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역할과 조화

아이루다 2015. 12. 26. 11:42

 
아마도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읽은 글일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로써, 그 제목도, 자세한 내용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어렴풋이 떠오르는 내용은,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작은 연주단 내에서 큰 북을 치는 역할을 맡은 아이가 가진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만에 갖게 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정도이다.
 
이 글에서 아이는 뒷자리에 앉아서 눈에 띄지도 않으면서 또한 맡은 역할도 아주 가끔 큰 북이나 쳐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아이는 사람들에게 좀 더 눈에 띄는 역할을 맡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갈등을 겪다가 아이는 결국 큰 북을 치는 자신의 역할이, 비록 빛나거나 혹은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 연주에 있어서 필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 글을 읽고 나면, 무대의 뒷자리에서 눈에 띄지 않게 큰 북을 쳐야 하는 아이가 갖게 되는 불만이나, 또한 전체 연주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큰 북을 쳐야 하는 것, 이 모두가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간다.
 
원래 인간은 누구나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욕망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못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은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다. 될 수도 없지만, 만약 된다고 해도 거기엔 혼란만이 존재할 뿐이다. 말 그대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주인공의 역할을 맡으면, 누군가는 조연을 해줘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체적인 조화가 이뤄진다.
 
그런데 이것은 아이가 소속된 작은 음악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거기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거기엔 멍청한 사람도 있고, 똑똑한 사람도 있다. 거기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거기엔 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다.
 
거기엔 소위 말하는 진상도 존재하고, 정말로 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늘 자기만 알고 사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고, 늘 남을 먼저 배려 해주는 이타적인 사람도 있다.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앞서나가는 사람도 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언제나 뒤로 숨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우울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물론 가능하면 당연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더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연주회에서 누군가가 중앙에서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 잡은 채로 피아노를 칠 때, 누군가는 뒤에서 눈에 띄지 않게 큰 북을 쳐야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선한 주인공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 주인공을 돕는 수 많은 조연들과 주인공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는 악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확대 시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기 힘들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밝음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어둠이 존재해야 한다. 사실 밝음의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밝음은 어둠이 없다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선함은 악함을 통해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용기는 비겁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태계에서는 먹는 자와 먹히는 자 모두가 필요하다. 먹히는 자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사실 먹는 자 역시도 결국 죽어서 썩은 후 또 다시 먹히는 자의 먹이가 된다. 이 순환은 생명체가 유지되는 한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회사 내에서도 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모든 직원이 일을 잘하면 좋겠지만, 그런 회사에서라면 누가 커피는 타는 것과 같은 잡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일은 조금 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잘 하려고 하지 않는 잡일을 해주는 직원이 있기에 다른 사람들은 잡일을 덜 하면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주연들은 조연들의 역할로 인해 빛이 나게 된다. 무대 중심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피아니스트가 있다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수 많은 연주자들이 있어야 한다.
 
더해서 모든 종류의 연주회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무거운 짐을 옮기는 역할을, 누군가는 무대를 설치하는 역할을, 누군가는 무대 진행 계획을 짜는 역할을, 누군가는 방청객을 안내하고 연주회장을 정리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드시 관객이 필요하다. 관객은 비록 돈을 내는 역할이지만, 관객이 없는 연주회는 정체성을 잃고 만다.
 
회사 내에서 일을 잘해서 눈에 띄는 사람은 더 많은 성과급을 받고 빠른 진급을 보장 받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더 좋은 대접을 받고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고 차이가 난다. 두뇌 능력, 육체적 능력, 외모, 노래 실력, 그림 그리기 실력 등등 모두가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것들이 조화가 되면, 각자는 절대 못해내는 것들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조화의 힘이다. 조화로움이 있기에 우리는 전체를 구성해낼 수 있다. 각자 모두 같은 모양이면 보기엔 좋겠지만,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다양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는 이 지구의 자연이 바로 조화로움의 결정판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서 전체 생태계를 이뤄내고 있다. 거기엔 단 하나도 불필요한 존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이것은 특별하게 배워서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큰 북을 치는 아이와 비슷했던 갈등을 통해서 또는 수 많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이것을 충분히 알게 된다. 세상에는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고, 절대로 모든 사람인 똑같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기만 한다.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것만이 최고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회사에 더 중요하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최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최고의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크게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한쪽에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알아주려고 하질 않는다. 그들의 역할은 필요는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심한 경우, 그런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하찮게 여긴다.
 
하지만 큰 북을 치는 사람의 역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음식에 들어가는 소금과 같다. 소금은 소량만 필요하지만, 음식 맛은 소금 간으로 결정되기 쉽다.
 
우리는 원래 각자 중요해야 한다. 비록 능력의 차이로 인해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렇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해 낸 사람들이나, 오늘도 조용히 있는지 없는지조차 인식하기 힘든 사람이나 똑같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찮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선입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이다.
 
이 세상에서 지금 이 순간 사라지면 가장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 분들이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청소를 하는 분들일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느 날 쓰러졌다는 대기업의 회장보다, 국민의 투표로 뽑힌 대통령보다 더 필요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청소하시는 분들이 사라지면, 우리는 악취와 함께 정말로 더럽고 병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흔하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공기와 같다. 공기는 5분내로 인간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흔하기에 무시된다.
 
인간의 몸에는 약 1kg 정도의 세균이 서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균은 우리를 생존하게 해주는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섭취한 음식들을 썩혀서 소화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몸 속의 세균들이 그것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세균들은 그냥 타고난 본능대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주변에 있는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그들이 활동한 결과를 흡수하여 에너지화 시킨다.
 
세상을 건강하게 해주는 원리는 단순하다. 그것은 다양성이다. 우리 몸 속에 있는 균을 모두 죽이면, 잠시간은 건강할 수 있지만, 우린 곧 죽게 된다.
 
시끄럽고 다양할수록 우리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관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가 무서워하고 외면하는 것들조차도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지식이 아닌 지혜로써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수 많은 존재들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배고픈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쫓아온다면 도망치거나 총으로 쏴야 한다. 이것을 생과 사의 조화로움을 위해서 웃으면서 기다리는 짓은 미친 짓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사자를 선과 악의 시점에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악한 것 이라고 부르긴 한다. 같은 균이라고 해도 해로운 균만 세균이나 병균이라고 칭한다.
 
우리는 그저 조화로움 속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퍼즐 조각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대통령 역할을 하든, 청소부 역할을 하든 그것은 역할 자체로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 단지 그 둘 사이엔 역할의 차이만 존재해야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역할을, 청소부는 청소부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청소부를 내려다 보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둘은 온전히 동등하며,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
 
조화로움 속에서 중요한 사람은 없다. 단지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은 끝없이 변하기에 영원할 수도 없다. 젊은 시절의 사자는 그 지역에서 공포의 대명사이겠지만, 늙은 사자는 하이에나 무리의 추격으로부터 도망 다녀야 할 처지가 될 뿐이다. 사자는 포식자에서 사냥감으로 그 역할이 바뀐 것뿐이다.
 
물론 늙은 사자를 동정할 수는 있다. 그리고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어떤 존재들이 가진 좋은 마음이다.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고 공감 능력이 준 선물이다.
 
아주 작은 관점의 차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면, 평생 동안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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