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자나 여자나 관계없이 눈물에 콧물까지 질질 흘리면서 울었던 기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 중 어딘가를 신나게 가다가 발이 걸리거나 꼬여서 넘어진 후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나서 누군가 측은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이 있어야 그제서야 울음을 터뜨리는 기억이 있는 사람도 있고, 혹은 커서라도 어린 아이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광경을 목격한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 현재 크고 있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의 모습을 조금만 관찰해봐도 이런 성향은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광경임을 알 수 있다. 아이가 아파서 울 때, 그리고 그 아픔이 매우 강한게 아니라 적당히 아플 때, 아이는 우선 자신의 보호자 즉 엄마나 아빠의 모습을 확인한 후 그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확인하면서 울기 시작한다. 이것은 어느정도 인지가 발달한 아이들에서 보여지는 현상인데 그것이 없는 신생아들은 그냥 운다.
이 아이들의 자연스운 일종의 눈치보기 행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뻗을 자리가 있어야 뻗는다 혹은 누울 자리가 있어야 눕는다 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설명해준다.
인간은 보통 매일매일 누군가와의 관계속에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거기엔 기쁨도 보람도 슬픔도 짜증도 모두 함께 올 수 있는데 누구나 누군가의 갈등에 의해 화가 나게 되면 그것이 폭발해서 크게 싸우거나 혹은 서로 완전히 안면몰수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에 휩싸인 감정에 대해 매우 자신감 있어 한다. 즉 상대가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화를 내는 정당한 당위성을 정말로 굳건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혹시라도 흔들릴까봐 자신의SNS에 연결된 온라인 대화상대를 모두 한번씩 연결해서 그 자초지종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할 땐 자신의 잘못은 줄여서 표현하고 상대의 잘못은 크게 부풀려서 표현 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주변인들은 모두 그 사람을 지지해주면서 보통은 같이 그 사람을 씹어준다. 나쁜 놈이니 인간같지 않다느니 찌질하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혹시나 눈치가 없어서 둘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조언을 해줄 것 같으면 어떻게든 계속 상대 잘못을 부풀려서 결국 자신의 문제는 적고 상대가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얻어내고야 만다. 이것을 요즘은 '답정인'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가보다. 상대로 부터 들을 답을 정해놓고 묻는 사람'이란 뜻이다.
* 물론 결국 끝까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후 차단된다. 그리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 하면서 둘 사이의 싸움이 나지 않는 한 귀한 우정을 이어간다. 단 싸움이 나면 크게 사단이 난다. 그것은 그 그룹 전체가 두 사람의 입장에 따라 둘로 나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어떤 갈등상황에 놓이게 되면 왜 이렇게 자신의 지인들에게 혹은 익명의 게시판에 자신의 사연을 올리면서 자신의 편을 만들려고 할까? 나는 이 행동을 바로 누울자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자신이 비빌 언덕을 만드는 행동인데 실제로 이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나의 변치않는 성향이 아닌 상대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에 대한 부분이 훨씬 크게 작용한다.
예를들어 매우 까칠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도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는 더 까칠하고 더 성질이 더러운 사람을 만나면 너무도 온순하고 잘 웃는 사람으로 변한다. 또한 안하무인으로 사람 알기를 뭐같이 아는 깡패도 자신보다 더 악날하고 주먹을 잘쓰는 사람을 만나면 '형님' 하면서 앵기는 것이다.
어떤 사무실에서는 매우 신경질적이고 누구나에게 불친절한 오래된 직원이 하나쯤 있을 수 있다. 이 직원은 10년이 넘게 근무한 탓에 업무도 빠삭하고 또 아는 이들도 많은 반면 자신의 일을 너무 지겨워 하는 탓에 누구에게나 일을 해줄때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매우 심하게 화를 내면서 까칠하게 한다. 하지만 이 직원은 그의 직장 내에서 명줄을 쥐고 있는 자신의 직속 상관이나 사장에 대해서는 너무도 천사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 모습은 절대로 아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생존본능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직원의 어리석은 모습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싸우고 그가 혹은 그녀가 잘못한 점을 콕콕 찝어서 지적하고 또한 그런 갈등이 생기는 것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명 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새로운 도전자에 대해 거의 사장급의 친절함을 베풀기도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신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는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배분받아 하는 일, 즉 월급을 받기 위한 이유를 회사내에서 하면서도 그것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월급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인데, 보통 이런 경우 이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길때마다 자신의 SNS에 붙어 있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실수를 엄청나게 부풀리고는 자신의 불친절함은 쏙 빼서 얘기한다.
그리고 이미 수년간 그사람과 호흡을 맞춘 그의 지인들은(호흡이 안맞는 사람은 이미 재수없다는 이유로 인해 차단된지 오래다) 그에게 열렬한 편들기를 해준다. 그리고 곧 자신이 잘못 한것이 적다는 착각에 빠지면서 스스로에게 자기합리화를 한다.
