨어져 본 사람이 떨어진 사람을 공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동일하게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공감한다. 자신에게 소중할수록 더 많은 공감을 한다.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공감 능력은 우리가 타고난 능력 중 하나이다. 우리는 딱히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인간의 얼굴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알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전에 어떤 박사가 세계에 퍼져 있는 수 많은 종류의 소규모 부족들에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각가지 표정을 담은 사진을 보여줬을 때, 그들이 모두 그 사진 속 인물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맞춰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이것만 봐도 우리의 공감 능력은 타고났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삶의 경험이란 것이 쌓이면, 표정에 드러나지 않는, 숨기고 있는,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감정까지도 감지해서 그것을 통해 공감을 해내기도 한다.
 
즉, 상대의 상황이나 처지만 보고도, 웃고 있어도 웃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 비해서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많은 공감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다. 친구가 좋은 이유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공감 능력은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그래서 공감 능력이 많이 발달한 사람은 아주 작은 일이데 쉽게 동조를 한다. 반대로 사이코 패스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자신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타인의 처지나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많이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의 차이이지, 아예 처음부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다.
 
이것이 흔히 사이코 패스를 오해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타인의 처지를 보면서도 그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 상대가 어떤 상황에 놓였을까에 대한 추측도 이뤄지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잘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자신이 다리가 부러진 상황을 상상하면서, 그 사람의 고통을 유추한다. 그래서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사이코 패스는 이 과정이 없다. 그래서 상대가 다리가 부러지든, 피를 철철 흘리든 전혀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즐기는 성적 성향을 타고 태어났다면, 최악의 조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는 소름 끼치는 연쇄 살인마들의 본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코 패스가 자신의 고통을 잘 견디거나, 자신의 생명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이코 패스는 단지 자신의 감정만 느끼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공감을 잘하는 사람을 사이코 패스에 비해서 선호한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사이코 패스는 매우 위험한 존재이니까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사실 보통 사람과 사이코 패스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보통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의 사이코 패스임에도 불구하고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도 많다.
 
이런 착각이 생기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우리가 공감을 타인을 통해 전달된 감정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 공감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감정이다. 우리 인간은 아직 감정을 타인에게 복사해주거나 복사하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사이코 패스는 모두 범죄를 저지른다는 착각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코 패스라고 해서 모두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가 정의한 인간의 정의는 송두리 채 바뀌어야 한다.
 
공감 상태에 놓이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독자적인 상태이다. 즉, 사이코 패스는 그런 의미에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그 자신만의 감정에 충실한 존재이다. 그런데 사이코 패스가 모두 살인을 한다는 말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사악한 존재라는 결론만 나오게 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세상엔 착한 사이코 패스가 꽤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잘 표시가 나질 않는 이유는, 공감은 못해도 착하게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감하는 것과 착하게 사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공감은 감정의 영역이고, 착한 것은 도덕, 즉 이성의 영역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기 때문에 수 많은 도덕을 교육받았다. 도덕은 인간이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주입된 것이다.
 
하지만 착한 사이코 패스들의 삶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공감을 잘하는 것을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 자체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더해서 공감은 행복과도 큰 관련이 있기 때문에, 불행할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공감을 잘하는 것은 오직 장점으로만 작용할까? 아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객관적이지 못한 태도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객관적인 태도가 되려면, 자신이든 상대이든 간에 상관없이 일단 제 삼자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성적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공감이란 말 자체가 이미 철저하게 주관적 태도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판사가 매우 공감 능력이 뛰어나게 되면 늘 피해자 편을 들 수 밖에 없다. 물론 판사는 당연히 피해자 편을 들어야 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근거로 이뤄지면 안 된다. 판사는 법적 근거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공감 능력이 잘못 발휘되면,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그리고 그 쏠림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즉, 자신의 감정이 온전하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극단적인 공감을 드러내고는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터넷 세상이 가진 지나친 한쪽 쏠림 현상과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또한 공감 능력은 기본적으로 나쁜 감정에 집중된다.
 
즉,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기쁨, 즐거운, 슬픔, 분노 등의 종류가 존재하지만, 보통은 슬픔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 말이 가진 의미는 꽤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슬픔은 남의 불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기쁨을 어느 정도 공감하긴 하지만, 사실 부러움이나 질투심으로 인해 어느 순간 언제나 억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남의 슬픔은 무한대로 공감한다.
 
