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종류의 생명체와는 동떨어진, 아니 완전히 다른 형태의 존재라고 착각해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지적 능력을 통해 스스로 이룩해 낸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근간으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부족한 머리를 타고나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는 자연계에 살고 있는 수 많은 동식물들과 우리 인간을 명백히 구분하고 싶어하는 욕구였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욕구와는 다르게, 그런 동식물과 우리를 다른 존재로 분리해내고 싶어도 이것을 막는 유사한 특징이 그들과 우리 사이에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욕망이다.
욕망이란 단어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그것이 탐욕이나 과한 욕심으로 이해되기도 쉬운데, 실제로 욕망은 우리 인간의 아주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성향이며, 인간이 포함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 이 욕망을 기반으로 한 행동을 통해서 그 삶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그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욕망 자체를 단어를 통해 설명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생명에 대한 본능 역시도 욕망이라고 표현해도 아무 문제 없다. 설령 우리가 본능을 욕망의 다른 의미 해석인 과한 욕심이라고 적용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자신의 목숨에 대한 끝없는 보존 욕구는 일종의 과한 욕심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생명체이든 실제로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과거에 많이 다루어 봤기 때문에 넘어가고, 오늘은 우리 인간이 그 자신이 품은 욕망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에 대한 인간의 성향 별 처리 방식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 분석 글은 아무런 학문적 근거도 없고 오랜 시간 연구된 결과물도 아니다.
생명체는 살아가는 동안 생존의 본능이나 혹은 그것이 어느 정도 실현된 다음엔 종족 번성의 본능 등을 끝없이 추구한다. 그렇지만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명체 사이에는 이것을 해내기 위한 절차로서 꽤나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문명을 이룩한 정도이다.
동물의 기본적인 서식 환경은 거칠고 예측 불가능하며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인간은 그 스스로 이룩한 문명의 틀 안에서 비교도 안될 만큼 안락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 차이로 인해서 각자 본능을 충족시키는 방법에 있어 동물들은 단순히 먹고 자고 싸고 봄이 되면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기르는 형태를 보이는 반면, 인간은 이것을 훌쩍 뛰어 넘어 그 기반은 생존 본능이지만 추구하는 삶의 형태는 완전히 변형되어 그 실체를 알아내기가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조금 냉정히 말하면 실제로 그것들은 복잡성만 더해졌을 뿐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우리의 평범한 동물적인 본능적 욕구가 숨어 있음을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동물들의 본능에 의한 행동과는 다르게 어떤 다양한 형태의 생각과 행동을 한다고 스스로 자부한다고 해도 그 안엔 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숨겨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형태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통 털어서 욕망이란 단어로 수렴시킬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루 종일, 한달 내내, 일년 동안 늘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산다. 단지 여기에서 우리는 군집 생활이 주는 이득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다수가 함께 모여 사는 형태의 무리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 하에서 온전히 나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고 살다간 타인의 이득과 충돌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도 모르게 받은 각종 교육의 효과로 인해 어느 정도 선에서 이것을 절제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워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적당히 조절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수면 아래 숨은 욕망일 뿐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버린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우린 늘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은 변함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실제로 어떻게 현실로 실현 해낼까?
우선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자신이 그것 자체를 스스로 해내는 것이다. 밥이 먹고 싶으면 밥을 하고 쌀이 없으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 어디 멀리 바다를 보고 싶다든가, 역사가 가득한 그리스 문명의 발자취를 밟아 보고 싶다든가, 멋진 차를 사고 명품 가방을 가지고 다니고 싶다든가, 멋진 데이트 상대와 뜨거운 사랑을 해보고 싶다든가...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이 모든 욕구가 해결 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면서 심지어 모두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비극이다. 쌀을 끓여서 밥을 먹었다고 해도 몇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또 다른 음식이 필요하다. 또한 이렇게 계속 쌀을 소비하면 언젠가 쌀이 부족하고 이것을 해결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 하지만 이 노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절대로 욕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힘들지만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의무이다.
그런데 그 힘든 노동을 견뎌내어 돈을 번 후 쌀은 사서 밥을 먹었지만 배가 부르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금새 또 다른 욕망이 우리를 사로 잡는다. 하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욕망들인 차를 사거나 해외 여행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수 있다. 다행히 돈이 있어서 차를 샀지만 운전을 할 능력이 안되거나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같이 갈 사람이 없거나 혹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자유로운 여행은 단 한번도 못 가고 늘 패키지 여행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욕망은 절대 한번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평생 소원이 단 한차례의 유럽 여행이라면 그나마 실현 가능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 소원이 전 세계를 모두 돌아 다니는 것으로 확대되면 아마도 평생 버는 돈을 모두 여행에 다 쏟아 부어도 그것을 모두 실현해 내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을 하는 동안의 그 자신의 또 다른 욕망은 모두 포기해야 할 것이 된다.
명품 가방이나 좋은 차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단 한차례 구매로 끝나지 못한다. 이것은 끝없이 재 구입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개인의 욕망의 문제도 있지만 결국 이 욕망을 부추기는 존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업은 사람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 기업 내에는 이것을 해 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 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늘 광고와 누군가의 제품 평가 속에서 자신이 그리 필요치 않는 제품에도 욕망을 갖게 된다.
