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개에게 자유란 두려움 뿐이다

아이루다 2014. 2. 15. 09:36

 

자유, 이 단어는 참 쉽게 설명 할 수 있는 말이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 작정하고 제대로 설명을 해보려고 하면 정말로 그것이 많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묘한 단어이다.

 

또한 어쩌면 인류 문명은 지금까지 이 자유롭고 싶은 존재들과 억압하는 존재들의 투쟁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리만큼 자유는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이 누리고자 했던 위대한 가치였으며 산다는 것에 있어서 너무도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런 이유로 인해 몇 천 년의 짧은 역사이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까지 투쟁을 해왔다. 하지만 그 많은 피를 부르고 그 많은 희생을 요구했던 그 자유의 가치는 실제로 그 단맛을 보는 사람들에게 와서는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자유가 억압되던 시대를 그리워 하기도 한다. 그땐 고민할 것도 없었고 열심히 만 살면 모든 것이 되었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그 시대에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남았지만 그 멀쩡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배경엔 많은 이들의 원치 않는 희생이 있었음을. 그리고 희생된 그들 역시도 살아남은 이들처럼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음을.

 

아마도 우리나라 근 현대사 시점으로 볼 때, 자유를 제법 제대로 누리기 시작한 시대는 1990년대 정도부터 일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IMF라는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을 입었었고 그 후로 우리는 그렇게 어렵게 얻은 자유보다는 내 한 몸, 내 가족 편하게 해 줄 물질적 가치를 얻어야 한다는 절대 숙제 속으로 다 함께 빠져들어가 버렸다.

 

물론 그것이 IMF의 영향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민족적 특성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 와서 자유란 어쩌면 우리에게 부여된 너무 과도한 혜택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즉 우리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자유라는 것을 누리게 된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쉽게 생각하면 30년 간 꾸준히 직장생활을 한 후 노후의 자유를 얻는 어느 퇴직자가 분명히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고 처자식도 멀쩡해서 집안 문제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진 상황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에게서 직장의 시간을 뺀 하루는 너무도 긴 여정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랜 시간 직장 생활을 한 반복된 패턴에 익숙해진 이들만 그럴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 젊은 나이의 사람들 역시도 단순히 집에서 쉬어야 한다고 하면 과연 무엇을 할까? 물론 처음 몇 달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후로 점점 그에게 하루는 과도한 시간이 되어 간다. 그래서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미드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결국 이렇게 몇 년이 흐르면 그에게 남은 자극이란 자극은 거의 사라지고 이젠 그 모든 것이 따분한 일상화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사람들은 보통 중독성을 가진 것들로 빠져들기 쉽다. 그래서 도박, 섹스, 심하면 마약까지 거의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선택 가능한 것으로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시간을 주면 정말로 이 시간을 아끼고 아껴 쓰면서 더 열심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또한 새로운 것들로 도전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자유를 버거워 하기 쉽다.

 

이쯤에서 우리 인간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얻으려고 했던 이 자유는 정말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에 대해서 조금 진지한 생각이 필요해 보인다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의미가 과연 늘 옳기만 한 것일까?

 

집에서 한 5년 정도 키운 개에게서 목줄을 풀고 자유를 주고 내 보내면 이 개는 스스로 '아 나는 목줄을 풀었으니 자유다' 라고 생각하고 멀리 떠날까? 아니면 주인이 실수로 자신을 내보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전혀 상황을 알 길이 없어서 그저 문밖에서 하염없이 주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까? 그냥 생각하기엔 후자와 같은 행동 패턴을 보일 것이 좀 더 유력하다.

 

개는 충성심이 강하고 인간과 유대감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동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개의 입장에서 보면 개는 따뜻한 집과 풍성한 먹거리를 얻은 대신 인간에게 길들여지고 자유를 억압 받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에게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노숙을 하면서 살아가는 버려진 개들이나 들개들의 삶보다도 이 집안에서 살아가는 개가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개의 입장에서 억압 받는다는 것의 의미 조차도 인간의 기준일 뿐이다. 개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그 자신의 삶의 형태라고 믿을 것이다. 그것은 노예로 태어나 평생 노예로 살다간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우리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의 자유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과 비록 자유는 없지만 누군가가 모든 것을 챙겨주고 먹어주고 재워준다면 어떤 형태의 삶을 선호하겠는가?

