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연쇄 살인

아이루다 2013. 9. 22. 09:08

 

소설이나 영화를 구분을 할 때 보통 큰 카테고리화를 시켜 구분하는 방법이 일반적인데 보통 그렇게 구분된 카테고리를 '장르' 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사람들이 꽤나 좋아하는 장르가 바로 스릴러라고 알려진 분야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스릴러로 분류되는 작품의 특징으로는, 그 저자나 감독은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많은 의문을 던지고 주인공이나 혹은 전체 상황을 매우 강도 높은 긴장상태로 몰아간 후 최종 마무리에서 큰 충격이 있는 반전이나 혹은 상대적으로 허무한 결론을 낸다.

 

이런 종류의 스릴러 작품들이 꽤나 자주 이용하는 주제가 바로 살인이며, 이 살인 중에서도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다. 연쇄 살인은 근본적으로 살인이라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범죄로서 일단 벌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희생자를 되살리기 불가능) 의미하면서도 그런 살인 자체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 반복된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나 연쇄 살인을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는 대부분 특정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일반인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초 고도의 집착증세를 보이는 사이코 성향의 인물들이 범죄자로 등장하며, 이들은 매우 역겹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에서는 매우 매력적이게 그려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갖게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미국에서 만든 유명한 미드 '덱스터'는 범죄자를 죽이는 연쇄 살인범을 아예 주인공으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거기에서 주인공 덱스터가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합법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는 그 시리즈물에서 주인공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사람이 된 것에는 어린 시절 매우 강력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사이코 패스가 되어버린 어두운 과거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치료하고자 했던 그의 양아버지의 노력이 맞물려서 이루어진 결과로서 표현되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는다.

 

또한 스릴러 장르에서 고전이지만 아직도 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한 토마스 해리스의 명작 '양들의 침묵' 이란 작품에서는 연쇄 살인범의 애칭으로 불린 '버팔로 빌' 이 출현했었다. 이 연쇄 살인범은 여자가 되고자 했던 남자의 비정상적 집착이 결국 여자를 납치해 그 피부를 벗겨서 자신의 인공 피부를 만드는 약간의 끔찍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우라나라 역시도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살인의 추억' 이라는 아주 잘 만든 영화가 있다. 실제로 화성군에서 10여년 간 벌어진 부녀자 살해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꼽는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비오는 밤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하는 잡히지 않는 연쇄 살인범의 존재가 등장한다.하지만 현실의 사건을 다뤘기에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하고 끝나는 아쉬움은 있다.

 

살인의 추억을 뺀 두 작품에서는 또 다른 연쇄 살인범이 등장하는데 덱스터 같은 경우엔 그와 동일한 증상에 걸렸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형이 '아이스크림 킬러' 라는 애칭으로 등장하여 한 시리즈를 장식했었고 양들의 침묵에서는 인간의 악마적 특징의 끝을 보여주는 '하니발 렉터' 박사가 등장한다. 그는 양들에 침묵에서는 탈옥할 때 겨우 두명을 죽이는 것으로 그 존재감을 보여주지만 그는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는 사람으로 표현됨으로서 사람들에게 역겨움과 그 가공할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준다.

 

이런 작품 이외에도 연쇄 살인범은 참 많이 등장한다. 물론 단발성 살인사건을 다룬 CSI 와 같은 미드에서는 아주 가끔 한번쯤이나 다룰 것 같긴 한데 역시나 미드인 '멘탈리스트' 에서도 레드 존이라는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가 시리즈 전체에 걸쳐서 큰 주제로 다루어 진다.

 

아무튼 이런 연쇄 살인범은 스릴러 작품에게 있어서는 매우 매력적인 소재이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나타난 '유영철' 과 같은 연쇄 살인범들은 확실히 작품속에 나오는 범인들과는 다르게 전혀 매력적이지도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 그냥 세상을 향한 마구잡이식 분노 표출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속에서나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나오는 범인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단 이들은 뭔가 자신만의 확실한 강박관념이 있다. '비오는 날 특정 음악을 들으면서 여자를 강간하고 죽이는',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사람의 생명 제거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 그들의 피부가 필요한', '살인 그 자체에 대한 집착', '살인을 통해 존재감 확인', '살인을 함으로서 자신을 생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기는 과대 망상' 등등 뭐 쓰자면 한참 써야 할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강박관념이나 과대망상은 왜 생겼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갖지 않을 것이고 설령 조금 생각을 했더라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을 것인데 왜 이들은 이렇게 특별한 특징을 보이는 것일까? 예를 들어 보통 사람들 역시도 분명히 사람을 죽이고 싶은 순간을 경험한다. 사람이 싸우다 보면 그리고 심하게 분노를 느끼면 그 순간엔 그 분노심이 자신이 가진 도덕적 잣대를 뛰어 넘어서 살인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래서 결국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 분노가 이끄는데로 했다가는 자신에게 닥칠 재난을 생각할 수 있기에 그 두려움이 주는 억제력으로 멈추게 된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일반인의 살인이 매우 충동적이고 단발성에 끝나는 반면 이들의 살인은 비록 처음엔 충동적일지라도 점점 더 살인을 해가면서 처음의 두려움을 떨치고 과감하면서 익숙해지는 경향까지 보인다. 심지어 많은 작품에서는 경찰을 도발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에서 꽤나 인기를 끌었던 '추격자' 란 영화에서 하정우가 맡은 연쇄 살인범이 바로 경찰에 가서 자수를 하는 과감한 면을 보여줬었다.