결국 우린 우리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하면서 타인의 욕망을 끝없이 불러 일으킬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을 한다. 즉 이것을 큰 그림에서 보면 인간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부추기고, 이 중에서도 특별히 잘 부추겨서 기업이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게 되면, 두둑한 보너스를 받아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쓰곤 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극되고 있는 끝없는 욕망은 우리가 처음에 가진 해결책으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즉 이젠 두 번째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욕망을 실현하는 두 번째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꽤나 빈번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그 욕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존재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하려면 보통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밀접해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이것의 완벽한 연습장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린 시절은 수입이 전혀 없지만 이미 자연의 섭리에 의해 맺어진 누구보다도 밀접한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잘 살펴보면, 보통 어린 아이는 무엇인가를 원하면 반드시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아이와 그 부모의 관계는 누구보다도 친밀함이 반드시 가정되어야 한다.
다행히 생명체는 자신이 만들어 낸 후손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가치를 느끼기 때문에 아이가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로 유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욕망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커지기 때문에 비용이나 건강과 같은 이유로 인해 부모는 아이의 욕망을 조절하려고 애쓰게 된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아이는 어떻게든 자신이 갖게 된 욕망을 이루어 내고자 부모와 수시로 협상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칭얼거림, 애교, 땡강, 마구 울음, 해 맑은 웃음, 토라짐, 징징거림, 나 밥 안 먹어, 엄마 미워... 등을 통해 그 부모에게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고 애쓴다. 그리고 부모는 무시, 교육, 체벌, 달램, 보상 정책, 그냥 해줌... 등으로 반응한다. 그 전체적인 상호 과정이 실제로 그 어떤 경제적 능력도 없는 어린 아이에게는 유일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결국 아이는 어린 시절에 부모와의 이런 줄다리기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뤄내고 포기하는 등의, 이것을 통제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또한 형제가 많은 아이는 그 안에서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 이외에 자신의 경쟁자인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젠 더 다양한 심리적 게임을 배우게 된다. 즉 이들 형제간의 경쟁은 어떤 식으로든 양보나 혹은 쟁취 등의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물론 혼자 자라난 아이도 이것을 조금 늦게 배울 뿐 유치원이나 학교 등에서 친구들과 역시 동일한 경쟁 속에서 놓이게 된다.
결국 우리는 이 어린 시절의 성장기를 통해 사람들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경쟁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린 어린 아이 시절의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을 욕망할 때 그것을 반드시 그 자신이 노력해서 이룰 필요는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욕망 해결책을 펼칠 수 있는 기본적 능력이 되어 준다.
이것도 하나의 능력이니 딱히 이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 단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욕망이 생겼을 때, 그것을 그 자신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을 하기 싫어서 타인을 통해 이루려는 방법론을 신봉하는 사람일 경우에 이것에 대한 심각한 중독적 위험이 노출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진행 과정은 자연스러운데 100원을 구하려고 할 때 엄마에게 100원을 달라고 하는 것과, 일을 해서 100원을 버는 것은 그 욕망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린 누구나 편하게 살려고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일을 하기 보다는 엄마에게 100원을 달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은 나이를 먹은 후 100원 아닌 명품 가방, 직장 내 진급, 연봉 등으로 확대 된다.
그래서 중독된 이들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조차도 주변의 인간관계를 통해서 거의 모든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 그런 결과로 인해, 예를 들어 회사 내에서 진급을 하고 싶으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권을 가진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노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관계성 유지를 위한 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눈치보기와 마음에 없는 리액션을 남발하고 다니게 된다. 그리고 또 이것의 나쁜 이차적 효과는 바로 그 자신이 이런 타인에게 맞춘 삶 속에서 발생한 잠재적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이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를 마구 함부로 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타인과의 관계는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물론 그 대상이 자신과 정말로 잘 맞는 친구들은 그렇지 않지만 직장과 같은 곳에서 맺은 관계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거기에서 관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간 오래지 않아 자신에게 불리함이 오기 때문에 그 순간을 참고 견뎌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개개인이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의 총량은 대부분 정해져 있다.
결국 이 결과로 인해 우리가 인간관계에 대한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총량의 한계지점에 이루게 되면 이젠 그 외의 타인들에게 전혀 관대함을 보여 줄 수 없다. 즉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진급을 결정하는 상사에게 늘 웃으며 대하지만 그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아랫사람들에겐 왕 싸가지 이미지를 보여주곤 한다. 그리고 중간 상태에 있는 자신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열심히 계산을 하여 대하게 된다.
