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잘난척 본능

아이루다 2015. 9. 21. 18:46

 
보통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몇 가지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들에는 식욕, 성욕, 배변욕, 수면욕 정도가 있다. 좀 더 전문적인 영역으로 가면 이것 말고도 추가적인 것이 더 있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서 잘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사실 잘나고 싶은 욕구는 본능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잘나고 싶어하는 욕구는 다른 본능적 욕구에 비해서 좀 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을 뿐, 사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능적 욕구라고도 할 수 있다.
 
동물 세계에서는 짝짓기 때 한시적으로 일어난다. 거의 모든 동물들은 짝짓기 시기가 다가오면, 털을 풍성하게 하거나 몸을 기묘할 정도로 변형시켜서 상대를 유혹하다. 우리 인간의 눈에 보기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이지만, 각자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잘난 척을 한 것이다.
 
보통 이런 행동은 수컷에게서 나타나는데, 수컷들은 암컷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외모를 잘나 보이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인간들 역시도 상시로 그런 행동을 한다. 물론 동물들은 인간과는 달리 매우 노골적이다.  인간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노골적인 행동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의 세계까지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인간이 잘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것은, 생존본능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잘난 척 본능은 식욕이나 성욕처럼 본질적 본능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실 거의 거기에 근접할 수준으로 기본적인 욕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평생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위해 노력하고, 생각하고, 증명하고, 자랑하고, 기뻐하고, 좌절하고, 결국 그것을 통해 행복해 하면서 살아간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인간이 잘난 척을 하는 것은 삶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물론 아닌 상황들도 있다. 우리는 맛난 음식을 먹거나 멋진 광경을 볼 때, 잘난 척에 대한 욕구를 거의 가지지 않은 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할 때는 그때 감정보다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을 한 자신에 대한 자랑으로 변한다.
 
그것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거나, 여유가 되었거나, 어떤 도전을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졌거나, 함께 할 사람이 있었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며, 이 자부심을 갖는 것이 바로 잘남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일반 생명체에게 있어서 잘난 척은 자신의 후손을 남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절박한 문제였다. 하지만 자기 인식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은 이제 그 수준에서 만족하기가 어렵다.
 
우리 인간은 원론적으로 지구의 생태계 속의 일부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가 독립된 존재이고 싶어한다. 우리는 개미나 아메바처럼 무의미하게 태어났다고 죽어서 사라지는, 그리고도 아무도 그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을 꽤나 두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런 무의미한 것들과 분리되어야 했고, 당연하게도 각자마다 유일한 존재의 의미가 필요해졌다. 이것 역시도 잘나고 싶은 욕구에 깔린 숨겨진 욕망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가진 잘나고 싶다는 본능은 아주 여러 가지 기저 원인들로부터 만들어진다.
 
첫 번째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짝짓기를 위한 것이다. 잘난 존재는 이성을 찾기도, 결혼을 하기도 쉽다.
 
두 번째는 남들과 구분되는 자신이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만의 특이성이다. 개미 무리에서 다 똑같이 생긴 개미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해 보인다. 남들과 뭔가가 다를 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세 번째 잘난 사람일수록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요즘 세상처럼 외모가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사회에서라면 더욱 더 그렇다. 외모만 특출 나게 태어나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물론 뛰어난 두뇌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이 중요하다. 운동 능력도 그렇다.
 
네 번째 우리는 누구나 의미 있는 존재이고 싶어한다. 이것은 특이성이나 이득과는 또 다른 욕구이다. 이것은 태어나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존재의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어떤 이유로 인해 태어났기를 바라고, 죽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천국과 같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특히 이 네 번째 목적은 종교와 결합되면서 아주 대단한 효과를 일으켰는데, 사실 많은 종교가 인간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지속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네 번째 목적에 아주 적합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잘남 그 자체가 주는 장점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잘났다는 것은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나 재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느끼는 호감이 바로 그 정체이다.
 
여섯 번째는 결국 잘난 것은 자신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물론 이 이유는 위의 나머지 다섯 가지 이유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엔 행복하기 위해서 잘나고 싶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기대만큼만 잘날 수 있다면, 평생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세상엔 잘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있긴 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남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우리가 자신이 잘남에 만족하기 힘든 이유는, 그 잘남에 대한 증거가 스스로 주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타인의 냉정한 평가로 인해 증명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아무리 스스로 잘났다고 여겨도 남들의 평가가 따라오지 못하면, 결국엔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좋은 판단을 얻어내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한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의견은 각 분야에서 늘 1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과연 1등이 얼마나 되며, 또한 1등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만약 어떤 사람이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1등을 했고, 평생 동안 그 누구도 그 사람만큼 그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내지 못했다면, 가능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로 특출 나게 잘난 사람은 매우 드물다. 또한 그런 사람일지라도 결국엔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가정일 일수도 있고, 결혼생활일 수도 있다. 혹은 자녀를 키우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대단한 성취를 보인 사람이라고 해도,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잘남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이니, 누가 남들에게 충분히 만족할 수준으로 잘남을 인정 받을 수 있을까?
 
결국 우리 인간들 대부분은 잘남을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증명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이 부족한 잘남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우리들 모두는 평생 동안 잘남을 증명 받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가게 된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만족한 사람들은 꽤나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잘남에 대해 좀 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마치 그들은 잘남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 만족하기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그냥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서 먹을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과 유사한 상태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난 척을 하는 것을 꽤나 경계한다. 누구나 잘난 척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별 근거 없이 잘난 척을 했다가는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그것은 마치 누구나 먹고 싶어하는 맛있는 식사를 앞에 두고 있는 경우와 같다. 이때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마구 그 음식을 집어 먹으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게 된다. 다들 대놓고는 말을 안 하지만, 그 음식을 탐내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그렇게 티 나게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은 다음엔 절대로 초대받지 못한다.
 
