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나와 있는 단어 '긍정적' 이란 말의 의미는, 일반적인 해석의 차원에서 보면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 사고의 방향을 뜻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해석은 바로 긍정적이란 것이 실제로 어떤 대상이 좋은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사고의 주체자가 어떤 의지적으로 그것을 좋게 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런 긍정적인 사고 방식은 보통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보다는 호감을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것을 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를 떠나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형태의 상황을 그나마 큰 문제 없이 해결해가거나 비켜가거나 참고 기다려야 할 때 이 긍정의 힘은 꽤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래서 시중엔 이 긍정이 가져다주는 좋은 효과에 대한 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해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단지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는 매우 중요한 결과적 해석이 존재한다. 즉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다면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을 때, 이 행복은 보통 정신적인 관점에서 다뤄지기 마련이다. 즉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물질적 환경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을 추구하는 삶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를 좀 더 현명한 모습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이란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는 훨씬 물질적이다. 실제로 통장에 들어온 돈, 맛난 음식이 입에 들어갈 때, 멋진 옷이나 차 등등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사고의 결과가 아닌 물질적 대상을 인지하는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수 많은 정보들을 중심으로 삶을 생각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그렇다. 즉 생각은 아무리 해도 결국 생각일 뿐이고 결국엔 행동을 해야만 이것이 현실화 되는 것이다.
즉 보통의 사고 흐름은 물질적인 요소 -> 해석에 의한 정신적인 요소 순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물질적 요소가 없으면 사고의 흐름은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린 보통 뒤따라 오는 우리의 해석을 하는 성향을 통해 그것을 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 그럴 수 있기에 바꾸기 힘든 물질적인 요소는 놔둔 채 생각의 성향을 바꾸는 일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반대의 흐름은 없을까?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요소가 물질적인 요소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존재하긴 힘들까? 이 이야기는 언뜻 잘못 들으면 마치 텔레파시와 같은 초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런 직접적인 관련이 아닌 희미하지만 연결된 관점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의 긍정적인 사고 방식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때 그 사람의 주변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다.
긍정적인 사고 역시도 시작은 외부에서 된다. 즉 어떤 자극이나 사건이 없다면 말 그대로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할 기회조차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 입력된 외부 정보는 사고 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이 된 후 외부로 다시 유출된다. 즉 사건에 대한 반응이 일어나고 이것은 반응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외부 요소가 된다. 이것이 하나의 사이클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어떤 외부 자극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다시 그것을 하나의 자극으로 인식한 타인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우린 누구나 우는 모습보다는 웃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불편한 감정을 덜 갖게 되기 때문이다. 즉 앞서 질문한 반대의 흐름은 분명히 존재하게 된다. 우리 개개인의 긍정적인 반응은 주변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로 인해 전체적인 평균 긍정도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의 행복도 역시도 높인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부정적인 사람보다는 긍정적인 사람을 두려고 한다.
이런 원리로 결국 긍정적인 해석이나 사고방식은 꽤나 사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냥 똑같은 물리적 환경이라면 가능하면 긍정적인 것이 더 행복하고 살기도 좋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물이 반잔 있을 때 '물이 반이나 있네' 와 '물이 반 밖에 없네' 라는 두개의 사고 방식표현이다. 둘은 모두 같은 물이 반이 있지만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물이 반이나 있네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훨씬 행복해질 수 있는 사고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렇듯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늘 좋은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장점이 많은 만큼 단점 또한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뇌가 행복을 위해서 사고의 방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착각을 통한 긍정적 평가를 하는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우린 어느 들판을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멀리에서 황금색 벼들이 익어가고 거기 주변에 한가하게 풀을 뜯는 소 몇마리를 바라보면서 좋은 공기와 석양이 지는 하늘에 붉게 타들어가는 노을을 보면서 어떤 낭만과 자연이 주는 광대한 아름다움에 취해 삶에 대한 큰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어디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는 모두 개개인의 차이이니 이것은 나의 경우라고 한정짓겠다.
