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착함증 스트레스

아이루다 2015. 11. 2. 09:16

 
세상엔 참 많은 고민이 있는데, 그 중에서 흥미로운 고민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착함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로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민은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다. 예전부터 인간은 착한 것을 좋은 덕목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사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착한 것으로 고민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었다.
 
그래서 요즘 시대는 착한 것을 무조건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현 시대에서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착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신의 착함에 대한 집착은 많이 줄었다. 즉, 착함에 대한 선호도는 있지만, 자신의 착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어떤 문제들이나 혹은 손해 입는 것을, 착한 것은 좋은 것이란 명목 하에 그냥 방치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특히 요즘은 이런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많이 공유되었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하소연들이 늘어가면서, 많은 곳에서 '착하게만 살려고 하지 말아라' 라는 조언들이 퍼지고 있다.
 
사실 착하게 사는 것은 좋으나,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착할 경우, 그 당사자는 큰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조언은 매우 중요하게 새겨들어야 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좀 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사실 착하게 사는 것은, 산다기 보다는 살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착하고, 못되고를 결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이 문제는 심각해진다. 착하게만 살 때는 그냥 그것으로 오는 서운함, 손해, 기분 나쁨, 배신, 상처 등의 감정으로만 괴로웠다면, 이젠 자기 자신, 즉 상처 입고도 말도 잘 못하고, 큰소리도 못 내고, 자신의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비하까지 더해진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과거엔 자신에게 못되게 군 사람만 미워하고 살면 그만이지만, 이젠 자신의 문제까지 되돌아 봐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실 착하게만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제대로 그것을 해내면 좋지만, 이런 식으로 못되게 구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손해는 손해대로 자신에 대한 비하는 비하대로 일어난다. 그래서 차라리 그 조언이 없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조언을 제대로 실행해내지 못할까? 우리는 왜 의지에 상관없이 남들에게 착하게만 굴게 될까? 우린 왜 남들처럼 좀 더 못되게 굴지 못할까?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착함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중요하다.
 
흔히 우리는 착함과 못된 것을 선과 악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착한 것은 좋은 것으로 선한 것이고, 못된 것은 나쁜 것으로 악이 된다. 뭐 여기까지는 그럴 듯 하다.
 
문제는 그것이 선과 악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서 그 판단이 옳고 그름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착함을 선하고 옳은 것으로 여기고, 다른 이들의 못됨은 악이고 그른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도덕적 우월성이 발생하고, 좀 더 심하면 절대적 당위성 까지도 주어진다. 즉, 착한 것은 못된 것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것은 남들 앞에서 말 할 때도, 누군가를 평가 할 때도, 스스로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할 때도 늘 동일한 기준점으로 판단한다. 즉, 어떠한 경우라고 해도 착한 것이 옳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다. 왜냐하면 착한 것은 결코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착한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가진 복잡한 셈법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아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관계들은 모두 각자만의 계산법이 있다. 그것은 어떤 위치에, 어떤 능력으로, 어떤 역할로, 어떤 태생적 관계로, 어떤 의미로 관계가 맺어있냐에 따라 천지차이가 난다.
 
가장 흔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는 부모는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계산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줘도 손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자식 역시도 그것과 비슷하지만, 부모와는 달리 한계가 명확하다. 사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만큼 착한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자식에게는 착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착한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식과의 관계에서만 착할 뿐이다. 그리고 그 착함의 이유엔 자신의 핏줄이란 이유도 있지만, 노후의 자신을 돌봐줄 것이란 막연한 기대도 존재한다.
 
사장과 직원들과의 관계는 부모 자식과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장은 인사권을 가진 존재이고, 직원은 사장의 의지에 따라 직장 내에서 어떤 일을 당하지 모르는 사람이다. 물론 이 역시도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아무튼 사장은 상황에 따라 자기 기분대로 못되기도 하고, 착하게 굴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직원들은 기분에 상관없이 사장에게 착하게 군다. 그렇다면 사장은 못된 사람이고, 직원들은 착한 사람일까? 아니다. 그 사장 역시도 언젠가는 직원이었던 적이 있었다.
 
부모 자식이나, 사장과 직원 관계는 수직적인 느낌을 주지만, 친구들과의 관계는 수평적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좀 더 복잡한 셈법이 나타난다. 즉, 서로가 상황에 따라서 착하게 굴기도 하고, 못되게 굴기도 하는 것이 반복된다.
 
