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허무주의의 시대

아이루다 2015. 7. 16. 10:24

 
당위성이란 단어가 있다. 굳이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아도, 무엇인가에 대한 합리적이거나 타당한 이유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자. 우리 각자의 삶은 과연 얼마나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이 살아야 할 무엇인가 확실한 이유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당위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볼 사람이 필요하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한, 가족 관계를 삶의 당위성에 대한 가장 흔한 근거로 댈 것이다. 특히나 자식을 가진 부모는 더욱 더 그것에 대해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목숨보다 더 소중히 사랑하는 사람이나 함께 있어서 너무도 행복한 친구 등도 그것의 후보가 될 수 있으리라.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통해서 당위성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라면 더욱 더 그럴 수 있다.
 
치사율 100%의 치명적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에서, 그 바이러스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박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삶의 당위성을 갖게 될 것이다.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 역시도 당위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며, 자신이 삶을 살아가면서 아직 해보지 못한 수 많은 일들이 가득 있어서 끝없이 살고 싶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영생을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종교 안에서 신을 믿는 사람들 역시도 비슷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은 신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딱히 당위성을 따로 찾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당위성이 생긴다. 각 종교에서 자살을 금지하는 것도 일종의 그런 맥락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자살은 신이 부여한 삶의 당위성을 스스로 거부하는 짓이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행복한 사람도 그럴 수 있다. 행복함이 당위성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고 흐름의 오류가 있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행복한 사람은 절대로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열한 절대적이지는 않아도 그나마 인정해 줄만한 당위성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어떤 당위성을 가질 수 있을까? 가족도, 사랑도, 친구도, 중요하게 해야 할 일도, 꼭 해보고 싶은 일도, 종교도 없고, 지금 행복하지도 않는 사람들말이다. 그런데 슬픈 점은 이 세상엔 이런 사람이 꽤나 많다는 것이다.
 
수백 년 전쯤, 인류가 아직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하지 못했을 때, 우리 조상들은 각가지 종류의 당위성을 가지고 살았었다. 특히 유럽 쪽에서는 주로 기독교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당위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유럽의 좋은 시절은 19세기에 나타난 천재 철학자, 니체의 선언을 통해 끝이 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함으로써 삶의 당위성 혹은 절대적 의미성을 부정해버리고 만다. 사실 니체의 그 한마디엔 19세기까지 진행된 자연 과학의 발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뉴턴을 필두로 한 다양한 자연과학 법칙의 발견과 진화론을 발표한 다윈의 입장이 바로 신이 죽었다는 근거로 활용이 되는 것이다. 신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세상은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했으며, 이것은 우리들 개개인의 당위성에 대한 절대적 근거를 흔들어버리고 말았다.
 
즉,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인해서 신이 줬던, 절대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당위성을 갖지 못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도 절대적 의미의 당위성을 갖지를 못한다. 우리는 현재 운이 좋은 사람들일 경우에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인정해줄 만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생명체가 존재할 당위성을 갖지 못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가 될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사실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개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모두 각자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하는데, 그 노력에 실제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뜻한다.
 
이럴 때 인간은 누구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삶에 대한 모든 의미와 노력이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그저 존재하기에 존재할 뿐이다. 살아지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란 의미이다.
 
물론 우리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만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언급한 여러 가지 당위성과 완전히 동일하게 연결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제대로 찾았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적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최종적으로는 회의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매일 수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 그것들은 각자에게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가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라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무엇을 위해서 하게 될까? 아니, 할 수나 있을까?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만약 지금이 시대가 딱히 뭔가 가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 보통은 우리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상황이긴 한데 -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 나서 적과 싸워야 할 상황이나, 과거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라면,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재에 맞서 민주와 투쟁을 해야 할 시절이라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사실 그런 시절은 매우 힘들고 고달픈 시기이긴 하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든 시절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우리는 아주 단순한 시각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독립을 쟁취하거나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것이다.
 
인류 전체로 전염병이 돌거나, 거대한 운석의 충돌 등에 의해서 인류가 멸망할 처지에 놓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때가 되면, 왜 사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덜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생존만이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래서 니체로 촉발된 허무주의의 실체는 현재 인간이 이룩해 낸 문명의 안전함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먹고 살만하니, 살아갈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주 소수지만, 먹고 사는 것보다도 왜 사는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존재의 당위성만 찾을 수 있다면,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우리들 모두는 각자 모두 허무주의의 시대를 건너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수 콘서트에 가서 열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하고, 누군가는 정교한 피규어를 만들면서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면서, 누군가는 술을 마시면서, 누군가는 산에 오르면서,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면서, 누군가는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한다.
 
