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다정한 무관심

아이루다 2016. 1. 3. 06:30


아마도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읽었던 것 같은데,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이란 책이 있다. 뭐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유명한 책이기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아니, 못한다.
 
나는 지금 현재 이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이 책에 대한 나의 기억의 일부는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자신을 스스로 '이방인' 이라고 부르면서 이 책을 끼고 살았던 내용뿐이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다정한 무관심' 이란 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꽤나 깊숙하게 말이다. 그리고 이 문구는 까뮈의 이방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읽긴 했지만, 그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이방인이란 책.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진 부조리에 대한 환상은 '다정한 무관심' 이란 문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환상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 아니 그 속에 속한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위선에 대한 편견이었다.
 
나는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궁금해 했지만, 책은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훨씬 빠르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리고 검색 결과물들을 보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 이질감의 정체는 바로 '다정한 무관심' 은 위선에 대한 편견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왕자에서 나온 '길들임' 에 대한 정의 부분에서 그랬다.
 
나는 개인적으로 '길들임' 을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 나는 길들임이란 단어를 무엇인가에 익숙해지고, 고정되며, 종속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어린왕자 속에서 나오는 길들임은 전혀 달랐다.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 속에서 나오는 길들임은 진정한 관계를 의미했다. 길들이고 길들여짐으로 인해서 두 존재는 다른 무의미한 존재들과 달리 특별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다정한 무관심' 에 대한 나의 직관적인 해석은 거지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연상 되었다. 분명히 우리는 거지에게 돈을 줄 만큼 다정하다. 하지만 그들의 다정함은 거지와 우리들의 삶이 겹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혹시라도 그 거지가 자신을 오늘 집에 재워달라고 부탁하면, 분리된 삶이란 원칙이 깨진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거지의 부탁을 거절한다. 가능한 한 상대를 설득할 만 하고 스스로도 용납할 수 있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실 거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추운 겨울 밤을 보낼 따뜻한 장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것은 단지 추측이 아닌, 실제로 그럴 것이다. 요즘 같이 추운 겨울 날, 집이 없는 사람들이나 혹은 집이 있어도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우리들 개개인은 이 정도의 추측을 충분히 해 낼 능력이 있다. 우리는 정규 교육과정을 밟았으며, 타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필요한 것은 어떻게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 정규적인 교육을 평생 동안 받았다.
 
특히 우리는 자신이 필요한 것과 타인이 필요한 것을 어떻게 효율적이면서도 은밀하게 교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았는데, 그 교육의 결과로 인해서 우리는 직접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까지는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도를 예측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없거나, 딱히 바란다고 해서 해 줄 능력이 없다 싶으면, 더 이상 교환에 대한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상대의 필요에 대한 추가적인 예측은 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면서도 당장 명시적으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거지 앞에 높인 깡통의 존재를 보고는, 호주머니를 뒤져서 잔돈이나 혹은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서 넣곤 한다.
 
하지만 이런 다정한 행위 조차도 모두 행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면 거지는 금세 부자가 될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행위는 동전을 넣는 것에서 멈춘다. 돈을 주는 다정함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사실 거지에게 무관심하다. 우리는 깡통의 절규에 작은 보상을 해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만족이라는 행복을 얻는다. 스스로를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가 나의 다정한 무관심에 대한 해석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무정한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츤데레' 라고 해야 할까? 그냥 보기엔 무정하고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무엇인가를 신경 써주는 사람을 뜻한다. 요즘 한참 인기가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이 해석은 오해일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까뮈의 입장에서 다정한 무관심은 다른 듯 보인다. 물론 책을 읽지 않고 인터넷 검색으로만 책을 해석한 나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내가 찾아 본 이방인에 대한 설명들은 내가 해석한 것과는 차이가 났다.
 