인간의 관계는 모두 주고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 주고 받는 것을 물질적으로만 규정하면, 이 말에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주고 받는 것에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우리는 돈 뿐만 아니라, 위로도 주고 받고, 정도 주고 받고, 사랑도 주고 받는다. 주고 받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주고 받는 것은 100원을 주면 100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거래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떡을 주면 과일을 받기도 하고, 병문안을 오면 결혼식에 참석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 계산은 그리 쉽게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우리가 관계를 맺고 주고 받기를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이다. 같은 고구마라고 해도 지금 배가 고파서 쩔쩔매고 있는 사람에게 군고구마의 가치와 방금 뷔페에 가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온 사람에게 군고구마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시간이 지나 소화가 다 되고 나면 또 달라진다.
 
이렇듯 모든 것들의 가치는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니 우리는 그때그때마다 자신에게 가치가 최소환 된 것을 타인에게 주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가치가 있는 것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초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에게 좋은 태권도 학원 정보는 매우 중요하지만, 이제 대학생이 된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아무 쓸데 없는 정보이다.
 
이렇듯 정보 역시도 사람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시시각각 가치가 변한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것을 주고 받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필요성과 타이밍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알수록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보나 기타 필요한 물건을 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심지에 정신적인 위로를 받거나 같이 만나서 담소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다. 서로 시간이란 가치를 투자해서 행복이라는 이득을 얻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우리는 누구나 관계에 있어서 손해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관계에서 손해를 입으면, 아니 입었다고 생각들면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것 자체가 너무 복잡하다. 돈은 나름대로 쉽게 계산되는 것 중 하나지만, 그 화폐를 발행한 나라가 망하는 순간, 종이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들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변하고,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고, 시시각각 변해가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삶은 늘 이것을 계산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물론 이 과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우리는 관계의 종류에 따라 다른 계산법을 적용시킨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간의 계산법이나 사장과 직원간의 계산법은 친구들과의 계산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부모에게는 좀 더 이득을 얻는 방향으로 계산하고, 사장에게는 버틸 수 있는 한, 손해를 보는 방향으로 계산한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 친구의 계산법과 맞춰서 계산한다.
 
우리 인간이 처음 관계를 맺을 때는 바로 이 계산법을 맞추는 과정이 선행된다. 그리고 이것이 잘 맞으면 서로 잘 맞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기본적으로 이것조차 잘 맞지 않으면, 아예 관계가 시작될 수도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밥을 사면, 상대가 커피를 사거나 아니면 다음 만남에 밥을 사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 횟수를 기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일방적으로 밥을 사고 있는 상황이 인식이 되면, 스스로 의문이 든다. 저 사람은 나를 왜 만날까? 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라고 말이다.
 
친구들도 그 친구가 가진 능력, 배경, 성격, 같이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잘 맞음, 현재 상황, 자신의 처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계산법이 적용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늘 밥을 사도 아깝지 않고, 누군가에게 한 번을 밥을 사도 반드시 다음엔 얻어 먹어야 손해 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남녀가 처음 만날 때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이 데이트 비용을 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그것에 대한 근거는 전혀 없음에도 그렇게 믿는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계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계산법, 사회적으로 알려진 계산법, 자신이 속한 가족내의 계산법이 모두 다르다.
 
그러니 우리가 이 계산을 제대로 잘 해서 늘 마음에 드는 결과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이유는, 사실 계산을 제대로 할 능력이 안되어서 손해를 입는지, 이득을 얻는지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손해를 보는데도 이득을 얻는다고 착각하고 산다.
 
그렇다면 누가 이득을 볼까?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적 능력이다. 지금까지 말한 계산법은 정말로 계산법이다. 물론 수학공식은 아니지만, 인간 관계에서의 계산법 역시 비슷한 원리이다. 아주 많은 요소를 가지고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과장이다. 따라서 손에 쥔 정보와 그것을 복합적으로 계산하는 사고력이 무척 중요하다.

 

따라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그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또한 당연히 계산도 잘할 수 밖에 없기에, 상대적으로 이득을 많이 얻는다. 그리고 이들이 얻는 이득은 주로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보는 손해로 발생된다.
 
단지 머리가 나쁜 사람들은 손해를 봐도 손해를 본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불만없이 산다. 그리고 머리가 나쁠수록 단순한 이득과 손해, 즉 눈 앞에 있는 것에 대한 것에 심하게 집착한다. 더 많은 요소를 포함시켜야 하는 미래의 이득은 이들에겐 너무 버거운 계산이다.
 