이것이 우리가 소위 '인간적' 이라고 믿는 강한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본 모습이다.
 
그들은 비 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 채, 타인의 슬픔에만 집중해서 공감한다.
 
물론 기쁜 사람보다 슬픈 사람에게 공감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사실은 그리 인간적이 아니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착한 사이코 패스들 역시도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는 못해도, 배운 도덕 교육 때문에 나름대로의 착한 일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을 세탁하는 일 일수도 있지만, 아무튼 사이코 패스라고 해서 나쁜 사람만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이코 패스가 자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서, 자신이 사실은 사이코 패스에 가깝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특징은 주변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을 모두 이성적으로만 인식한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잘 울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 웃기는 한다.
 
사실 웃음은 쉽다. 우리는 살면서 웃는 훈련을 많이 한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도 웃고, 어색해도 웃는다. 하지만 슬프지 않는데 울기는 어렵다. 울음에는 눈물이 필요하다. 웃음은 표정으로 끝나는데, 울음은 눈에서 물이 흘러나와야 한다.
 
그래서 착한 사이코 패스를 구분하는 법은 바로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남자들 중에서는 열심히 훈련을 한 결과, 잘 울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훈련의 결과로 인해서 사이코 패스에 가까워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좀 다른데, 그것은 공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억눌러 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공감 능력은 있지만, 감정이 둔해져서 자신이 상대의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그리 슬프거나 화가 나지 않을 것이기에 공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가 끝없이 싸우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같은 상황을 여자는 크게 느끼는 반면,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이것은 공감 능력의 차이가 아니고, 각자 가진 감정의 크기의 차이이다.
 
그래서 남자들 중에서 사이코 패스와 감정이 억눌린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좀 어렵다. 그것을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 뭐, 구분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만 말이다.
 
흔히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남자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보통 남자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반면에 여자는 문제를 보면 같이 걱정해주고 울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이 각자의 능력은 각기 중요하다. 남자들은 보통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모든 것인 냥 생각하지만, 그것은 마치 정신과 육체에 대한 입장과 비슷하다.
 
남자의 역할은 몸을 치료하는 것이고 여자의 역할은 정신을 치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으로 중요하다.
 
여자는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기에 남자가 필요하고, 남자는 감정을 억지로 억눌러놔서 행복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여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참 오묘하게도 서로 잘 맞는다.
 
여자는 문제를 제시하고, 남자는 문제를 해결하며, 여자는 문제를 해결한 남자를 칭찬하고, 남자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이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이며, 남녀가 함께 부부의 연을 맺고 살 수 있는 이유이다.
 
물론 이것은 고정되거나 결정된 성의 역할은 아니다. 반대로도 될 수 있다. 남자들 중에서는 여성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도 있고, 여자들 중에서는 남자처럼 이성적인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어떤 경우라고 해도 같은 성향이 어울리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
 
공감은 인간이 가진 좋은 면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공감 능력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문제는 아니다. 단지 자신이 사실상 공감 능력이 있는지 여부는 스스로 판단해 볼 필요는 있다. 특히 남자들 중에서는 자신이 감정을 억눌러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로 원래 그랬는지 여부를 스스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뭐, 여자들은 아마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남을 위해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 - 여기에서 '남'은 가족이 아닌 존재여야 한다 - 남의 기쁨을 한 번도 진심으로 축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사이코 패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을 위해 울고, 가족으로 인해 기뻐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이코 패스일 줄은 상상도 못한다. 하지만 가족은 사실상 자신의 처지와 공감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일치된다. 즉, 가족은 사실상 나와 같다. 그래서 가족의 불행은 보통 자신의 불행이기 때문에, 가족의 슬픔으로 인해 우는 것은, 그냥 자신의 일로 인해서 우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자신을 위해 우는 것은 공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아니 자신을 위해서 잘 우는 사람은 사실 매우 이기적일 가능성이 높다. 운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즉, 울음 그 자체도 이기적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이 판단된 후, 자신에게 불필요한 감정 노력을 하지 않으며, 더해서 그것으로 인해 자책을 할 필요가 없다. 느끼지 못하게 태어난 것뿐이다. 대신 그 능력을 잘 살려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면 된다.
 
공감 잘하는 나쁜 놈보다 사이코 패스의 착한 사람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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