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일상

아이루다 2016. 1. 7. 10:08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자신만의 일상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활동, 즉 먹고, 자고, 싸는 행위 이외엔 공통적인 요소들도 많지만, 자신만의 나름대로 약간의 특징 있는 것들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주말이 되면 좀 더 크게 차이가 나게 된다. 주중엔 보통 일을 하거나, 육아를 하거나, 학교에 가거나,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놀거나 하는 것 중 하나를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주말엔 사람마다 활동성 여부와 어떤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곤 한다.
 
우리는 등산을 하거나, 운동을 하건, 사람을 만나거나, 술을 마시거나,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집에서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주변 산책을 하거나, 맛난 먹거리를 먹으로 가거나, 부모님 집에 가거나, 자식 집에 가거나, 각종 행사에 참가하거나 한다. 사실 이런 종류는 참 많다.
 
그리고 기본적인 활동과 개인적 활동 모두를 더하면 그것은 바로 일상이 된다. 특별하게 하는 일이 아닌, 그냥 평범한 시간마다 우리가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일상이다.
 
우리는 일상 이외에 행동을 하기도 한다. 큰 마음 먹고 해외 여행을 떠나거나, 근처 온천에 가기도 한다. 뭐, 이 조차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일상의 대상에는 꼭 무엇인가가 정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일상이 되기 힘든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긴 한다. 우주 여행을 하는 것이나, 보증을 잘못 서서 모은 돈을 모두 날리는 경험은 아직까지는 일상적이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특별한 경험들은 오래 기억에 남아서 인생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들의 삶의 90% 이상은 일상적 경험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 인생의 90%에 해당되는 것들은 바로 일상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들인 셈이다.
 
그런데 보통 일반적인 사람에게 일상은 늘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이 가진 의미는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익숙하고 반복적인 일들이지만 그것은 거의 대부분 지루함이나 권태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인간이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우리들의 기본적 성향 때문인데, 살림만 한 30년 가까이 한 주부들을 잡고 물어보면, 대부분 집안을 매일 청소해도 하루만 지나면 먼지가 쌓이는 현상에 지겨움을 토로한다.
 
이것은 꼭 집안 일을 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닌 사람들도 그런 면이 존재한다. 단지 직장은 반복적이긴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남들에게 자랑하거나, 인정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집안 일에 비해서 조금은 덜 지루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에 따라서 아주 가끔 일상적 삶에 지루함을 거의 못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럴까?
 
일단 아예 타고난 유형이 있다. 이들은 성격이 아주 부지런하고,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큰 부담이 없는 사람들이다. 반복의 지루함은 부지런함으로 극복이 되고, 그 일상적 삶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자신이 하기에 크게 무리가 없기 때문에, 그다지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것이다.
 
다른 유형은 변화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 사람으로써 병에 걸렸거나 죽음을 아주 가까이 경험했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기 쉽다.
 
마지막 유형은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일상적 행위들 조차 흥미롭고 재미있게 해내는 재주가 있다. 늘 새로운 요리를 연구하고, 집안을 할 때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신나게 한다. 그 어떤 반복적 행위들도 매일 다르게 해낸다. 그리고도 지루해질 것 같으면 언제든 여행을 떠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한다.
 
그렇다면 이 세 유형이 일상의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이외의 공통점이 또 있을까? 당연히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적 삶을 지루하거나 권태롭게 받아들이지만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당연하다. 우리의 삶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일상에서 불행함을 담당하는 지루함과 권태만 걷어낼 수 있다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다면, 일상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 행복하고 싶을 때면 일상의 제외한 10%에 집중한다. 즉, 우리는 특별함이라는 활력소를 찾아서 일상의 지루함을 극복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특별한 행동들은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해외 여행을 갔다 오거나, 일년에 한 번이나 가볼까 한 온천에 다녀오면 그날 하루나 혹은 그 전후로 며칠 동안은 약간의 기대감으로 인해서 괜찮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는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금새 쪼그라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일상적 삶에서 지루함과 권태를 느낄 수 밖에 없을까? 이것은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것이 반복적이기 때문에 그럴까? 그것이 남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이라고 그럴까? 그것이 익숙해서 그럴까? 그것이 하는데 전혀 긴장이 되질 않아서 그럴까?
 
물론 이런 이유들도 나름대로 적용 기능할만한 것들이긴 하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일상의 삶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게 지내는 것일까?
 
아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을 행복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 제시한 유형 중에서 두 번째 유형을 참고해야 한다. 그들도 원래는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특별한 경험이 그들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바로 일상의 삶조차도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변화이다.
 