그런 성향의 사람에게 보통 다른 사람들은 불필요한 트러블을 막기위해 또는 관계가 어색해지는게 싫어서 직급이나 혹은 업무상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격을 맞추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매우 원칙적이고 강한 성격을 가져서 이런 것을 용납하지 못함으로서 처음엔 강한 충돌이 일어나지만 결국 통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인식하는 순간 기어들어가는 현상이 발행하는 것이다. 이런 면은 아이를 키울때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좋다. 아이들 역시 통하지 않을 것에는 땡깡을 부리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보통 자신의 성격이 매우 일관되고 원칙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그것에 대해 평소에 혈액형별 성격까지 뒤져보면서 '맞아 맞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성격을 좀 더 세밀하게 상황별로 관찰해보면 우린 실제로 그리 일관적이지 않다. 현실적으로는 매우 변화무쌍한것이 더 맞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성격은 혼자 있을때보다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동일한 사건이라고 해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내 반응을 매우 달라진다. 같은 실수, 같은 대접을 해도 그것에 대한 동일인의 반응이 다른 것이다.
평소에 스스로가 물건값을 매우 잘 깍고 아끼면서 살아간다고 믿는 어떤 주부도 자신이 잘 모르는 수백만원짜리 제품을 사러간 자리에서는 단 10원도 못깍는 경우가 많다. 콩나무 천원어치에서는 100원을 깍가 10%나 이득을 보는 강한 아낌정신이 있는 사람이지만 수백만원, 수천만원짜리를 파는 아주 잘 인테리어 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물씬 풍기는 백화점 직원에게는 주눅이 들어서 입도 뻥긋 못하는 것이다.
나름 성격 좋다고 소문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에게 말 잘걸고 금방 친해지는 그런 사람도 자신에게 너무도 냉냉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땐 식은땀을 질질 흘리는 수가 있다. 물론 그럴 경우가 적을 뿐이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이 사람은 이제 그런 사람에게까지도 넉살좋게 말을 걸 수 있는 한단계 도약의 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죽지 않고 한 성질하는 성향이 있는 남자도 말그대로 용문신 쭉쭉 그려지고 깍뚝이 머리를 가진 조폭의 느낌이 확 나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치는 순간 눈빛이 서로 마주치게되면 말 그대로 상대에게 기가 죽어서 자신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이것이 비슷하면 서로 싸움이 나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사람이면 자신도 모르게 평소에 마음속 가득찬 호연지기가 어디갔는지 모를 정도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름 일관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바로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보통의 성격을 가졌으며 그런 이유로 인해 자신의 평소 성격정도로 행동을 해도 대부분 주변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수부대나 힘들기로 소문난 선원생활 등등 우리가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있게 되면 어떤 사람은 아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것과 좀 비슷한 맥락으로 많이 언급되는 말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이다. 즉 누군가가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그 자리가 가진 권한이나 혹은 권위로 인해 그 사람 자체가 바뀐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없이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도 경찰이 되어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혹은 범인을 험악하게 다뤄야 할 때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한다. 혹은 그 사람이 착하냐 안착하냐에 상관없이 가진 직분에 의해 그의 숨겨진 본성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 모두는 자신이 직접 해야 할 너저분한 일을 주변의 누군가 해주게 되면 그때는 스스로가 매우 우아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예전에 그것이 바로 양반이나 귀족들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한명의 귀족이 귀족으로서 살아갈 때 필요한 시종은 열명이 넘게 필요했을 것이다. 빨래하고 음식하고 치장시키고 마차를 몰아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있어야 귀족은 귀족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귀족은 아마도 자신의 성격이 원래 귀족이라고 단 한번도 의심치 않아서 자신은 빨래, 청소, 빵을 만드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도 않으면 할 수도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만약 이사람에게서 그 시종들을 일년만 떨어뜨려 놓으면 이 사람은 빨래하기가 싫어서 그지같은 옷을 입고 스스로 빵을 만들어 먹을 것이다.
현대에서도 우리가 문명인으로서 나름 체면과 체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문명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우리 그 자신이 그런 존재여서가 아니다. 우리는 요즘 이것에 점점 종속화되어서 도대체 문명이 없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살아왔는지조차 희미해졌지만 실제로 우린 도시화된 사회 그 자체가 뻗을 자리라고 믿기 때문에 뻗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도 돈과 여유가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원래 맛있는 것이 아니면 안먹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즐기는 그 모든것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이런 점이 그 자신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즐기는 그 어떤것도 절대화 시키면 안되는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우린 아직도 그 어린시절 눈이 마주치면 울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단 한발국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정에 대한 고찰 - 화 편 (0) | 2013.08.31 |
---|---|
기대심리 (0) | 2013.08.12 |
선택의 불행 - 짜짱과 짬뽕 (0) | 2013.07.28 |
대리만족이란 이름의 마약 (0) | 2013.07.07 |
내 마음속의 분노 (0) | 2013.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