 

개인적으로 살인의 경험이 있지 않아서 솔직히 사람을 죽였을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예상하기는 힘드나 첫 살인에 대한 끔찍함에 대해서는 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공감해 왔었는데 분명한 것은 누구나 첫 살인은 두려움과 서투름이 함께 할 것이다. 물론 덱스터처럼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 사람은 덜 하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일은 생각보다 꽤나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살인의 도구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며 서투르게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면 사람의 급소에 대한 지식이나 도구를 써서 살해 할 경우 피가 묻지 않게 하는 요령도 필요할 것이다. 덱스터 같은 경우 자신의 제물을 마무리할 때(살인) 주변을 모두 비닐로 치고 피해자 역시 랩으로 완전히 둘러싼 후 정확히 필요한 부위만 칼을 이용해서 찌른다. 또한 흐르는 피에 대한 문제나 시체에 대한 처리 방식도 역시도 정해진 방법에 의해 매우 세밀하게 처리가 된다.

 

아무튼 그들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마무리 하고 왜 이들이 이런 남들과 다른 형태의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그리고 이것을 알면 왜 현실의 연쇄 살인범들은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그런 매력적이거나 악마적이면서 뛰어난 능력을 갖지 못한 찌질한 인간들만이 존재하는지가 설명이 될 것이다.

 

* 현실에서 유영철이라는 21명을 살해하고 토막낸 연쇄 살인범은 불우한 어린시절과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가 살해한 대상은 노래방 도우미나 노인들이었다.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이면 부유층을 죽여야 하는데 엉뚱하게 자신과 비슷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나 힘 없는 노인들을 살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적개심의 실체를 정의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유아시절을 겪는다. 그리고 이 유아시절은 분명히 우리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시절이며 또한 너무 약해서 누구나에게 언제든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시기이다. 우린 아주 어린 시절엔 부모가 만들어 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살지만 조금만 커서 걷기 시작해도 어떤 식으로든 부모의 보살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살아가야 한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면 우린 보통 이런 상황에 놓였더라도 큰 공포심을 느끼지 못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무서움을 느끼고 울게 되면 누군가 그를 다독이면서 그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득 당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벽장속에는 귀신이 없고, 침대 밑에도 괴물이 없으며 어둠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우린 교육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일한 시절에 그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정말 어떤 의미에서 끔찍한 공포심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인지력도 부족하고 지식도 턱 없이 모자란다. 그러니 이 나이 땐 천둥소리에도 울고, 지나가는 개를 보고도 무서워서 울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이런 공포심을 설명해주고 막아줄 사람이 없이 자랐다면?

 

이것과 비슷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바로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다. 위의 예는 부모의 부재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라면 이번 경우는 부모가 있음에도 그 부모의 문제로 인해 아이들이 폭력에 시달리고 특히 여자 아이 같은 경우는 친부나 양부의 성적인 욕구 대상까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정말로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극한에 이르는 공포를 느꼈는데 이것을 다독여 줄 사람 하나 없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 노출된 아이가 도대체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실제로 이런 성인조차도 이런 상황에서 오래 노출이 되면 미쳐버리거나 정신적으로 외부와 단절을 시켜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아이들은 세상에 미숙하기에 성인들에 비해 이런 상황에 자주 노출이 된다. 앞서 말한 천둥, 개 짖는 소리, 심지어 이름 모를 새까지도 아이들은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때마다 제대로 이 공포심이 진정되지 못하고 계속 스스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그 아이는 정말로 모든 감각을 외부와 단절시킨 채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증상은 실어증이나 부분적 기억 상실증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아무튼 이런 증상은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참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런 어린시절을 보낸 아이가 크면 그 단절이 가져다 준 깊은 골로 인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일반인과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 연쇄 살인범의 씨앗이 잉태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대부분의 스릴러 작품에서도 연쇄 살인범들은 그들만의 아주 독특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경험을 한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런 어린 시절이 이런 괴물을 탄생 시킨 것으로 연결 시킨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매우 일반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연쇄 살인범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현대 사회에는 소위 '비행 청소년' 들이 늘 존재한다. 이들은 보통 남들과 조금 다른 가정 형편을 가진 아이들로 편부모, 폭력적인 가정 환경등이 있기도 한데 놀라운 것은 여기에 매우 일반적인 가정,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부모가 모두 멀쩡히 있고 남들보다도 훨씬 풍족한 경제 상황을 가진 집안의 아이들 역시도 이런 무리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집안이 멀쩡하다고 해서 그 부모의 생각이 멀쩡하지는 않다. 특히 부모의 과도한 집착이나 기대로 인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아이가 삐뚤어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아이들이 삐뚤어지는 것을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규정하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바로 아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공식적인 자기 합리화 기술로 사용할 수 있는 '핑게꺼리'를 준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실수나 스스로 용납하기 힘든 짓을 한다. 또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는 상황을 맞아 스스로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문제점으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거가 혹은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과정은 바로 우리가 개인의 세상에서 단체의 세상으로 나오는 괴롭고 힘들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이를 제대로 통과한 사람만이 하나의 제대로 된 인격체로서 설 수 있게 된다.