사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의 행복을 얻는 방법이 바로 두 번째 유형이다. 우리는 죽다가 살아나면, 전 재산을 다 날려 먹으면, 직장에 잘려서 전전긍긍하면, 해외 여행을 갔다가 납치를 당했다면 그때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고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즉, 우리가 일상의 삶을 지루하고 권태롭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기대치 수준이 턱없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이 사실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를 잊어 먹었다. 왜냐하면 일상의 삶은 당연한 것이니까 그렇다. 일상의 삶은 전혀 감사할 대상이 아니다. 일상의 삶은 행운도 아니다. 일상의 삶은 선물이 아니라 이미 나에게 주어진 거의 절대적 권리이다.
 
방금 만나기 시작한 연인은 아주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길을 걸어도, 밥을 먹어도, 커피를 마셔도,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도 특별하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르면 둘은 여행을 떠나는 것 조차도 일상으로 느끼게 된다. 심지어 섹스도 일상적으로 한다.

 

하지만 둘이 헤어지고, 각자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 이것은 반복된다.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우리는 낯선 일을 할 때 불편함과 긴장을 느낀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점점 익숙해지고 편안해질 때 행복함을 느낀다. 이것은 서서히 진행된다. 그렇지만 익숙하고 편안해진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루해지고 반복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만약 중간 단계엔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을 행복한 상태에서 멈출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일상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렇게 하기가 많이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직장을 잡고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 조차도 당연한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그다지 무리한 것은 아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대형 병원에 가서 하루만 있어봐도 두 다리로 걷는 것만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쉽게 변화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을 땐 행복하고 감사해 하지만, 하루만 지나도 당연히 자신이 가져야 할 것으로 바꿔버리고 만다.
 
이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경험이 늘어나고, 가진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우들이 늘어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나이가 먹을수록 점점 더 불행해진다.
 
사실 나이를 먹는 것이 가진 위험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현재 보통 나이를 먹었을 때 가장 걱정되는 것으로써 노후의 경제적 문제를 꼽고 있지만, 사실은 일상의 삶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 훨씬 더 위험하다.
 
젊은 시절엔, 같은 일상이라고 해도, 돈을 좀 쓰면 덜 지루한 일들이 있었다. 좀 먼 곳까지 맛난 것을 먹으로 가거나, 밤에 친구를 만나 진탕 술을 먹거나, 놀이 공원에 가거나, 영화를 보곤 했다. 이런 행위들은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일상과 특별한 일 사이에 중간 지점에 있기도 해서 그다지 지루하진 않다.
 
하지만 빈곤해진 노후엔 이런 일상적 행위를 즐기는 것 조차 하기가 힘들어 진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먹고, 자고, 싸는 일상 위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매일 매일 반복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랬던 시절은 과거에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돈이 없었다. 그렇지만 노후 때와는 달리 행복했다. 우리는 돈이 들지 않고도 재미있게 놀았다. 경험의 부재, 몸의 활력 등이 가져다 준 행운이었다.
 
우리는 축구공 하나만 있어도 재미있었고,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친구들과 하루 종일 재잘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다가 천원이라도 생기면 근처 가게로 가서 뭔가를 사먹었다. 그것이 불량식품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먹을 땐 마냥 맛있었다.
 
그랬던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변한다. 이것은 단지 신체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변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마음이 변한다. 그런데 이 변화의 방향이 그리 좋지 않다.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절망적으로 바라보고, 좀 더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사기를 안 당했어야 하다 보니, 험한 꼴을 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변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변했다고 인정하면 끝일까? 과연 우리들 개개인은 이 변화에 대해서 그 어떤 책임도 없는 것일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이 변화로 인해서 우리가 어린 시절에 느꼈던 행복을 다시는 못 느끼는 것이 좋은 일일까?
 
아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아니고, 우리는 모두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명백하게 책임이 있다. 우리는 수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가 좀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선택을 했다. 우리는 천원이 있으면 천 원짜리 과자를 집어 들었고, 만원이 있으면 만 원짜리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비싼 것을 집었다.
 
물론 그것이 좀 더 건강에 좋고, 좀 더 맛있어서 그랬을 수는 있다. 그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이제 돈이 줄어들 때, 우리는 다시 만 원짜리를 내려놓고, 천 원짜리를 집어 들 수 있을까? 그것만 가능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욕망을 크게 하는데 쓰여졌다. 그리고 능력도 되어서 실제로 그 욕망들을 채웠다. 그런데 우리는 욕망을 줄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줄이지 못하고 강제로 찌그러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어진 상황에 억눌려서 그렇게 된다.
 
