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자기만족

아이루다 2015. 12. 31. 10:23

 
"남을 통해서가 아닌, 오직 스스로를 통해 만족하는 것"
 
이 정도의 설명이 아마도 자기만족의 대략적인 정의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자기만족이란 말은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 적용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단어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 인간은 관계로 시작해서 관계로 끝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삶의 모든 영역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로 얽힌다. 물론 낳은 후 바로 버려지는 아이도 있으니, 꼭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아이가 죽는다면, 아이는 사실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이 된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 아이가 누구에게 발견되어 살아날 수 있다면, 이 아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끈끈하지는 않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와 관계는 맺어야 한다.
 
과거 몇 차례 인간과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다른 동물들과 살아온 인간의 아이들의 모습이 관찰된 적이 있었다. 이때 우리의 상상력은 정글북의 모글리나, 밀림의 타잔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현실 속에서는 처참하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발견된 아이들 대부분은 결국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주 큰 스트레스를 받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 인간은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 아니라,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현재 상태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자랐다는 말이 가진 의미가 바로 수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았다는 뜻이 된다.
 
원래 자기만족은 오롯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타인과 전혀 관계가 되지 않는 듯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로 과연 그럴까? 우리가 자기만족을 느낄 때, 정말로 혼자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일단 우선 그럴 수 없는 것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자기만족의 제일 흔한 예 중에 하나는 바로 여자들이 자주 하는 '화장' 혹은 '꾸미기' 등일 것이다. 남자로 따지만, 근육 만들기 운동 정도 될까? 아무튼 자신을 좀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좀 더 강하게 보이기 위해서 등등의 목적을 가지고 이뤄지는 외모를 꾸미는 전체적인 행위들이 일종의 자기만족에 속하게 된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이 있다.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증상인데, 사실 여자들이나 남자들이 화장을 하면서 혹은 운동을 하면서 받는 느낌은, 거울 속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얻으면서, 일종의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장이 잘 받고, 원하던 형태로 결과가 잘 나오면 그보다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에게 참 잘 어울리는 옷을 맵시 나게 입었을 때도 비슷하다. 머리를 다듬은 후, 거울에 비친 자신이 모습이 산뜻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형태의 긍정적 감정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단지 외모적인 곳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어려워서 한참을 헤맸던 수학 공식을 잘 적용해서 문제를 제대로 풀어 냈을 때나, 혼자서 어려운 퍼즐을 풀어내었을 때도 마찬가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기만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자신의 어떤 능력에 대한 스스로의 확인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뭔가 잘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하거나 해냈을 때, 우리는 뭔가 뿌듯함을 느끼는데, 이 감정이 바로 자기만족으로 어어 진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런 감정을 다른 이들과 관련이 없이 오직 혼자서 느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마 자기만족이라고 해도,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스스로 만족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심화된 자기만족은 마치 다른 이들과 관련도 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화장을 하는 순간이나, 수학 공식을 푸는 순간에 느끼는 그 기쁨이 사실상 남과는 관련이 없이, 오직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느낌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순간, 선수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자신에 대한 뿌듯한 만족감이다. 남들의 환호는 그 후의 일이다.
 
물론 화장을 하고 난 후, 만난 친구들이 오늘 얼굴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면 그 만족감은 좀 더 깊어지겠지만, 혹은 수학 문제를 잘 풀고 난 후,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때 그것에 대한 만족감이 더 높아지겠지만, 감정의 근원은 일단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 크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어떤 것을 할 때 '오직 나를 위해서 하고 있다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말은 그 순간만큼은 진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순간에만 잠시 진실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능력을 잘 해냈을 때, 그것에 대한 만족감을 얻으려면, 우선 다른 이들이 그 능력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줬어야 하기 때문이다.
 
코에서 코딱지를 많이 파내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 될 수 있다. 손가락이 7개여서 손가락으로 14까지의 숫자를 셀 수 있는 능력이 있을 수 있다. 끝없이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서 1Km 떨어진 곳에서도 그 사람이 다가 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해주는 능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능력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그것으로 인해 만족감을 느끼기도 힘들다.
 
우리는 잘 생긴 코를 능력이라고 한다. 우리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피아노를 잘 치거나, 타자를 잘 치는 사람을 능력 있다고 한다. 우리는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능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 차이가 우성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을 능력이라고 한다. 즉,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 쪽일 때 능력이 된다.
 
