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연과 필연

아이루다 2014. 12. 29. 09:23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깝다. 물론 가족관계는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이긴 한다. 하지만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좀 더 과학적으로 보면, 우연이 맞긴 하다. 뭐 이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인간은 보통 어떤 장소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첫 번째 인간관계가 결정된다. 그것이 요즘 아이들 기준으로 보면, 어린이 집이든 유치원이든 초등학교이든 간에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엔 이 학창시절에 평생을 갈 수 있는 인연이 만들어 진다. 우연히 배정된 학교나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간 학교에서 어느 반이 되느냐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관계가 형성된다. 나중에 생각하면 운명 같은 만남 역시도 이렇게나 우연하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대학교도 마찬가지고 직장이나 기타 거의 모든 관계가 이렇게 우연하게 시작된다. 실제로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우연으로 시작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이것이 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이 만약 100명의 사람을 만난다고 했을 때, 실제로 남는 사람은 한 두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엔 한 가지 더 덧붙여서 생각해야 할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선호도나 호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개개인의 인간관계는 선호도와 호감에 따라서 최종 결정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만나는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특정한 패턴이 보인다. 결국 모든 만남은 우연이지만 그 안에서 개인별 성향에 따른 선호도에 의해서 남는 사람과 잊혀지는 사람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참 이해도 쉽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조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맺는 인연에 대해서 '왜 나는 좋은 사람을 못 만날까?' 혹은 '나는 왜 이런 사람들만 꼬이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이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누구나 가끔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맺는 관계을 완전히 우연성을 기반으로 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즉, 누군가는 우연히 너무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기도 하고 혹은 누군가는 참 좋은 사람들만 주변에 모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이것이 그 질문들처럼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참 나름대로 독특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 세상엔 그런 사람들보다 더 좋고 나하고 더 잘 맞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즉, 나는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만큼의 좋은 사람들이 세상엔 꽤나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연히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반쯤 맞고 반쯤 틀리다. 왜냐하면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이들만큼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것이 내 의지든 아니든 간에 대한민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남들처럼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나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아주 일부만을 선택했다. 아니, 선택 당했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 안에 내가 놓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큰 이유엔 바로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금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금의 가치를 매길 수 있다. 금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에게 금은 단지 반짝거리는 단단한 물질일 뿐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가 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이 금인지 다이아몬드인지 판별해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과 관계 맺기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래서 내가 현재 맺은 인간관계는 내가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에 딱 맞는 수준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볼 줄 아는 것 이상으로 본능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한다.
 
사람에 대한 선호도 중 특별히 이성에 대한 호감도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거기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본질적 욕구가 크게 작용한다. 즉,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해 큰 호감을 느낀다.
 
이것이 일명 팜므파탈의 성향을 지닌 여자의 치명적 매력에 빠져서 삶을 망치는 많은 남자들의 불행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 결과가 결국 파멸이란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본능적 호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튼 이 전체적인 상황을 정리하면,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거의 우연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 우연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을 골라내어 자신의 지인으로 만드는 과정은 개인적 선호도에 의한 필연적 과정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선호도 역시도 우연히 갖게 되는 경향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과정을 전체적으로 우연의 산물로 착각하기 쉽다.
 
반대로 너무도 좋은 인연을 만나면, 그 인연을 운명의 만남이라고 해서 필연으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실제는 이 둘 모두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맺는 모든 인연은 우연으로 시작해서 필연으로 마무리 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채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착각은 결과론 적으로 보았을 때, 다소 엉뚱한 결론을 내게 하기도 한다.
 
흔히 엄마들의 태도 중에서 자식이 잘못 되었을 때, 그것을 친구를 잘못 사귄 것으로 모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예가 바로 그것이 된다. 그것은 자식의 친구 입장에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만나 친구가 된 것에는 우연함과 서로를 원하는 필연성이 함께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연과 상대의 선호도만을 문제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어떤 남자나 여자를 만나 끝없이 문제가 생기는 사람을 들 수 있다. 만나는 여자마다 바람을 피운 다든지, 만나는 여자마다 감정 조절 장애증을 가지고 있다든지, 만나는 여자마다 구속이 심하다든지, 만나는 남자마다 폭력적이라든지, 만나는 남자마다 다른 여자들에게 계속 집적거리고 다닌 다든지, 만나는 남자마다 과소비가 심하다든지 말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반복될 때 그 당사자는 자신의 운이 없음을 한탄하는데, 잘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살면서 만나는 인연들 중에서 스스로가 바로 그런 사람들만을 선택하고 있음으로 그 자신이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소개팅을 할 것이고, 직장이나 모임 속에서 어떤 이들에게 호감을 느끼고는 그 사람에게 끌려서 결국 사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맺는 관계 중 결혼을 전제로 한 남녀가 만날 때만큼 까다롭게 구는 경우가 있을까? 남녀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실제로 많이 계산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면, 그것은 상대의 잘못이 아니다. 그 자신의 잘못인 것이다. 그것의 이유엔 특정한 얼굴이나 몸매를 선호하는 남녀의 태도나 특정 성격을 선호하는 남녀의 태도가 깔려 있다.
 