그런데 내가 느낀 이 감정의 해석에 대한 현실의 실체는 과연 동일하게 그럴까? 그 황금색 벼들은 어떤 농부의 아픔과 눈물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르고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들은 폭락한 소값과 폭등한 사료값에 꿈을 잃어버린 젊은 귀농인의 절망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붉게 타오르는 노을은 자연이 주는 멋진 광경이니 부정적인 해석을 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것 역시도 몇 달간 지속된 가뭄의 후의 광경이라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여기를 차를 타고 잠시 동안 지나가는 나는 이것에 대해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리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알아봐야 내가 뭔가 해결 할 방법도 없고 괜히 그때 느낀 그 느낌만 망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것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면 아마도 모르는 것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긍정을 향한 나 자신의 의지가 담긴 의도성을 뜻한다. 더 흔한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 많은 창작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속한 드라마, 영화, 소설 등등에서 우린 늘 권선징악을 향한 결과를 본다. 이것은 긍정적인 마무리를 뜻하는 것으로 누구나 여러가지 힘든 상황으로 인해 고난을 겪은 주인공이 잘먹고 잘사는 행복한 삶으로 남길 바란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나마 긍정적인 것을 의도하는 우리의 의지가 애교스러운 편이다. 문제는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나 혹은 우리가 소속된 단체와의 관계 속에서 왜곡을 통해 생겨난다. 즉 어떤 상황이든지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는 긍정적 사고의 힘이 문제를 일으키는 변곡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말해서 동일한 성향의 사람이라면 지식의 범위로 인해 좀 더 긍정적이거나 좀 더 부정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지식이 부족할수록 긍정적이다. 그것에 대한 예는 황금빛 들판을 통과하고 있던 개인의 경험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내가 쌀값을 아는 것이, 요즘의 가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아는 것이 나의 긍정적 반응을 감소 시킨다.
"어리석음을 증오하지 않는 자가 어리석은 인간을 혐오하지 않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음을 증오하면서 어리석은 인간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서준식이란 분의 옥중서신에서 나오는 글귀이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제대로 알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부분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게 작동하는 원리이다.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지식이 쌓일수록 그 종교에 대해 비판적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알려고 하지 않고 또한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쓴 반복적인 정보만을 취한다. 이것으로 인해 정말로 깨지지 않는 견고한 어리석음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삶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삶이다. 어떤 것의 진실 여부에 상관없이 제대로 의심없이 믿고 살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가?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란 점이 문제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무관심하고 모를수록 나와 다른 어떤 사람들은 속한 시스템 안에서 평생을 약자로서 나보다 혹은 평균치보다도 못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또한 이런 큰 관계성 말고도 개인적으로 긍정적인 해석 능력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매일 상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잘못된 해석인데 우리 인간은 가능하면 그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것이 매우 본능적인 사고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앞서 말했듯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나 특별한 의도가 없다면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식적인 반응을 많이 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우린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장사를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터무니 없는 긍정적인 해석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문제에 대해서 인식을 못하거나 혹은 혹시나 알았다고 해도 그 심각성을 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해결하거나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가령 예를 들어 늘 터무니 없는 음담패설을 하는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최대한의 불쾌함을 억누른 긍정적인 반응, 즉 상대의 억지 웃음을 보면서 자신이 한 농담이 매우 재밌다는 긍정적인 착각을 한다. 그래서 그것을 반복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 최후는 결국 성희롱 죄로 고발 당하고 끝난다.
또한 사람들의 가식적 긍정적인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좋아 했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난 후 매우 실망하여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이 경우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진실을 알수록 심해지는 것은 앞서 말한 지식이 늘수록 부정적으로 변하는 상황과 완전히 동일하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을 자주 겪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관계에 대해서 매우 소극적이거나 경계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을 넓게 사귀려면 사람에 대해 아주 모르거나 사람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사람이 가진 그 한계를 제대로 인정하는 경우가 된다.
긍정적인 해석 능력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살아야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린 개나 고양이가 아니다. 결국 우린 많을 것을 알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을 긍정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싶다면 적어도 제대로 직시를 하고난 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린 늘 결과론적인 판단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과정에 대한 정보와 그 결과들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지식을 쌓고 난 후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오감에 의해 들어오는 정보만을 해석해서 바라보는 세상과는 많이 다르다. 오늘도 우리가 그 자신이 알려고 하지 않는 정보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저 내가 행복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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