그리고 인정된 능력은, 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그것을 잘 해냈을 때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100m 달리기 대회가 있기에, 거기에서 우승할 수 있는 것이다. 코딱지를 많이 파내는 대회가 있다면, 그것을 잘하는 것도 나름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느끼는 많은 종류의 만족감들은 이미 다른 이들의 지지가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더해서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을 정리하면, 지금 당장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에는 정말로 스스로 만족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이들의 인정이 있었던 과거의 경험과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결국 이 사실은 우리가 화장을 하고, 근육을 늘리고, 수학문제를 풀고, 퍼즐을 풀 때마다 순수한 의미의 자기만족을 느끼더라도, 사실 그 자기만족엔 이미 다른 이들의 가치 인정이라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온전히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이런 종류의 자기만족은 반드시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단지, 그것이 특별한 사람이나 특별한 대상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은 맞다. 화장을 하는 여자가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한다던가,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가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란 뜻이다. 그것은 그냥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여자가 화장을 하거나, 남자가 근육운동을 할 때 그것이 상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 한다는 말은 정말로 무식한 말이 된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인간들 모두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각자가 가진 다양한 형태의 매력은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되어 준다. 즉, 사람들이 지지하는 매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경쟁에서 승자의 입장이 되기 쉽다. 이때 여자의 경우, 예쁜 얼굴이 남자에 비해서 좀 더 도움이 될 뿐이다.
 
머리가 좋거나, 외모가 뛰어난 것은 모두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좋은 능력들이다.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나, 화장을 열심히 해서 얼굴을 예쁘게 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상 동등한 행위이다. 단지 지식에 비해서 화장은 세안제로 지우는 순간 리셋되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온전한 자기만족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인간의 자기만족은 분명히 가능하다. 이제 그런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지만 이 자기만족은 본능적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일단 먹고, 자고, 쌀 때 우리는 자기만족을 느낀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위로 들어간다. 잘 때도 마찬가지다. 똥을 쌀 때도 혼자 싼다. 이 본능적 행위들은 다른 사람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나마 관련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비싸고 맛난 음식을 먹었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에 비해서 잠을 잘 잤다고 느끼거나, 변비로 고생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타난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화장과 청결함이 매우 애매하게 겹친다. 그래서 화장이 오직 자기만족이란 착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고양이는 자신의 몸을 늘 청소한다. 사실 고양이뿐만 아니라, 새도 목욕을 하고, 코끼리도 한다.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들은 가능하면 자신의 몸을 깨끗히 하려고 한다. 이것은 본능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려는 행위는 아주 단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위생적 목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자신의 건강이다. 깨끗한 몸은 더 위생적이며 그러면 더 건강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씻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늘 하기 싫은 집을 청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귀찮은 빨래를 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청결에 관련된 거의 모든 행위는 건강함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본능적 영역에 속한다. 또한 그래서 이것은 자기만족을 가져온다.
 
기분이 나쁠 때, 청소를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난 후 느끼는 기분 중에서도 일부 존재한다. 지저분하게 하루 종일 있다가 씻고 나오면 상쾌해서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그 상쾌함 자체가 우리의 본능적 영역에서 더러움보다 깨끗함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것이다.
 
깨끗하게 빨린 옷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청결한 환경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거의 늘 기분이 좋다.
 
그런데 화장의 일부는 피부를 잘 관리하는 용도로 쓰인다. 즉, 화장 중에서 기초화장이란 것들이 그런 용도인데, 건조한 피부를 촉촉하게 해주거나, 강한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으로 화장을 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기초화장을 한 후, 다음 순서로 이어지는 색조화장이 그 문제점이다. 왜냐하면 색조화장부터는 그것이 반드시 건강함이나 청결함과 연관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잘 된 화장은 그 사람을 건강하게 보이게 하기도 한다. 실제로 건강하지 않더라도, 얼굴에 붉은 빛의 홍조를 넣어주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말 그래도 혈색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가 아닌 가짜이다. 건조함을 방지하는 로션이나 햇빛을 막아주는 선 블록 크림등은 실제로 건강함을 지키는 역할을 해주지만, 얼굴에 홍조를 넣어주는 화장은 사실 건강과 별로 큰 관련이 없다. 단지 건강하게 보이게 해줄 뿐이다. 더해서 여기에서부터는 사람에 따라서 피부에 무리를 주게 된다.
 
즉, 본격적으로 화장이 피부를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또한 화장을 위해서 많은 시간이 투자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화장품 가격도 장난이 아니다. 그나마 피부를 덜 망치는 화장품을 사려면 아주 비싸다. 그래서 여기에서 경계지점이 나타난다.
 
기초화장의 경우엔 위생과 건강적인 측면에서 정말로 자기만족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색조화장의 경우는 그것보다는 화장을 한 후, 반드시 불특정 대상으로부터 얻는 이득이 필요하다.
 
