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감정적 주체로서의 나, 그리고 이성

아이루다 2013. 5. 26. 08:05

 

'희노애락' 이란 말에 대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드릴 것이다. 물론 당연히 모르는 이들도 꽤 있으리라 본다. 이 네글자의 한자는 '생노병사' 처럼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를 하고 있는 사자성어이다. 즉 이 한자어는 인간의 네가지 감정인 '기쁨', '화남', '슬픔', '즐거움'  을 뜻한다. 물론 인간의 감정을 세분화 하자면 훨씬 더 많이 구분할 수 있다. '공포', '질투', '귀찮음', '싫어함', '좋아함' 등등이다. 물론 이런 감정들 중에서 저 네글자에 속할만큼 충분히 자격이 있는 '공포'와 같은 감정은 불만이 많겠지만, 어쨋거나 한자는 네글자 조합을 좋아라 한다.

 

우리 인간은 우리 스스로는 이성적 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성적이란 말이 품은 의미는 감정을 조절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쉽게 예를 들어 너무도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이 있지만.. 살이 찌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지 위해 자신의 식욕을 제어하는 힘을 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은 네가지 감정 중 '기쁨' 이나 '즐거움' 에 속할 수 있는 행위이다.

 

그러 여기에서 이성적이란 말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가보자. 도대체 이성적인 것이란 말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흔히 '이성을 잃었다' 라는 표현을 한다. 그것은 어떠한 상태에 놓여서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조절력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너무 화가나 누군가를 충동적으로 살인한 경우가 이것에 대한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성이란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서 이성은 현재의 폭발하는 감정을 미래에 닥칠 자신의 손해 나 불리함을 이미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다양한 상황에 대한 경험과 또한 경험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책과 같은 지식의 통로로부터 얻어낸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예상하는 과정을 말한다. 즉 이성은 내가 현재 내 감정대로 했다가는 미래에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될 것이란 것을 예상할 수 있음으로서 나타나는 조절력인 것이다.

 

이런 이성의 본질적 특징으로 인해 당연히 경험이 적은 어린 나이의 인간들은 이성적 조절력이 부족하게 되고 또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 역시 미래에 잃을 것이 적기 때문에 매우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우리 스스로가 인간이 인간임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정말 확실한 도구 중 하나인 이성이란.. 결국 지식을 획득하고 판독하고 상황에 적용하는 과정일 뿐인 것이다. 즉 머리가 좀 좋아지고 또한 사회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한 조절력인 것이다. 물론 매우 중요한 생존능력 중 하나이다.

 

이성이 생존능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연히 정말로 이성이 생존에 매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시험공부를 오래 해본 이들은 그 기간동안 많은 유혹을 경험하게 된다. 쉬고싶다, 놀고싶다 등등. 하지만 이성의 힘은 오늘의 힘듬을 참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오늘 놀면 내일 시험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결국 이런 조절력은 자신의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도 이성적 행위 중 하나이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여자의 벗은 모습을 상상하는 남자들은 거기까지에서 멈춘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면 바로 감방에 가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이성을 통해 자신에게 닥칠 불행과 손해를 최소화 시킨다. 결국 이런 능력이 강한사람일수록 성공하고 쉬워서 사회는 늘 이성적인 존재를 우선시하고 또한 이성적 인간을 높게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이성적 능력은 오직 군집화되어 살아가는 그 사회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로빈슨처럼 혼자 살때 이성적으로 사는것은 물론 오래된 교육에 의해 관성적으로 그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여기까지 대충 누구나 아는 감정을 조절하려는 이성에 대해 이야기 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의 주제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보통 스스로 만들어내기 보다는 외부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 낸다. 시험에 합격한 기쁨,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 대한 분노,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슬픔, 남들과 어울리는 즐거움. 뭐 단순한 예로 희노애락을 표현했는데 과연 이런식으로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감정이 아닌게 어디 있으랴. 뭐 물론 혼자서 머리에 꽃을 꽂고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는 일명 '광녀' 들도 있겠지만.. 우린 이런 이들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감정적 실체는 외부에서 온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이 외부의 자극에 대한 정말 다양한 감정적 반응을 우린 최대한 우리 이성의 힘을 통해 조절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은 그의 책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서 인간을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나는 그의 말이 꽤나 정곡을 찌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오감을 통해 얻어내는 다양한 외부 자극을 감지하지 못하면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여기에서 우리 인간 대부분은 매우 중대한 착각을 하고 만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현재 느끼는 그 '감정'이 모두 외부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사실상 그 '감정' 이 외부 자극에 의해 시작된 것은 맞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감정은 정확히 말하면 외부자극이 아니고 그 외부자극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상태인 것이다.

 

회사 상사에게 업무적 실수로 혼이 난 어떤 직장인이 동료 직원과 함께 그 상사를 안주삼아 씹으면서 술을 마시는 일은 너무도 흔한 광경이며 그것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한다. 동창회에 갔다가 잘나가는 친구들에게 질투심을 느낀 사람들이나,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에 상대에게 화가 나는 반응, 누군가 나를 때렸을 때 느끼는 분노, 사랑하는 이을 꼭 안았을 때 느끼는 편안함과 행복함, 맛있는 음식을 입속에 넣었을 때 강렬해지는 즐거움과 포만감 등등.