상대가 유난히 자신에게 집중하길 바라는 사람은 집착이 심한 사람을 고를 가능성이 높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선호하는 사람은 상대가 바람 피우기가 쉽다. 꼭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도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에겐 끝없는 다른 이성의 접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만나는 남녀마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을 선호하는 사람은 당연히 과소비를 할 성향을 고르기 쉽다.
 
카리스마 있고 화끈하면서 리더쉽이 강한 남자는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려 할 것이고 결국 폭력도 쓰게 될지도 모른다. 타인의 말을 잘 듣고 배려해주는 남자는 결국엔 결정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결정을 상대에게 맡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남녀 관계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는 성향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선호도를 가지고 친구를 결정한다. 그래서 조용하고 집중을 잘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늘 떠들썩하고 신나게 사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만날 때마다 술을 마셔야 하는 친구를 사귈 수도 있다. 이것을 친구를 만났더니 그 친구는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든지, 친구를 만났더니 그 친구는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든지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착각인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친구는 처음부터 원래 찻집에서 만났고, 처음부터 원래 술집에서 만나 친해졌던 것이다. 독서 토론회에 가서 만난 사람을 대상으로 자신처럼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은 단순해서 착각을 덜한다. 하지만 여기엔 또 하나 숨겨진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성향으로 성격적 분류가 가능할 정도로 정형적이 패턴을 보인다는 점이다.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는 기본적으로 착하게 산다. 왜냐하면 착한 척 하고 살아도 충분히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해서 착하게 사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호감을 얻어내기 때문이다. 사회적을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 역시도 착하게 산다. 그들 역시도 착한 척 하고 사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외모가 떨어지는 여자는 착하게 살수도 있지만, 늘 당하는 부당한 대우로 인해서 성격이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손해에 매우 민감하고 이런 성격은 그 사람을 다른 이들에게 호감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손해에 민감하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여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상황에 따른 성격적 패턴은 늘 존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격이 그렇게 된 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이나 타고난 성향인 듯 착각하는 경우는 흔하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타고 났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숨겨진 성격적 패턴으로 인해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어떤 한 면이 좋아서 만나게 되면 나머지 면들이 줄줄이 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폭력적이기가 쉽지 않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성향은 결코 무 작위성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하게 조합된 성향을 갖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반된 두 가지 면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있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자기 주장이 강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듯 보이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 모습을 노력을 통해 나타난 단점을 극복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나쁜 남자란 말이 있다. 여자들이 매우 선호하는 남자의 성격 중 하나인데, 까칠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자신의 여자에게는 한 없이 다정한 남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성격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로 바람을 피울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까칠한 남자가 어떻게 다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둘 중 하나이다. 원래 냉정한 성격인데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연기를 하거나 혹은 원래 다정한 성격인데 어떤 이유로 인해서 까칠하게 구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엔 낮에는 현모양처로써 밤에는 요부로써 역할을 하는 여자를 원하는 꿈을 가지고 산다. 이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 둘을 동시에 가질 수 있겠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원래 그 여자의 본질은 요부이고 낮엔 현모양처로써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현모양처이면서 밤에 요부로써 행동하는 것은 정말로 힘들다.
 
더해서 이런 현상은 단지 인간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원리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당하고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남들은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을 일을 우연히 몇 차례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우린 또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왜 이리 운이 없는 것일까?', '왜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배를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바다에 빠져 보겠는가?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비행기 추락을 경험하겠는가? 차를 운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차 사고를 일으키겠는가?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경험했다면, 그 사건은 대부분 그 사건을 일으킬만한 일을 자주 반복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 한 차례를 했는데도 지독하게 운이 없이 그런 사고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일어날 일은 맞다. 로또가 그리 확률이 낮아도 매주 당첨자가 나오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는 것에 도전하는 사람은 조난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를 보다가 화재가 나서 도망쳐 나오는 경험을 하기가 더 쉽다. 집에서 주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집에서 죽을 확률이 높으며 병원에 자주 입원하는 사람은 병원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인간이 가진 각각의 선호도나 호감은 또 다른 패턴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그 모든 것은 온전히 우연히 벌어진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사고를 당하든 일단 그 시작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냥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이 우연이 일어난 이후, 우리는 자신의 과연 무엇을 통해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끝없이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당연히 그 당사자의 선호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을 착각한 사람은 자신의 선호보다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해서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것 역시도 일종의 패턴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일을 해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 이것은 어떤 것을 해도 지독히 빠져드는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과 같다.
 
이렇게 우리는 우연이 시작된 것을 필연으로 선택하게 되는 조합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그것을 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까 라고 한탄하는 것처럼 우연성에 기대하거나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는 필연성에 기대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그래서 정말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그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먼저 부자가 되어야 부자가 모이는 곳에 우연히 어울리게 되기 때문이다. 부자가 아니라도 부자인 척은 해야 어울리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일을 해냈을 때,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운과 선호도에 따라서 많은 부분이 우연히 이뤄졌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성공은 운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을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조차도 운과 필연적 환경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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