잘난 척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잘난 척을 하고 싶어하는데, 어떤 한 사람이 너무 심하게 잘난 척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두 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바로 그 잘난 척을 들으면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자신도 잘난 척을 하고 싶은데 기회를 뺏긴 데에 대한 불만이다.
 
이 두 가지 모두는 당사자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잘난 척을 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맛나 보이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와 같다.
 
사람들이 잘나고 싶어하는 만큼 잘난 척을 하는 경우는 사실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매일 하고 있는 말만 주의 깊게 들어도 금새 그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의견이란 명목 하에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 숨겨진 의미들은 자신의 잘남에 대한 증명을 하고 타인들에게 인정하라는 은연 중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물론 이것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잘난 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SNS가 그런 역할을 하는데, 그래서 요즘 인기가 폭발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인간은 말이나 글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할 때, 자신의 잘남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를 늘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이것은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학 연구 논문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소설 속에서도 존재한다.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것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잘나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만들어 낸 많은 대단한 것들과도 연관되어 있다. 즉, 우리는 이 잘나고 싶은 욕구로 인해서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견디면서 누가 봐도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건축물로, 연구 결과로, 뛰어난 발명품으로, 위대한 사상으로 표현된다.
 
사실 인간 문명이 바로 이 잘나고 싶다는 본능으로 인해 발전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심지어 우리의 잘난 척 본능은 배가 아무리 고파도 먹지 않고 버티게도 만든다. 사실 다이어트가 그것이다. 물론 건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다이어트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모를 위해서 다이어트를 한다. 즉, 좀 더 잘나고 싶어서 좀 더 본능적인 식욕마저도 억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잘나고 싶은 욕구는 다른 모든 욕구를 뛰어 넘을 정도로 강렬하다.
 
자신이나 혹은 자신과 마주 앉아 대화하고 있는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본 경험을 했다면, 그 많은 대화 속에 은연중에 숨겨진 잘남에 대한 욕구를 감지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특히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수 많은 말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잘남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놀랄 수도 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잘남을 대놓고 표시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고, 겸손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잘난 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며, 어떤 일을 할 때 느껴지는 많은 다양한 기분 중에서 가장 남들에게 이야기 하기 좋은 것만을 설명하기 때문에 스스로 인식하기가 힘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길을 가다가 어떤 곤란한 일을 겪은 사람을 도와줬을 때, 우리는 생각보다 기분이 좋을 수 있는데, 그것에는 많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이 자신의 잘남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는, 그 사람의 곤란함을 해결해준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의만을 이야기 한다. 즉, 우리는 자신을 좀 더 순수하고 선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도 잘난 척의 일종이다. 우리는 보통 선하고 순수한 사람을 좀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엔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러니 결국 이 역시도 순수함과 선함의 분야에서 잘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을 설명할 때도 신나서 이야기 한다.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그리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때는 서로 옳다고 우긴다. 왜냐하면 자신이 옳아야 더 잘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잘나고 싶어할까?
 
물론 잘나고 싶은 이유는 이미 설명을 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우리는 왜 잘나고 싶어할까?
 
사실 우리가 잘나고 싶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좀 더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잘나고 싶은 이유가 되는 이득을 얻거나 행복하거나 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그것들은 모두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잘난 척을 하다가도 누군가 머리에 총을 대고 개처럼 짖으라고 하면, 누구나 개처럼 짖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잘난 척은 생명이 위협받거나 큰 손해를 입게 된 경우가 되면 금새 쪼그라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매우 의기소침하고 자존감이 바닥이 된 사람이 되고 만다.
 
물론 총구를 들이대도 짖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로, 잘남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이 너무 강하고, 잘남에 대한 가치가 생명을 뛰어 넘는 사람들이다. 즉, 잘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서 자신의 생명조차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들마다 수면욕, 성욕, 식욕이 차이가 나듯, 잘난 척의 욕구 역시도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욕구가 너무 강하면, 사실 살기가 좀 힘들다. 잘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자신의 잘남에 대한 기준점이 너무 높은 상황을 의미하는데, 그럴 때 능력이 따르지 못하면 꽤나 심한 좌절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남에 대한 욕구와 그것을 달성하는 정도에 따라서 행복도가 결정되는데, 이때 잘 이뤄내지 못한 경우엔 삶이 불행하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껏 조절해야 한다.
 
또한 잘나고 싶은 욕구가 강해서 자신도 모르게 끝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 놓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자신의 잘남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은 그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기회만 되면 자신의 잘남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면서 인정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의 잘난 척에 정이 떨어진다.
 
결국 잘남에 대한 욕구는 조절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너무 식탐이 강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힘들듯이 잘남에 대한 욕구가 적절히 조절되지 않으면 불편하거나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 잘남의 욕구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으며, 결국에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불행하다면 당연히 버려야 하는 것이 좀 더 현명한 판단이다.
 
행복하고 싶어서 잘나고 싶은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고 불행해졌다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왜 잘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답을 찾은 사람은 잘나고 싶은 욕망이 매우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기회는 어떤 의미에서 잘나고 싶으나 하지 못해서 좌절한 사람이 잘난 사람들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지혜로움을 얻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살이 많이 찐 사람이 살을 빼고 변화를 꿈꿀 수 있는 것처럼 그렇다. 모든 것이 단점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힘들게 좌절을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도 모르게 삶을 살아가는데 중대한 조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실 타고난 부자나 잘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행복하게 살겠지만, 그들은 삶의 한쪽 면만을 보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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