우리는 그런 행동을 행복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어떤 면에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각자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고 느낄 때마다 큰 만족과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 이유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자연스럽게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신이 느낀 가치를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가치를 느끼길 바란다. 그래서 가족 속에서 행복한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고, 크게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도전하고 쟁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등산에 빠진 사람은 산행의 행복을 얘기하고, 독서를 즐기는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사실 그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은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아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상대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은 아니란 점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모두 자신이 의미 있다고 느낀 것을 다른 이들이 지지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수록 자신이 느끼는 의미가 좀 더 확고해질 수 있다는 점을 무의식 중에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다른 이들에게 더 믿게 하기 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전도를 하게 되고, 게임에 빠진 아이들은 친구에게 그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설명한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 영화를 보라고 홍보하고, 좋은 제품을 사서 쓴 후 만족한 사람은 그 제품에 대한 입 소문을 낸다. 식당이나 여행지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경험을 한 후, 자신의 느낌과 비슷한 입장이 되면 그것이 그렇게 반갑고 친밀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잠시만 얘기하면 금새 느낄 수 있다. 그 사람은 아마도 한 시간 이상 우리나라 어느 산이 좋다는 이야기를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그의 그런 행동은 상대가 산에 가서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이 느낀 것을 비슷하게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당위성을 확고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즉, 그는 상대의 행복이 아닌, 상대방의 지지를 원하는 것이다. 단지 그 지지가 행복함의 경험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마치 행복을 원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불편해 하고 피한다. 특히나 그가 자신의 반대에 대한 적절한 논리와 증명을 해내면, 그것이야 말로 최악의 상황이 된다.
 
우리는 상대방의 '동의'를 통해서 자신이 믿는 의미의 '당위성'을 보장받으려고 애쓴다.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추천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착각하고 있을 뿐이기에, 스스로 삶의 허무함에 대한 인지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허무함에 빠져 있다. 지금 당장 젖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의 마음 속엔 거의 하나도 남김없이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겠지만, 그녀에게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허무함이 존재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답이 없는 문제이다. 물론 종교는 어떤 답을 주기도 한다.
 
기독교는 신의 존재를 통해 답을 준다. 불교에서는 이런 우리 인간의 무의미함을 직시하는 교리를 편다. 즉, 우리 인간의 삶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종류의 욕망은 허상이며, 이것을 떨칠 수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대표적인 종교들 말고도, 다른 많은 종교에서 나름대로 해답을 준다. 그리고 각자 그 종교를 믿음으로써 그 허무함을 벗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종교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서 종교적 믿음은 결국 한계가 생긴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는 종교를 같이 믿기를 원하게 된다. 특히나 가족에 대해서 더욱 더 심하게 집착하기도 한다.
 
또한 종교를 비롯한 수 많은 것들에 대한 각자의 입장은 서로 당위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끝없는 갈등으로 나타난다. 종교간의 갈등이 그것의 가장 흔한 예이고, 정치적 입장에서 개인적인 놀이 문화까지도 충돌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왜 게임 같은 것을 하는지 비난하고, 누군가는 왜 비싼 돈을 들여서 해외 여행을 하는지 비판한다. 또한 누군가는 왜 그리 먹을 것에 집착하는지 비난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서 목숨을 걸듯이 보호하려고 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끝없이 그들을 비판한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럽게 시끄러운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모두 자신이 느낀 의미와 가치를 너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느끼는 가치와 의미가 당위성을 갖게 되면서, 결국엔 자신의 숨겨진 허무함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옆 사람이 게임을 하든, 게이이든, 등산을 하든, 해외 여행을 가든, 자전거를 타든, 축구를 하든, 이혼을 하든, 아이를 낳지 않고 살든, 책을 읽지 않든, 죽어라 연예인을 쫓아 다니든, 심지어 똥을 먹든지 간에 그것이 나에게 피해가 없다면 거의 상관이 없어야 한다.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는 오직 개인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다른 이들의 삶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비판하고 추종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 대한 깊은 심리적 욕구는 바로, 무의미를 벗어나고 허무주의를 넘어서서, 자신만의 삶의 당위성을 갖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미 시작된 허무주의는 현 인류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하고 살아간다. 즉, 답도 없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미 태어났다면, 그리고 이것을 되돌릴 수 없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현명한 삶을 사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오늘 옆에 다른 삶의 경로를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길은 아니야. 내가 가는 길이 훨씬 더 의미 있어' 라는 생각을 하고 내뱉는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것만 조심해도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안전하고 평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이런 허무주의의 시대가 앞으로 200년 정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그 200년이 다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어떤 해결책을 찾아서 우리의 본질적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실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요즘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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