특히 나는 다정한 무관심을 우리가 인간 관계를 맺을 때 필요한, 적절함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는 글을 보고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가깝지도, 멀리도 않는 관계. 이것이 다정한 무관심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나의 해석처럼 다정함이 무관심을 숨기는 위선의 목적이 아니라, 다정함이 무관심과 동등한 입장에서 다뤄질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사실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불과 같다. 너무 가까우면 데고, 너무 멀면 춥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끝없이 이 거리를 재지만, 정답은 없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모두 그 불꽃의 크기와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가갈 수 있는 거리는 다르다. 또한 멀어질 때도 언제부터 추울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평생 훈련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다. 우리가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나면,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고정시킨 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서, 나이 먹고 다른 사람 눈치 보는 것은 누구나 그다지 선호하는 일이 아니다.
 
두 남녀가 서로 감정을 두고 밀고 당기는 것을 '밀당' 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밀당도 20대에나 잘 되지, 30대만 되어도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40대가 되면, 밀당은 거의 없어지고 만다. 그 나이쯤 되면, 그런 감정 소모를 할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정답은 아니다. 사실 오답에 가까워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적절한 해석은 '소외'로 표현한 글이었다. 다정한 무관심이란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바로 '소외'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까뮈는 이 낯선 감정인 소외를 죽음을 앞둔 입장에서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표현했다.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나로부터 조차도 소외된 자신에 대한 친숙함. 끝없이 타인과 어울리려고 노력하지만, 또한 그만큼 상처받고 웅크려지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이상한 것이 아닌, 이해할 수 있고, 당연한 모습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거기엔 깡통에 동전을 넣거나 모른 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습이나, 가까이도 멀지도 않게 있기 위해서 끝없이 거리를 재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나,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술을 먹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모두 스며들어 있다.
 
우리들 중에서 누구도 원해서 태어난 이는 없다. 우리들 모두는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태어났다. 우리의 시작이 그러했기에, 우리는 평생 동안 타의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의적으로 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의 끝조차 타의적으로 끝이 난다.
 
우리는 삶의 시작과 끝에서 그 어떤 의지도 발휘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중간 과정에서만 의지를 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의적인 자의이다.
 
우리는 태어났기에 살아간다. 그리고 치열하게 산다. 누군가를 밟고 넘어가기도 하고, 져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아픔도 언제 찾아올지 가늠할 수가 없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이란 밧줄이 우리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듯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운명의 밧줄을 꽉 쥔 채, 의지를 발현한다. 결코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애쓴다.
 
하지만 어느 날 의도하지 않게 그 밧줄에서 떨어져서 추락을 하게 되는 날, 알게 된다. 자신이 평생 매달렸던 그 밧줄의 목적은 결국 매달려 있는 자의 추락이며, 자신처럼 수 많은 이들은 밧줄에 매달린 채, 혹시라도 버텨내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불현듯 느껴지는 이 낯선 감정은 어느새 익숙해지고 만다. 그 누가 매달려 있든지 상관없이 끝없이 흔들리고 있는 다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관심한 밧줄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그래서 다정한 무관심은 우리들 운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삶이 그렇다. 때론 잔인하게 때론 한없이 너그럽다. 우리는 언제나 너그러움을 원하지만, 불행은 언제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어 우리를 만신창이로 찢어 놓을지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비극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밧줄의 끝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엔 온전한 평화로움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수많은 버전의 종교 속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상관없이, 희망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밧줄에 매달린 채, 내일은 밧줄이 덜 흔들리기를 바라는 희망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희망이다. 그것은 그래서 욕망이다. 우리가 매달린 운명의 밧줄은 흔들림이 본질적 정체성이다. 그래서 그런 욕망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기어 올라서 목표로 갈 용기를 가질 수 있다. 흔들려서 떨어질까 봐 꽉 쥐고만 있다간 언젠가는 손에 힘이 빠져서 추락하게 된다.
 
그래서 결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젠 매달려 있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이미 태어날 때 충분히 당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왜 그 밧줄에 매달리게 되었는지,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왜 떨어지는지를 알려고 노력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다정한 무관심이란 소외를 받아들이고, 그 너머를 볼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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