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대리만족이란 이름의 마약

아이루다 2013. 7. 7. 08:46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드라마의 왕국이란 이름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현재 정규방송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의 숫자는 정말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것들에 대한 정보를 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 온 나에게도 각종 포탈을 통해 전달되어 오는 수 많은 드라마를 소재로한 기사들의 끊임없이 노출은 그런 짐작을 어느정도 타당하게 느껴지게 해준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수 많은 규모의 영화들이 거의 매일 쏟아지고 있으며 이제 커질대로 커진 거대 체인 상영관을 통해 동시에 수백개의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일도 쉽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일일 관객 동원 수가 수십만명인 영화가 꽤나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 TV에서는 각종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표방한 21세기형 오락 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의 감동과 탄식을 자아내고 있으며 그나마 여기에서 조금 벗어난 이들도 외국에서 가져온 잘 만들어진 수 많은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에서 빠져서 그것들을 즐기고 있다. TV로 부터 조금 멀어진 나 역시 이런 부류 중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이런 종류의 만들어진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단 이런 이야기 모두는 처해진 상황과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성격만 다를 뿐 실제로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란 점에서 기본적인 공통점을 갖는다. 심지어 동물을 중심으로 하는 동물의 왕국이나 NGC 같은 채널에서 방영되는 자연 다큐멘터리들 역시도 모두 인간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고 듣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결국 우리는 이 수 많은 주제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린 공통적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인간의 삶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른 인간들의 삶을 바라보고 동조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우리들의 심리는 도대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오랜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들의 심리파악을 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왔다. 실제로 우리는 총 3,000개에 달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하니 정말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얼굴의 가지수는 엄청난 것이다. 물론 우린 보통땐 즐거움, 분노, 슬픔, 기쁨 등을 표현하는 희노애락과 지루함, 짜증남, 관심없음, 겁먹음, 경멸함, 존경함, 관심많음, 호기심 등등의 다양한 형태의 마음 상태도 얼굴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

 

이 자신의 심리를 말로 명확히 하지 않고 얼굴을 통해 하는 의사소통 방법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명확히 말을 하지 않았기에 증거가 없다는 면에서 유용한 점도 존재한다. 즉 싫다는 감정도 말을 통해 '난 네가 싫어' 라고 하면 그 사실은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리지만 표정으로만 싫다는 것을 표현하면서 말은 네가 좋다라고 표현하면 상대는 이것에 대해 매우 혼란스럽게 된다. 그리고 혹시나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그 상대가 나에게 비싼 선물을 해주어서 급격히 호감도가 올라갈 경우 어렵지않게 그것을 뒤집을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 글은 가장 되돌릴 수 없는 표현 수단이 되기 때문에 우린 글을 쓸 때 가장 신중하게 생각하는 버릇도 가지고 있다.

 

아무튼 표정이나 몸짓을 통한 의사 전달 방법에 있어서는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그것을 표현하는 주체와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감지해내는 주체이다. 즉 나와 너, 너와 나의 관계에서 서로는 각기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것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감정을 알아챈 후 얼마나 적절히 처신하느냐에 따라 관계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관계에 서투른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서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데 결국 상대의 감정을 잘 알아채지 못하거나 혹시나 알아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는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설명하기 힘든 거부감을 주어 결국 주변사람들이 그를 찾지 않게 되는 외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바로 우리가 즐기는 수 많은 이야기속에서 나오는 가짜 삶에서 멋진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소설, 드라마, 영화, 리얼리티 쇼에서 나오는 수 많은 캐릭터에 대한 공감에 따른 대리만족 현상이다.

