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인 인간들의 기본적 상호작용 이면서, 어쩌면 우리 인간의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는 나의 이득에 관한 실제적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주고 받는 것에 대한 다양한 계산법'이다. 물론 여기에서 이득은 단순한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한가도 역시 이런 이득 중 하나이며 어쩌면 물질적인 것보다도 훨씬 원천적인 이득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단어적으로 계산이란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실제로 이 단어는 그리 좋은 의미로 전달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이것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특히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계산적인 사람' 이란 평가를 하면 누구나 그리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실제로 '계산적인 사람'도 그사람에게 '넌 너무 계산적이야' 라고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왜 계산적인 사람으로 평가 되는지에 대해 따질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그런 행동에 깔린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려 들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옳은 판단은 아닐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실제적으로는 다 계산적이다. 그 계산이 직접적인 것이냐 혹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간접적인 것이냐에 대한 차이만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욕탕에서 만난 처음 보는 사람과 서로 등을 밀어주는 오래된 관습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부탁했을 때 상호 모두 등을 밀어주겠다는 암묵적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매우 직접적인 계산이다. 그래서 만약 먼저 등을 밀린 사람이 그 후 상대의 등을 밀어주지 않겠다고 하면 이때 시비가 일어나거나 혹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매우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서로 말이나 문서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공통된 사회에 속해서 같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말없는 계약을 맺는 것이다. 우린 그래서 외국인과 서로 등을 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간 사회에서 이런 형태의 직접적인 계산은 그리 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형태의 관계지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내 등을 밀어주면 나는 거의 무조건 상대의 등을 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다음에도 일어난다. 옆집에 사는 어떤 사람이 맛있는 떡을 했다고 해서 가져오면 그 빈그릇을 줄 때 거기에 뭔가 채워줘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물론 친한 사이라면 그것을 훗날 자신이 먹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채워주면 되지만 상대가 어떤 성격인지 알지 못할 땐 바로 채워줘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을 갖는 것이다. 혹시나 상대가 바로 채워주지 않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심지일수록 이런 직접적 거래는 줄어들게 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사는데 모두 이런 직접적인 계산이 이루어지면 너무 피곤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결과로 인해 우린 상대가 나에게 어떤 호의를 베푸는데 있어서 약간 방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괜히 부담스러우니 상대의 도움이나 호의를 받기 싫은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나에게 잠재적 빚이 된다. 즉 언젠가 상대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내가 그것을 해주지 못하면 나는 마치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지 않은 상대처럼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우린 그런 면까지도 스스로 알고 있기에 어떤 호의나 도움을 줄 때 그거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지 않으려고도 한다. 즉 상대가 나의 호의에 부담을 느낄 수 있으니 그 호의 조차도 조심스럽게 하고 또 했더라도 그것을 내가 상대에게 언젠가 돌려받을 어떤 것이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 좀 시끄러운 분쟁이 야기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계산을 명확히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전혀 그것을 계산하지 않을까?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전혀 기대하는 바가 없을까? 이것은 나는 온전히 세상을 향해 뭔가를 주기만 할 뿐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집안에 큰 일이 생기면(장례, 결혼 등등) 자신이 아는 이들에게 연락을 한다. 물론 그 전에 그 사람들 대부분 역시 많은 그런 경조사에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연락을 하는 것이다. 만약 평소에 그런 경조사를 많이 찾아다니지 않은 보통사람이라면 자신도 역시 연락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연락을 해도 올 사람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누군가의 경조사를 찾아다니는 것이 어떤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나의 경조사에 너가 꼭 와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엔 순수한 의도가 있다. 상대가 좋거나 슬픈 일을 당했으니 내가 가서 위로해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나의 경조사에 온사람과 안 온사람을 기록하는 사람들도 확실하게 있다. 우리가 경조사때 내는 축의금이나 부조금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과 달리 순수한 의도로 갔다고 믿는 자신의 모습과는 달리 정말로 그것이 오직 그런 의도만 있을까? 실제적으로 여기엔 자신이 모르는 계산이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미래에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그렇게 주변을 잘 챙기면서 살아왔으니 누군가 또 나에게 그런 챙김을 해주리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목욕탕과는 달리 직접적인 계산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하기도 한다) 결국 간접적인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면서 우린 어떤 적당한 순간이 되면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고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하지만 이 모든 행동은 그것들을 받은 직접적인 대상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기에 결국 다수의 불특정 대상에게 이것에 대한 암묵적 기대를 하고 있게 된다. 즉 내가 A,B,C,D,E,F 여섯명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게 되면 나중엔 C,E,K,J 라는 사람들에게 이 호의를 되돌려 받는 경우가 생긴다. 여기에서 K,J는 내가 호의를 베푼 사람들도 아닌데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기적이라든가, 배려심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들은 보통 직접적인 계산이 능한 사람들이다. 즉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친절하게, 아니라고 판단이 되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거나 혹은 심지어 방해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늘 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신경을 써준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은 그것에 대해 직접적인 보상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는 당연히 보상에 대한 규칙이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결국 보상을 받는다.