즉, 색조화장 자체는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그다지 좋지 않다. 더해서 돈도 들고 시간도 많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가 화장을 하는 이유는, 바로 예쁘게 보이는 얼굴이 매력으로 작용해서 불 특정한 이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투자를 한 것이기에, 거기에 상응하는 이득을 얻어야 한다.
 
실제로 화장을 잘해서 예쁜 얼굴이 되었다면, 회사 내에서 다른 이들의 호감을 얻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남자나 여자에게 연락처를 받기도 한다. 가게에 갔을 때, 예뻐 보인다는 이유로 서비스를 하나 더 받을 기회도 있다. 심지어 다른 여자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받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쁜 것들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예쁘다는 이유만으로도 얻는 이득은 참 많다. 그리고 그때마다 당사자가 얻는 만족감은 꽤나 크다.
 
그런데 이때 만족감은 자기만족은 아니다. 그 만족에는 반드시 타인으로부터 얻는 이득이 필요하다. 즉, 자기만족이 아닌, 이득에 대한 만족이다. 이것이 반드시 물질적일 필요도 없다. 그냥 누군가 호감 섞인 눈길, 웃어주는 얼굴, 친절함, 자신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표정 등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이 만족감을 계산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누군가는 화장에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것이 쓸데 없는 짓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누가 맞을지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화장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화장을 쓸데없는 짓으로 여기는 사람을 볼 때마다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없다. 특히 그것을 이성이나 꼬시려고 하는 짓으로 매도하게 되면, 아주 기분이 나쁘다. 그러니 '나만 만족하려고 한' 화장에 왜 당신이 참견하고 꼬투리를 잡냐고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화를 내도, 청결함을 위해 한 화장이 아닌 바에야 '나만 만족하려 한' 화장은 존재할 수 없다. '나도 만족하는' 화장은 가능하지만, 나만을 위해서는 불가능하다.
 
이 설명에도 문제가 있는데, 과연 어디까지를 청결함으로 볼 수 있을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색조화장도 일종의 청결함을 위한 것이라고 우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대략 다수의 의견으로 정해질 수는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본인이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사실 이것을 판단하는 법은 단순하다. 정말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한 행위들은 다른 이들의 판단에 크게 게이치않게 된다. 이미 만족했는데 왜 신경을 쓰겠는가? 그럴 일도 없지만, 왜 밥을 먹냐, 왜 똥을 싸냐 등의 말을 들을 기회는 없다. 왜 씻냐 라는 말도 그렇다.
 
그리고 혹시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 말을 하는 상대가 한심해 보인다. 왜 밥을 먹고, 왜 씻냐를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웃기게 보일 것인가?
 
하지만 그것이 타인과 관련되어 있을 경우, 다른 이들의 비난은 단순하게 넘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 시작이 다른 이들의 판단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한 행위가, 왜 그것을 하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무척 곤란한 상황이 된다.

 

그럼 질문을 본능적 영역에서 조금 끌어 올려서, 왜 운동을 하냐, 왜 공부를 하냐, 왜 책을 읽냐 등의 말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역시도 거의 대부분 무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들에 대한 정당성은 이미 충분히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근육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들 사이에서는 왜 운동을 하냐 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하지만 왜 화장을 하냐, 왜 필요 이상으로 근육을 키우냐, 왜 그렇게 많은 옷이 필요하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애매해지기 시작한다. 분명히 자신은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나 되기 때문에 확신이 줄어든다. 그래서 결국 반발심이 생겨나게 된다.
 
그것들을 위해서 분명히 시간과 돈을 썼는데, 그것을 왜 하냐고 물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온전히 자기만족으로 끝났다면, 질문을 받을 일도 별로 없고, 그런 질문을 받더라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뭔가 추가적인 다른 이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순수한 목적을 넘어 선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기준으로 그것이 온전히 자기만족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

 

우리는 남에게 종속된 형태의 삶을 매우 싫어한다. 즉, 누군가에게 잘보이려고 살거나, 누군가에게 끌려다니거나 하는 식의 삶을 몹시 경계한다. 스스로 홀로 서고 싶어한다. 하지만 화장이나 근육을 늘리는 행위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결국 자신이 끝없이 누군가에게 잘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자기만족으로 끝나야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를 위해서 화장을 하는 여자라면, 성매매를 하는 여자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화장을 하는 많은 여자들은 이것을 몹시 경계한다. 외모를 가꿔서 직접적으로 이득을 얻는 여자들과 엮이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왜냐하면 결국엔 간접적인 이득을 얻을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이득이든 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본능적 행위들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선택적 행위들은 다른 이들과 관계 속에서 가치가 생겨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과, 누군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 그것을 왜 하냐고 묻거나 혹은 자기 마음대로 그 목적을 재단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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