 

우린 그 자신만이 최고였던 어린 시절을 거쳐 학교에 들어감으로서 선생님이란 새롭게 등장한, 인정해주는 존재에게 일종의 보이지 않는 서열화를 당한다. 즉 공부를 잘하거나 성격이 좋거나 외모가 좋은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보이지 않는 이쁨을 받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서열의 뒤로 밀려 집에서 받던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경쟁심을 유발시키고 그 덕분에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보이고자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세상에서 제시하는 서열화의 근간이 되는 사람의 매력을 결정하는 외모, 지능, 성격은 그 스스로 극복해 내기 힘든 근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결국 오랜 힘든 시간을 거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성인으로 자라나게 되는데 이때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모자람을 바로 그 자신의 문제로 정확히 인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모자란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이루고 싶었던 어떤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정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때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작은 틈이라도 있을 경우에 사람은 고통을 극복하고자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대해 핑게를 찾기 시작한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아는 가족의 경우, 부모의 가치관도 멀쩡하고 풍족한 가정이면서 아이에게 뭔가 심한 요구를 하지 않는 매우 괜찮은 가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어린 시절 전학을 자주 다녔다는 이유로 인해 삐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이뤄내지 못하여 존개감과 자존감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아이는 끊임없이 주변의 탓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한번 그것에 맛을 들이게 되면 이 마약과 같은 효과로 핑게꺼리 찾기는 아주 훌륭한 자기 합리화의 기술로 발전된다. 즉 잘되면 자기 탓, 안되면 남의 탓을 하는 것이다.

 

부모가 바빠서 나를 돌봐주지 않으니, 부모 중 한명이 없으니, 집이 가난하니, 집이 그지 같아서 친구를 데리고 오지 못하니, 돈이 부족해서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못하니, 아빠가 술 주정뱅이니, 부모가 자신을 인형처럼 키우려고 하니, 부모가 나를 사랑해줄 생각은 안하고 매일 성적 이야기만 하니..  심지어는 노스페이스 점퍼가 없어서 라든가 사는 곳이 강남이 아니니까지 나올 지경이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주변에 핑게를 댈 꺼리를 갖게 되면 이때부터는 그 자신이 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은 바로 자신의 문제가 아닌 주변의 문제가 된다. 그러니 내가 문제가 아니니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을 힘들게 극복하고 노력할 주체가 바로 내가 아니고 주변 상황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니 결국 그 스스로가 변화 될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일까? 아니다. 실제적인 문제는 이런 삶을 지속할 경우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인해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결과가 나오고 이로 인해 자신의 삶 자체를 스스로 하찮게 여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위기에 대한 자기 극복 능력이 매우 부족해 늘 실패를 경험한다.

 

물론 여기에서 다양한 선택이 이루어진다. 어떤 아이들은 불우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 잘 크는 아이들도 있고, 어떤 아이들은 비록 삐뚤어진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커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소수는 그것을 스스로 극복할 능력을 타고나지 못해서 결국엔 그런 종류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여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아주 극소수는 연쇄 살인범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인해 허구의 작품에서 나오는 연쇄 살인범들은 꽤나 머리가 좋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의 연쇄 살인범은 매우 찌질하고 어설프며 그 살인 대상 역시도 자신보다 약한 여자들이나 혹은 사회적으로 그늘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죽임으로서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자신의 앞에서 생명을 갈구하면서 벌벌 떠는 존재들을 보면서 그 스스로 어떤 위대한 존재가 된 것인냥 착각을 하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이런 존재들이 확인되는데 이들이 바로 일명 악플러들이다. 타인을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무시하고 욕하고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까지 서슴없이 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두운 방에서 밝게 빛나는 모니터 안의 세상에만 전지 전능한 존재가 된다. 이들은 거의 연쇄 살인범에 다가갔으나 실제로 그런 일을 할 용기조차 없는 찌질함의 최고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다.