우리의 계산법에서 직접적인 계산은 명확하긴 하지만 이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도 하다. 물론 이 직접적인 계산을 아주 잘하는 이들은 매우 큰 성공을 거두긴 한다. 왜냐하면 당연히 이득을 볼 것에만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기에(호의를 베풀기에) 여기에 확실한 보상을 받는다. 사장에게 아부하는 직원은 다른 직원들이 뭐라고 그를 비난해도 결국 승진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한정된 시간을 정확하게 목표에 조준 함으로서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란 보상을 받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솔직히 이런 능력을 가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보통 머리가 안따르는 사람은(계산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엉뚱한 계산을 해서 잘못된 곳에 투자를 하는 바람에 솔직히 더욱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보통의 일반사람들은 좀 안정적인 제삼의 정책을 편다. 그것이 바로 임의의 대상에 대한 목적없는 호의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투자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물속에 고기가 있든 없든 무조건 그물을 펴는 것과 마찬가지다. 걸리면 좋고 안걸려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다고해서 누구나 물속의 고기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물을 펴지는 않는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어느곳에서 그물을 펴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것 정도는 확인하고 간다. 그런데 그 정보를 누가 주느냐? 바로 계산 능력이 좋아서 이미 그 정보를 통해 그곳에서 많은 고기를 낚은 이들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정보를 흘린 후 그 근처에서 자리를 펴고 오는 이들에게 자릿세를 받아 또다른 이득을 취한다.
세상 사람들의 60%는 이렇게 소문을 듣고 자릿세를 내면서 그물을 편다. 그리고 20%는 잘못된 곳에 가서 그물을 편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이미 그 자리에서 그물을 펴 고기를 낚은 후 정보를 주고 자릿세를 받는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그런 이들 밑에서 자릿세를 대신 받는 역할로 살아간다. 물론 이 비율이 내 마음대로 정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중 60%를 차지하는 다수가 자신과 비슷한 임의의 대상에 대한 호의를 베풀면서 살아간다고 믿고, 그것이 옳바른 삶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소위 기득권이라고 부르는 상위 10%와 그 밑에서 빌붙어서 살아가는 또다른 10%를 비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이득과 손해말고도 우리가 남들과 같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계산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결국 계산인 것들도 있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매너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DMB, 게임을 하는 소음등이나 심한 악취, 눈쌀이 찌뿌려지는 행동,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공공장소에서 애정행위, 유원지나 계곡등의 산더미로 쌓이는 쓰레기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요즘 같은 휴가철의 밤시간의 술문화와 고성방가 등등 법적 영역이 미치기 힘들고 솔직히 법적 처리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것들이 바로 이것들의 종류이다.
왜 우린 상대가 내는 소음에 불쾌함을 느낄까? 이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소음을 내지 않기에 그렇다는 원리가 숨겨져 있다. 내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음을 발생시키지 않는 다주의 불특정인들을 대상으로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런 호의를 무시하고 소음을 내는 이들을 보면 마치 등을 밀어줬는데 그냥 가버리는 어떤 사람을 보는 것처럼 기분이 나쁜 것이다. 차이라면 얼마나 간접적이냐에 대한 부분만 존재한다.
매우 시끄러운 식당에서 두무리의 모임이 있다고 칠 때 그들과 관련없는 사람들은 이 두 모임 때문에 귀가 아파 빨리 나가고 싶어하지만 각각 두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이야기게 빠져 실제로 자신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고 또한 자신들만큼이나 시끄러운 또 다른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다른 이들이 떠들어 주는 것이 고마울 때도 있다.