그래서 같은 직급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하면 마치 상사처럼 대하고 좀 빠지고 부족해 보이면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스트레스로 인해 그 자신의 성질을 조절하지 못해서 문득문득 그 성격적 특징이 들어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단지 직장에서의 예만 들었지만 우리는 늘 타인에게 부탁을 하고 부탁을 받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비단 그 직장이란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모임에서도 동네 수영 교육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해결 방법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아주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관계성 속에서 매우 복잡한 셈법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셈법이 능한 사람일수록 얻을 수 있는 것과 줄 수 있는 것을 잘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사용함으로써 더 효율적인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이 부분을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런 계산이 능한 이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며 두뇌가 아주 뛰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서 이것을 잘 모르고 또한 능력 없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니 실제로는 그 자신이 부족함을 스스로 되돌아 볼 기회도 생각도 없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래서 잘 하지 못하는 계산을 열심히 하여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 결과로 인해 얻은 이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서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상황이 흔히 발생한다. 심지어는 너무 계산을 하다가 사람들에게 다 들켜서 일명 '계산 적인 사람' 이란 이미지만 얻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계산을 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너무 심하게 계산을 하게 되면 그 자신도 잘 하지도 못하는 계산을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 그래서 계산적인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이 원리로 인해 계산적인 사람은 손해를 볼 상황까지 생긴다.
이런 연유로 이젠 계산에 대한 피곤함을 느낀 사람들은 그 본능이 원하는 대로 세 번째 방법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해결책은 첫 번째 방법만큼 오래된 것이다.
욕망을 실현하는 세 번째 방법은 가장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원하는 것을 뺏거나 훔치는 것이다. 이것은 능력에 따라 도둑질이 되어 법적 처벌을 받기도 하지만 더 강력한 추가적 능력이 보강된다면 소위 말하는 초법적 행동이 가능하다. 즉 강한 자신의 지배력으로 타인의 것을 거의 강제로 뺏으면서도 전혀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일명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면 된다.
욕망을 실현하는 첫 번째 방법은 남녀 모두 해당되고 두 번째 방법은 주로 여자들이 발달시켰다면 세 번째 방법은 바로 두 번째 방법을 잘 밟아서 성공한 남자나 혹은 소수의 여자들이 주로 쓰는 욕망을 해결하는 법이 된다. 물론 부모를 잘 만나 아예 두 번째를 경험하지 않고 바로 세 번째로 가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솔직히 더 강력하기로는 두 번째의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올라선 세 번째 단계를 진행 중인 사람이다.
조금 다른 얘기로, 경쟁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그것도 온갖 비겁함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에서는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 하나는 배려심 다른 하나는 공정함이다. 이 두 가지는 경쟁에서 이기는데 있어서 정말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없는 사람을 우린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성공한 이들의 밑에서 일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도 성공한 이들에게 대해 배려심과 공공에 대한 정의로움을 가지라고 외친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그런 척 연극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TV를 통해 나오면 그것에 감동을 하면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네 번째 방법은 거의 불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런 욕망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욕망이 끝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데 결국 아무리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법론이다. 이들은 보통 수도승, 스님, 은둔자 등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현실 세계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 사이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첫 번째 방법을 선호하는 이들은 보통 자립심이 강하고,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며, 원칙적이거나 혹은 손익 계산법이 영 서투른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이고, 능력에 비해 욕망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두 번째 방법을 선호하는 이들은 보통 정의로움이나 공정성과 같은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해 최소한으로 지키는 편이며, 가진 능력에 비해 욕망이 큰 이들이다. 이들 중에서 능력이 어느 정도껏 되지만 그가 가진 욕망의 크기는 훨씬 큰 경우,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지배계급이 되어 세번째 방법으로 진화해 나가고, 능력도 안되지만 그래도 욕망이 큰 이들은 도둑이나 강도와 범죄자들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각종 사기꾼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즉 이 말은 지배 계급에서 각종 불법을 저지른 이들이나 사람을 속여서 이득을 얻는 사기꾼이나 어느 집에 침입해 돈을 훔쳐가는 범죄자들의 차이가 단지 지적 능력뿐이란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향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짓은 도둑이나 강도에게 착하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꼴이 된다.
이 각 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인간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좀 더 어떤 형태가 발전적이고 현명하냐에 대한 관점으로 보면 첫 번째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좀 더 공정하고 살기 좋은 사회가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회 시스템적으로 발전된 문명권일수록 공공성과 공정함이 매우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서 취급된다.
이 말은 인간의 보편적 성향은 비슷해도 사회 시스템이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이것의 전체적인 방향을 이끄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인데, 쉽게 말해서 사회 안정성이 높아지려면 도둑과 강도를 잡는 치안이 발전해야 하며 범죄자를 고발하는 시민 의식이 투철해야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사회 지배층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윤리의식을 개개인의 자체적인 양심을 믿는 짓이 정말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래서 지도층을 뽑는 형태의 국가 운영제도를 취한 나라는 권력에 대한 끝없는 감시를 해야 하는 것이 옳다.
인간의 욕망은 보편 타당한 특징이다. 그래서 네 번째 방법처럼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개인별로 훈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목표이다. 그럼으로 당연히 우린 다른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것을 통제하는 법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동작하는 공공성의 가치가 유지되는 사회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나은 사회이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훈남과 훈녀의 비밀 (0) | 2014.02.05 |
---|---|
남자의 종류 (0) | 2014.01.25 |
외모는 경쟁력인가? (0) | 2013.12.21 |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0) | 2013.12.16 |
긍정적인 해석 능력 (0) | 2013.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