이것은 바로 살아오면서 일상을 어떻게 다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우리가 어떤 것까지 일상으로 포함시켰는지 여부와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사는데 얼마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일상에 속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들이 당연하면 당연할수록 우리는 점점 위험한 위치로 몰린다.
 
물론 운이 좋은 이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젊은 시절과 다름없는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험요소는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몸이 늙는 것이다. 늙은 우리는 결코 축구를 할 수 없다. 늙은 우리는 멀리 여행을 하는 것도 힘겹다.
 
그래서 결국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결국 늙어감이 바로 불행함으로 변환된다.
 
하지만 이 현상은 모든 인간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특히 대한민국에서 나타난다. 사실 복지가 잘되어 있는 유럽 국가에서는 노후의 행복이 어린 시절과 맞먹을 정도로 높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들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그들과 다를까? 우리는 단지 그들처럼 연금이 없어서 그럴까? 아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성의 차이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지금 좀 많이 잘못된 방향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비교 행복'이다.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얻는 행복은 결국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더해서 우리는 '복사 행복'을 추구한다. 즉,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행복하게 하는 일을 따라 한다. 그래서 행복할 수는 있지만, 온전히 자신의 행복은 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일상의 행복’을 잃어 버렸다. 집안 일을 하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집안을 가꾸고, 집 수리를 하고, 장을 보고, 이웃과 담소를 나누는 행복을 잃어 버렸다.
 
모든 일상적 일들은 빨리 빨리 해야 할 일이 되었고, 전투를 치르듯 했다. 이미 한번 지겹고 귀찮은 일은 다시는 즐거운 일이 되기 힘들다. 우리는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았기에, 그것들을 하는 것은 불행할 뿐,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행위에 집중했고, 형식에 치중했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고, 남들이 하면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은 해야 할 일 투성이였다.
 
그래서 이런 스트레스를 벗어나고자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일을 계획했다. 그러자 삶은 점점 불행한 일상과 행복한 특별함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분리된 것들은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점점 더 고정되었다.
 
하지만 특별한 것들을 하는 것은 대개 돈이 들었다. 그러니 노후에 돈이 없다는 말은, 결국 일상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과 완전히 동일한 뜻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럴 수 밖에 없을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이래야 할까?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다른 뜻에는 바로 삶의 연륜이 쌓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반드시 좀 더 현명해지고,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이를 통해 얻는 지혜는 일상적인 삶을 좀 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다. 현명해진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일상과 특별함 사이의 벽을 허물어서 모든 것을 일상화 시킬 수도 있고, 모든 것을 특별함으로 만들 수도 있다.
 
사실 행복하다면 어떤 변화도 가능하다.
 
단지 문제는, 늙음이 현명함과 지혜로움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각자 삶 속에서 부단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점이 되고 만다.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 결코 지혜로울 수는 없다. 우리는 각종 경험을, 성찰을 통해 자기 성장의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결코 경험만 가지고는 성장할 수 없다. 사실 경험은 우리를 좀 더 나쁜 방향으로 끌기가 쉽다. 대부분의 경험은 그냥 많은 익숙함과 고정됨을 가져다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로 걱정해야 할 것은 노후에 필요한 돈이 아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노후에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 이다. 사실 몸 하나 뉘일 공간과 겨울에 따뜻하게 난방을 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수준만 되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과 특별함을 구분하는 한, 결코 이것을 만족시킬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젊은 시절부터 몸에 익은 소비의 행복과 각종 특별한 경험을 추구해야 하기에 추가적인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후의 삶 조차도 자꾸 해외 여행이나 외식을 몇 차례 하는지 여부를 가지고 삶의 질을 판단하려고 한다.
 
뒷산에 올라 이름 없는 나무를 바라보고,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쉼 없이 재잘대는 새의 소리를 듣고, 파란 하늘, 비 오는 하늘을 볼 수 있으며, 겨울철 따뜻한 햇살이 주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사실 돈이 그다지 필요 없음에도 우리는 이미 그런 것들을 느낄 감성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그냥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 읽는 기쁨도 잃어버렸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이런 것들을 갖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 많다.
 
우리는 누구나 늙을 것이지만, 어떻게 늙느냐는 오직 자신의 삶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찌그러질 것인가, 스스로 줄일 것이냐는 오직 우리들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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