 

물론 대부분의 인간은 아마도 개와 같은 삶보다는 자유를 가진 삶을 선택할 것이다 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삶의 바라볼 때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래서 우린 예전에 영화 '매트릭스'를 볼 때 주인공 네오가 가상 현실에서 깨어나 자유를 얻고 본질을 볼 수 있길 바랬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도 다시 그 매트릭스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네오의 선택보다는 그런 모습이 우리의 보편적 행동패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실제로 일단 풍족히 먹고 살 수 있다면 자유 쯤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많은 자유를 위한 인간의 오래된 투쟁의 역사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의 위대한 모습에 오랫동안 노출된 교육의 효과로 인해,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자유는 최고의 가치이니 그 어떤 것과 비교해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자유를 최우선으로 꼽아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통 '현실적' 이라고 말하는 것들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빚어내는 갈등의 근원엔 바로 이 자유의 가치와 안락한 삶에 대한 욕구가 싸우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취직을 하는 것은 자신의 시간의 자유를 타인에게 맡기고 대신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 받는 것이며, 결혼을 할 때 상대의 재력과 직업을 고려하는 것도 결국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결혼 상대자와 어떤 종속적 관계가 맺어지더라도 결국 몸이 편하면 행복하다고 믿는 사고방식이 동작하고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판단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진정한 자유를 꿈꾸면서 그리 험하고 힘든 길을 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유를 포기하고 남들이 닦아 놓은 길을 쉽게 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은 바로 편하게 간 길을 갔던 이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의 다음 세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윗 세대에게 말하는 것들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결국엔 그 자신이 다른 길을 가서 실패한 것도 아니면서도 그 길을 가면 실패하니 가지 말라고 하고 있다. , 이런 조언들이 실제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어 본 나쁜 사례들을 차곡차곡 모아 두고(좋은 사례는 즉시 잊고) 이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후대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한 직장을 수십 년 평생 다닌 사람은 어느 날 직장을 잃거나 처음 직장을 옮기는 것이 매우 두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직장을 세네 번 정도 옮겨보기도 하고 그런 중간에 한 일년 정도 쉬어본 사람은 그것을 그리 크게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은 살아가면 또 어떻게 살아가 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좋은 넓은 주거 환경과 풍족한 경제적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좁은 집과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살아 갈 생각을 하면 숨이 턱 막힌다.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으니 수 백만 원의 명품 백을 척척 하던 사람이 콩나물 천 원어치 사는 데도 고민을 해야 한다면 이것은 정말로 큰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어떤 이들은 콩나물 천 원어치 앞에서 고민을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원래 처음부터 그랬을까? 그리고 과연 그것이 그리도 못 참을 힘듦일까?

 

그런 삶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외적으로만 바라보고는 그렇게 살아야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차리리 노예가 되어 풍족하게 살길 원할 것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많은 이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이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실제로 그 자유보다는 몸의 안락함을 통한 행복추구가 훨씬 더 좋다고 믿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 자신의 본질적 모습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마치 그런 삶이 자유롭다고 그리고 그럼으로 인해 자신이 자유를 추구하고 살아간다고 믿고 있는 부조리를 연출 해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우린 돈에 대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위치적/관계적으로 억압된 자유는 충분히 견디어 낼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돈에 대한 자유를 실제로 우리 인류가 오랫동안 꿈 꾼 자유로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쯤에서 처음 글을 시작할 때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도대체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자유는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마음껏 해외 여행을 갈 수 있는 자유와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수많은 고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만들어 가는 노력을 하는 자유에서 그 '자유'가 갖는 의미는 같은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5년째 주인집에서 먹고 자는 행복한 삶을 사는 개일 수 있다. 이젠 너무 그것이 익숙해져서 매일 주인 눈치는 보지만 그래도 특별히 주인 눈에 날 짓을 하지 않으면 밥도 주고 가끔 산책도 시켜줄 테니 적당히 주인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집에서 살아가다가 죽을 수 있는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혹시나 기분 나쁘다면 스스로 다른 자유를 착각하고 사는 것일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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