 

대리만족이란 말은 무엇일까? 그냥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내가 직접하지 않고 누군가 어떤 다른 이가 내가 하고픈 일을 해주어서 그것에 대해 만족하는 일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나쁜 짓을 하는 부패한 정치인이나 혹은 비도덕적 경제인에 대한 처벌을 하고 싶은데 실제로 가진 능력이 없으니 분노만 하다가 드라마에서 홍길동 같은 이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대단한 능력으로 이것을 대신해준다면 그 순간 만큼은 어떤 통쾌함을 느끼면서 그것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공감은 당연히 이것을 제작한 이들의 의도가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주인공이 겪는 수 많은 고난과 고초가 있다. 즉 쉽게 하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정말 우리가 실제로 겪기 힘든 매우 고달픈 역경을 어떻게든 이겨내어 결국 시청자들이 원하는 '권성징악' 을 이루어 낸다.

 

아마도 우리가 접하는 그 모든 이야기의 99%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만약 이런 일반적인 흐름을 벗어나게 되면 그 작품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특별한 장르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상업적인 성공을 얻기란 매우 힘든 결과를 초래한다. 즉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다면 어떤 상황이든 간에 권선징악의 결론을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이런 주제를 너무 식상해하는 경향이 있으니 약간 좀 더 틀어주면 된다. 즉, 단순히 주인공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멋진 악당이나 혹은 두가지 이상의 애매한 결론을 내어서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열어주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심지어 악당이 이기는 결론을 내는 작품도 아주 가끔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도 악당이 악당이 될 수 밖에 없는 공감을 얻어내는 것은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대리만족은 꽤나 괜찮은 효과를 주기도 하고 또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다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면 이 대리만족은 정말 좋기만 한 것일까?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어떤 여자가 매우 힘들게 하루하루를 운동과 금식으로 보내고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배경엔 이 여자가 자신의 몸무게와 몸매로 인해 얻은 마음의 상처가 자리잡고 있을 때 어떤 이유로 인해 그 상처가 치유되거나 혹은 만족할 수준이라는 주변의 평가가 있게되면 물론 마음은 매우 평안해지고 그 힘든 과정을 그만해도 되는 좋은 효과는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마음이 편해졌다는 그 사실로 인해 모든 것이 좋아진 것일까?

 

어떤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에는 자신이 어린시절 받았던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 하는 경우도 꽤 있다. 즉 어린시절 받은 어떤 충격으로 인해 자신의 삶의 궤도를 정하고 거기에 강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되어서 결국엔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물론 삶이란 것이 이것이 정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경우 이것이 목표였다면 어떤 의미에서 어린시절 그 상처를 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때 그 상처를 보듬어주고 달래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당시는 마음이 편해졌을지 모르지만 그 삶은 어떻게 달려졌을까?

 

물론 인간의 삶이란 정해진 것이 없는 여정이기에 어떤 삶이 더 옳다라고 말하긴 힘들다. 단지 그 사람이 이루어낸 업적만을 보면 좀 더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살아온 삶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리만족은 바로 상처입은 우리를 보듬어주고 달래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대놓고 당신을 치유합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가진 분노와 불만을 어느정도 간접적으로 풀어주면서 통쾌함을 느끼게 해 마치 우리 사회가 매우 건강한 방향으로, 즉 권선징악이 마치 우리 인간사회의 기본적 방향인냥 느끼게 해주는 효과를 준다. 이런 믿음에 근간엔 하늘이 벌할 것이라든가, 어떤 신이 사후의 세계에 죄를 내릴 것이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우리의 근거없는 믿음도 한몫해서 우리 스스로를 많은 착각속에 빠지게 해 버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로또 라는 복권상품을 매우 싫어하는데, 이 복권도 그런 심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0.000001% 가능성을 열어주고 마치 너도 언젠가 원하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거의 거짓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만들고 가짜 희망을 품게 만들어 결국 원래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에 덜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말로 비빌언덕이 있으면 급속히 의지가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편안함을 이기고 힘든 세상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어느정도 가능성이 생기는데 이런 것들은 그런 의지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겨울내 쓸 땔감을 구해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장 따뜻한 이불이 추위를 막아주고 있기에 그냥 이불속에서 그 따뜻하고 편안함을 즐기는 행동과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진짜로 겨울이 오게되면 단순히 이불속에서 버틸 수 없음을 알기에 당장의 편안함을 이겨내고 결국 땔감을 구하러 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TV 속에서 불타고 있는 모닥불을 우리의 맘에서 타고 있어서 심리적으로 우리가 마치 모닥불을 쬐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대리만족의 실체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도 수 많은 문제에 쌓여 있고 정말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힘든 과정들이 눈 앞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드라마에서 나오는 홍길동이 어느날 이것들을 몽땅 다 바로잡아 주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마치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장 나를 귀찮게 하고 흔들어서 불안하게 만드는 현시대의 문제점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나의 머리엔 내가 더이상 이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주는 또 다른 수많은 즐길거리, 먹을거리, 볼거리 들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층은 그것을 매우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바라봐준다.