물론 반대로 너무 먼 미래의 이득만 계산하다가 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당장의 이득만을 보고, 어떨 때는 먼 이득을 봐야 한다. 단지 평균적으로 미래의 이득을 계산하는 능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최종적으로 이득을 볼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 인간 관계에서 숨겨진 계산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착함과 이 계산법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착하다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바로 이 계산법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착한 사람들은 이득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그래서 손해를 볼 때, 그것을 아예 인식하지 못한다. 결국 착한 사람들의 계산법에는 손해가 아닌 것이, 다른 덜 착한 사람들의 눈에는 손해로 보인다.
 
물론 착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이득으로 보지 않는 것을 이득으로 챙기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손해를 보지 않는다. 남들에게 자신이 한 요리를 나눠주는 사람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통해 만든 음식을 손해보고 있지만, 사람들의 신망과 선호도와 자기만족이라는 이득을 거둬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착한 사람들은 자신의 착함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착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를 하거나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은 문제가 된다. 즉, 착하게 사는 것은 그 자체로도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착하지도 않은데 착한 척을 하고 산다.
 
사실 착한 척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초반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우리는 누구나 관계에서 이득을 얻기 바라기에 자신이 사귀어서 이득을 얻을 것 같은 사람을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인간 관계를 잘 맺으려면, 착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초기 계산 공식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 했던 착한 모습으로 두 사람 간에 계산 공식이 결정되기 때문에, 착한 척을 한 사람은 그 후에 그 착한 척을 유지해야만 그 관계가 유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바꾸려고 할 때면 갈등이 일어난다. 한쪽에서 계산식을 바꾸려 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한번 결정된 계산식을 잘 바꾸려고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비록, 그 계산식이 두 사람간의 관계에서 자신이 최대한 상대에게 배려해준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 적용된 계산식이 자신의 마지노선인 셈이다. 그래서 더 이상 물러서면 손해를 입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것을 바꾸려고 하면 큰 반발이 일어나서 거부를 한다. 이때 잘못되면 관계가 깨지고 만다.
 
그래서 착한 척을 했던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착한 척을 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긴 했는데, 계속 맺자니 계속 손해를 본다. 거기다가 상대는 틈만 나면 자신이 더 유리한 상태로 계산식을 바꾸려고 한다. 이것은 사실 끝이 없다. 발을 뻗었는데, 상대가 크게 반발하지 않으면 더욱 더 뻗는다.
 
누구나 누울 자리를 보고 눕는다는 말은 진정한 의미로 우리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냐, 착한 척을 하고 있는 사람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착한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만약 혹시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착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범생 증후군이나 착한 여자 증후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누군가의 기대치에 부흥하려는 무리한 욕구와 누구에게나 사랑 받고 싶어하는 여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니다.
 
그러니 이것들은 '척'을 하는 것이고, 우리는 누구나 '척'을 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 받거나, 서운하거나, 배신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상대를 바꿔야 할 것은 아니다. 물론 계산법을 재정의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상대의 반발을 어떻게 무마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추가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차라리 그것보다는 잘못 정의된 관계는 그냥 끊어버리는 편이 낫다. 만약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 만남을 끊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치명적인 무엇인가를 상대가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치명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
 
그것은 영화를 같이 봐 줄 사람일 수 있고, 음식을 같이 먹어 줄 사람일 수 있다. 그것은 주말을 같이 보낼 사람이거나, 어딘가 여행을 같이 떠나 줄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 치명적 단점을 없애야만 그 관계를 끊을 수 있다.
 
물론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더 이상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본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가능하면 자신의 본 모습을 다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절대로 척을 해서는 답이 안 나온다.
 
과거의 관계가 그랬다면, 미래의 관계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자신이 착한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남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다. 개인적인 매력이 거의 없어서 그런데, 이럴 때는 어쩔 수 없다. 전략적으로라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그나마 관계조차도 없어진다.
 
단, 이때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자신의 매력을 착한 것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가 의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매력 중 하나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들여서 자신만의 매력을 만들어 내야 한다. 사실 운동을 잘하거나,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미술을 하거나, 특이한 활동을 하는 것 모두가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꾸준하게 노력해야 한다.
 
착한 척을 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만의 계산식을 그렇게 정한 것뿐이다. 결코 우리가 믿는 그대로의 의미대로 착한 사람은 없다. 일반적으로 착해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득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뿐이다. 그들은 갈등보다는 평화를, 돈보다도 마음의 따뜻함을 더 좋아한다.
 
결론적으로 착함 병에서 벗어나는 가장 첫 걸음은, 자신의 착함에 대한 정당성을 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계산식을 고치고, 관계 속에서 더 유리한 고지에 서려고 노력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돈만 많아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연락을 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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