결국 소리를 내는 이들은 다른 사람의 소음에도 그리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즉 자신의 배려를 하지 않았기에 상대의 배려없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다. 밥을 심하게 쩝쩝거리면서 먹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먹는 것을 별다른 감정없이 볼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신경쓰인다면 아마도 그 사람에게 충고하기 보다는 그 스스로 그 쩝쩝거리면서 먹는 버릇을 고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엔 다른 이들이 그렇게 쩝쩝거리면서 먹는 모습을 보면, 자신은 이미 고친 버릇이기에 타인의 그런 모습을 매우 좋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예들을 살펴보면 결국 우린 그 자신의 어떤 노력에(크던, 작던) 의해 뭔가 타인들에게 배려를 했다면 그것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짜증과 분노를 느끼는 당연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것은 내가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보면 뭔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점은 보통 사람들은 이런 숨겨진 계산에 대해 잘 인식을 하지 못하기에 이런 상황이 되면 상대를 비난할 수많은 논리적 이유를 가져다가 설명을 하게 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것 다 필요가 없다. 그냥 내가 한 행동에 대한 적절한 응대를 받지 못했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 상대를 비난 하는 경우가 많을수록 자신이 그만큼 뭔가 힘들게 타인들에게 노력한 것이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단지 우린 이것을 우리가 계산적이기 싫어하는 사회 전반적인 관념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속이면서 난 계산적인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배려없음이 싫다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하지만 정말로 계산하지 않는다면 타인들에게 짜증을 덜 느껴야 하는 것이 맞다. 가장 더러운 노숙자는 그 어떤 더러운 사람이 주변에 와도 짜증내지 않는다. 그가 가장 사회에 대해 악영향을 미치기에 다른 악영향을 미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리 개의치 않는 것이다.
실제로 살아가면서 이런 무작위 배려와 그것에 대한 무작위 보상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있다면 우린 많은 이들의 배려없음으로부터 그리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수동적인 모습이긴 하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계산을 좀 더 명확하게 해서 우리 사회 전체적인 손해와 이득에 대한 좀 더 적나라한 행동을 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면에서는 귀찮아하거나 혹은 너무 마음이 넓다.
서양사회와 우리 사회에 대한 차이점을 보면 실제로 이런 부분에 큰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입게 되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손해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또한 그만큼이나 다른 이들에게도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우린 이것을 일명 개인주의라고 부르면서 일종의 이기주의 성향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자신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찾는 것에 대해 당당하다. 즉 계산을 하는 것을 인간의 기본적 속성이라고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판결법을 법으로 또한 집행하는 국가의 사법기관으로서의 능력으로서 당당히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같은 얼치기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사람 스트레스를 벗어나기가 좀 힘들다. 현재로서는 수동적인 방법을 연구해보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현명한 방법이다. 적극적인 대처는 우리 개개인의 삶을 너무 힘들게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극적인 방법이 쉬운 것이냐는 절대 아니다. 호의를 베풀고 그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 그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 단지 나는 이 글에서 그 호의를 베푼 주체들이 그만 가면을 쓰고 자신의 기대심리를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싶다. 그래야 이 사회가 적극적 대처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중 단 한명도 계산적이지 않는 사람이 없다. 단지 인정할 줄 모르는 이와 인정하는 이의 차이만 있다. 그리고 이 계산능력이야 말로 인간의 지능의 차이, 혹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거의 유일한 능력이다. 우린 동물보다 모든 판단에 있어서 더 나은 계산을 함으로서 극대화 된 효율성에 따른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산법에서 지식과 경험은 기본으로 중요하며 이것을 쌓는 능력이 바로 지능이다. 거기에 이것을 다시 꺼내어 활용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두뇌활동이다.
우린 머리가 좋으면 왜 잘사는지조차 모르고 머리가 좋길 바란다. 머리가 좋다는 것은 단순하게 이득과 손해에 대한 계산을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잘 산다. 따라서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계산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런 이유로 인해 머리가 좋은 이가 공공의 이득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려면 너무도 힘든 의지적 벽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배우고 똑똑할수록 약삭빠를 수 밖에 없고 세상은 그런 이들이 힘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늘 기득권이란 상대적으로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제도들은 사람들의 욕심을 어느선까지만 부리도록 유도할 수 있다. 많은 세금이나 혹은 약자를 보호하는 강한 의지적 제도들은 그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그런 정책을 펴는 것조차도 이미 기득권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투표' 이 하나만이 이것을 바꿀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린 행정부와 입법부를 직접 선출하여 우리가 원하는 공정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지만 이미 기득권의 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소화 시키는 노력을 해왔다.
우리가 만약 여기에서 인간의 본성적 특성을 무시한 채 단순히 '계산적이지 않는 존재' 에 대한 의지만을 불태운다면 우린 늘 이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린 순수하고 때 묻지 않는 인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잘 계산을 하되 적당껏 하는 인재들을 그 자리에 보내야 한다. 이미 지금까지 순수한 의지의 인재들을 보냈다가 얼마나 많이 실패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정적으로 흐르는 삶 (0) | 2013.09.09 |
---|---|
감정에 대한 고찰 - 화 편 (0) | 2013.08.31 |
누울 자리가 있어야 눕는다 (0) | 2013.08.02 |
선택의 불행 - 짜짱과 짬뽕 (0) | 2013.07.28 |
대리만족이란 이름의 마약 (0) | 2013.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