 

근본적으로 연쇄 살인범이든, 비행 청소년으로 자라 결국 깡패가 되든, 악플러가 되든 그것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는 바로 유아 시절에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여기엔 도대체 어떤 상황까지를 자신의 탓으로 여길 수 있는지에 대한 선천적인 인식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 악물고 참아내기도 하고 다른 이는 그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넘겨 버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경우 모두 자신에 대한 제어력을 상실한 인간에 대한 단상이다. 또한 인간의 정신력이 얼마나 약한지를 모여주는 사례가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노력해서 극복 할 의지도 없어서 만들어진 정신적인 불구자인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들은 사지 중 하나가 절단 된 신체적 불구자 보다도 훨씬 존재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본 스릴러 장르에 속한 어떤 영화나 소설이 있고 그 안에 일종의 멋진 능력을 가진 싸이코 킬러가 있었다면 그 존재는 완벽히 허구이다. 또한 깡패들의 멋진 의리를 다룬 한국영화를 보았다면 그 역시 완벽한 허구이다. 사이코 킬러나 깡패는 모두 어린 시절 자신의 부족함을 온통 주변의 상황을 통해 핑게꺼리로 해결한 정신적 미숙아들일 뿐이다.

 

우린 누구나 연쇄 살인범이 될 수 있고 깡패가 될 수 있다. 단지 그 길이 그리 좋은 삶은 아니기에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평소에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집중한다. 하지만 자신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 눈을 제대로 뜨고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눈을 내려 깔고는 못본척 하면서 그것은 내 탓이 아니야 라고 스스로 끝없는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많아진다. 사회가 점점 더 경쟁을 추구할수록 아이들은 그 경쟁에서 밀려날 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위로하게 되는 것이며 이런 아이들이 늘어나면 이젠 그들끼리 모여서 서로가 서로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네가 틀린 것이 아니고 환경이 문제라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다면 핑게꺼리를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록 외적으로 멀쩡하게 잘 키운 아이라고 해도 우린 대부분 자신이 잘못한 경우나 실수한 경우에 늘 핑게를 찾기 급급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못 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사람의 발전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비록 그 과정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린 좀 더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 자신을 삶을 책임지는 자세를 배우는 이유이다.

 

물론 아이들이 처음부터 자신의 삶을 그렇게 가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인륜을 벗어난 범죄가 횡횡하고 사회에 강력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 시스템이 커가는 아이들에게 너무도 심한 압력으로 누루고 있다는 뜻이 되며 결국 그것을 버텨내짐 못한 아이들은 자신들 만의 핑게꺼리를 찾아서 그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극복했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결과는 우리 사회의 강력범죄율을 통해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체크해볼 수 있는 상황으로도 연결이 된다. 요즘 들어 반 인륜적인 범죄들이나 연쇄 살인범들이 자주 출몰하는지에 대해 세상이 흉흉해졌다는 한마디로 설명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주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모두의 생각이 모여모여 거대한 압력이 되고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논리화 되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고 있다. 범죄의 유형이 점점 심각해진다는 것의 의미는 우린 지금 점점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들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그리고 정신은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즉 그 모든 영향이 나에게 전달되더라도 결국 그런 영향을 해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오직 그 자신의 영역인 셈이다. 그래서 그 스스로가 결정하는 그 모든 것은 온전히 자신이 결정하고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우린 '핑게꺼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 인간은 스릴러 작품에 나오는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처럼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여러가지 작품들에서 우리들의 정신적 발달 단계나 혹은 인간의 깊은 의식 세계에 대해 끝없는 호기심을 들어내고 있는데 실제로 이런 것들은 정말로 우리의 의식에 터무니 없는 환상을 심고 있는 셈이다. 우린 어린시절 꾸중 한마디나 혹은 놀랬던 기억 하나로 인해 연쇄 살인범이 되기도 하고 칭찬 한마디에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우린 누구나 인정받고 하는 욕구가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충족되는지에 따라 매우 다른 형태의 결론을 맺는다.

 

결국 그 안에 숨겨진 잘먹고 잘자고 자신의 유전자를 잘 번식시키고자 하는 기본적인 생명체 본질적 욕구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충족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감과 자존감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든 행동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그리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린 너무도 오랫동안 인간이란 거만한 존재에 대한 환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우린 인간이기에 동물와 같은 본능적 욕구만으로 우릴 설명하길 거부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우리 전체가 가진 거대한 핑게꺼리 중 하나이다. 우리가 동물과 달라야 하는 핑게꺼리. 그런데 누구나 그것을 가지고 있어서 우린 이걸 착각이 아닌 진실한 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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