 

뭔가 자신이 가진 문제점이나 혹은 변화를 하고 싶다면 일단 자신을 그리 행복하지 않는 환경에 놓아야 한다. 행복은 내가 만족한 순간을 의미한다. 어떤 이유로 인해 내가 변화를 꿈꾼다면 또 다른 이유로 이것을 눌러버릴 만큼 행복해 하면 안된다. 이 후자에서 얻어낸 행복은 나에겐 마약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원래 내가 꿈꾸던 변화를 시작하지 못하도록 해버리고 그 결과로 나는 때를 놓치고 점점 자신도 모르게 자포자기의 과정으로 흘러간다.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삶에는 정답이 없으니 이것도 하나의 삶이다. 하지만 평생을 마약이나 술에 취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좋은 삶은 아닌 듯 보이니 어떻게든 인간이라면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꿈꾼다면 일단 자신을 너무 만족시키는 버릇을 좀 버려야 한다.

 

자기만족은 행복을 위한 매우 중요한 필요요소이다. 하지만 또 반대로 이 자기만족은 자신이 더 나갈 수 있는 것을 가로막는 매우 좋지 않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리만족은 비슷한 효과를 주면서도 더 좋지 않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자기만족이란 실체가 있는 만족과는 달리 조작된, 그리고 착각하는 만족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바로 시청자가 원하는 대로 그 방향을 정하는 명확한 의도의 상업용 드라마들이다. 즉 TV에서 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프로그램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오래동안 중독된 시청자들은 그것에 취해 오래동안 그 스스로 자신만의 길을 찾는 훈련을 하지 않도록 해버렸다.

 

즉, 대리만족이 주는 행복감에 취해서 자신의 삶이 진보되기를 멈춰버린 것이다. 하지만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은 무한 지급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언젠가 돈이 떨어지고 그러면 마약을 하지 못하게 된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이런 것들은 현실과 점점 동떨어져서 자신과는 아무런 공감을 주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된다.

 

내가 나이를 먹는다고 그 드라마들 속에 나오는 배역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그 TV가 원하는 공감대는 자신의 나이가 아닌 더 많은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는 나이로 고정되어진다. 결국 이것은 바로 TV로부터 버림받는 세대로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때가 되었을 떄 우린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버려져 있다. 우리 자신은 이미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목표를 가지는 것도, 그것을 추구할 정렬과 의지를 갖는 것도, 실제로 그것을 할 수 있는 시간조차도 남아 있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있다. 우리의 모습은 마약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마약 한번만 더 얻고자 하는 그 마약쟁이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린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 스스로가 어떤 종류의 마약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는지조차 짐작을 못한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것이 거울속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류의 매체이든지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만든 픽션들은 모두 인간의 공감능력을 기반으로 한다. 즉 앞서 말했던 대리만족을 해주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모두 오직 대리만족만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대리만족은 그저 감정이입의 목적이라면 좋은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생각치못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세계적으로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나 혹은 잘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영화등은 모두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자극은 우리를 좀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버릇이 된 사람들이라면 남들의 불편함이나 내가 모르는 추악한 사실에 대해서 모를수록 좋기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결국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우린 수많은 작품들로부터 얻는 절름발이식 효과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좀 더 비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