 

이 모든 감정적 반응은 모두 자신에게 나온다. 그래서 실제로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린 그 감정의 반응을 자신이 아닌 그 자극 자체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내가 행복하면, 나를 행복하게 해준 상대, 내가 분노하면 나를 화나게 만든 일, 내가 슬프면 나를 슬프게 한 영화 등등 그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소중히 여기고, 화가 나는 일에 대해 분노하며, 나를 슬프게 한 영화에 평점을 10점 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자신만의 의미를 둔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여기에서 인간이 가진 단점 하나가 더해지면서 좋지 않게 흘러간다. 그것은 바로 감정의 공유 본능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그 무엇에 대해 타인과 공유하려고 매우 크게 애를 쓴다. 그래서 우리들의 대화라는 것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대화는 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공감을 원한다. 즉 자극을 준 그 원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대화 중  90%는 이런 종류의 내용을 채워진다.

 

결국 이런 경향은 인간의 의사소통 경로를 발전시킨 기술의 발전에 힘을 입어 다양한 형태의 SNS로 나타난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여러가지 의사소통 도구는 온톤 감정의 교환장으로 채워지고 만다. 하지만 우리 인간 그 자신은 자긴의 감정을 적으면서도 그 감정의 근원이 자신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맛난 음식 사진을 올린 누군가의 페북은 자신의 감정이 마치 그 음식으로부터 왔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실제로 그 음식을 혀로 느끼고 뇌에서 판단한 온전히 그 자신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 착각은 생각보다 매우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우린 보통 행복감보다 불행함을 느끼는데 더 민감하기 때문에 가끔 느끼는 행복한 순간보다 보통은 그리 행복하지 않는 순간의 연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인데 만약 그것을 모두 외부에서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고 하면 결코 그것이 해결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노, 슬픔과 같은 잃은 상태의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그 스스로 그 감정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외부라고 착각을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예를 들어보면 우린 외부 환경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사회,정치,경제.. 가정에서도 남편이나 부인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수 많은 불만사항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상대를 늘 원망하거나 분노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분노, 자신의 진급을 막는 회사내 경쟁자에 대한 분노, 집안일에 신경 쓰지지 않는 남편, 게으른 부인, 공부하지 않는 아이 등등. 그리고 그 분노를 일으킨 대상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그 감정을 느낀 그 자신에게는 그리 비판을 하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모든 나쁜 감정적 상태는 모두 외부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행동을 한다.

(아마도 그럼 저런 것들이 외부적 문제가 아니면 도대체 어디의 문제일까 라고 대부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일까? 아니다. 이것은 거의 인간 전체가 하고 있는 행동이다. 아주 소수의 '개오' 나 '깨달음' 의 경지에 올라 인간의 감정 자체를 버린 이들을 제외하고는(정말로 존재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모두 그렇다.

 

이 착각으로 인해 우린 늘 말이 많아지고 상대를 비난하며 분노에 차 싸움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실체는 모두 남의 탓이라고 믿는 그 자신에게 온전히 들어있을 뿐이다. 이러니 이것은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문제가 그 자신에게 있는데 외부와의 투쟁을 해서 해결할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감기에 걸렸는데 옆 사람에게 감기약을 먹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그런 싸움과 비난을 외부에서 해결할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원인이 된 주체와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거나 어느정도의 수준에서 타협을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그 자극의 원천을 없내는 방법을 쓰는 것이고 이것이 아주 오래된 현재로서는 유일한 해결방법이다. 그것은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쓰레기는 밖에다가 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매우 효율적이고 효과가 좋은 행동이기도 하다. 문제는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이처럼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기심, 질투 같은 감정은 정말 해결될 방법이 거의 없다. 내가 질투를 느낀 상대가 어느날 불행하게 된 경우말고는 내가 해결할 방법이 없다. 내가 싫어하는 직장상사는 내가 회사를 옮기거나 그 사람이 어느날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해결이 안된다. 이런 식으로 정말 힘든 문제들은 도저히 자체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일들이 바로 '타인' 과 관련된 일이다.

 

그래서 오래된 정신문명의 결과물들은 우리가 이런 경지를 벗어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불교, 선교, 도교와 같은 동양철학들은 모두 이런 인간의 한계점을 벗어나는 훈련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부분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가긴 한다. 결국 모든 감정의 주체는 그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그 온갖 감정의 찌꺼기를 청소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치료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방법이며 또한 이를 통해서 노,애를 버리면 결국 희,락도 같이 버려지게 되는 문제가 있다. 좋지않은 것을 버릴려면 좋은 것도 같이 버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솔직히 좀 많이 두렵기도 하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것들이 모두 버려지고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감정이 사라진 인간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살아갈까?

 

그래서 지금은 일단 그 모든 감정의 주체가 나임을 인정하는 것을 일차목표로 한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나 자신으로부터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실제로 좀 덜 분노하게 된다. 원래 인간은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고 누군가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을 당신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평하할 것인가? 상처주는 이를, 화나게 만든 이를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것들로 인해 분노하고 상처받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볼 것인가?

 

원래 문제의 해결책은 개별적 문제에 대한 각개격파보다 문제들 전체를 한번에 해결 할 수 있는 강력한 해결책 하나가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당연히 자극을 주는 개별적 사건들이 아니고 그 자극을 받아들이는 그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다.

 

결국 덜 분노하고 덜 슬퍼하며 더 즐겁고 더 기쁜 삶을 살고 싶다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즉 행복하고 싶다면.. 우리 스스로를 행복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행복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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