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보편적으로 어떤 순간에 제일 많이 불행함을 느낄까? 뭐 삶 자체가 이미 불행한 사람들이야 그런 순간이 없이 늘 불행하겠지만 그냥 보통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리 불행할 것이 없는 가정일 경우 그 불행은 어디에서 부터 가장 많이 시작될까?
나 역시 이런 행복과 불행의 사이에서 헤매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니 그저 나의 경험상 짐작으로 말해본다면 바로 주변의 행복한 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것이 바로 불행한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러움이나 혹은 약간의 질투심을 유발할 수는 있다. 특히 자신이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에 대한 소식은 더 그럴 수 있다.
아이가 공부를 못해서 매우 속상한 어떤 엄마에게 들려온 옆집 아이의 전교 1등 소식, 집안의 친지 자식, 사촌이나 오촌의 아이가 이번에 매우 좋은 학교를 들어갔다는 소식은 매우 견디기 힘든 부러움을 일으키는 것일 것이다. 동일하게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돈이 부족하기에 누군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겉으로는 축하를 해주더라도 마음 한 구석엔 나에겐 왜 저런 행운이 없는지 원망하고 또는 그 돈을 많이 번 사람의 흠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에서도 돈의 가치를 그리 높게 두지 않은 사람은 또 다른 응대를 하게 될 것이다.
옛말에 '아는게 병이다' , '모르는게 약이다' 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은 틀림이 전혀 없다. 잘 생각해보라.. 앞에서 말한 불행함을 느낀 사람들이라면 과연 그 불행함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바로 옆집에서 또한 집안에서 들려온 소식 덕분이다. 즉 옆집과 집안에서 발생한 정보가 나에게 전달되면서 그 불행함이 시작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인생은 이런 작은 사건의 연속이고 그로 인해 수 많은 연쇄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어떤 이들은 주변의 상황을 원망하면서 우울해지고, 어떤 이들은 분노에 가득 찬 심정이 되어 주변사람과 심하게 다투게 된다.
시골 마을을 생각해보자. 지금의 시골말고 예전 인심 좋다는 시골. 그 시골이 왜 인심이 좋았을까?
작은 마을은 소문이 빠르다. 하지만 마을간 교류가 적었던 과거의 우리나라 예전의 시골은 그 소문은 바로 마을 내에서만 맴돌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마을에서 안 좋은 소문 하나만 퍼져도 그 마을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어지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다들 주변인들에게 잘하고 마을 공동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공동체 의식은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마을 전체 삶에 매우 좋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점점 기술문명이 발전하면서 그 마을의 소문이 옆 마을로 퍼지는 것이 쉬워졌다. 거기에다가 도심에서부터 시작된 난개발은 도심 주변의 누군가가 그 개발의 여파로 인해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고 그런 사건의 여파로 인해 인심좋다는 말을 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점차로 마음을 닫고 공동체에 속한 삶에서 자신과 자기 가족에 속한 삶으로 그 범위를 좁혀 결국엔 점차 개인 이기주의로 변해가는 것이다.
한사람, 한가족이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그 일은 연쇄적으로 반응하기 마련이다. 결국 누구나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당연시하고 그런 여파로 인해 공동체는 파괴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시골의 삶이 변화해 온 과정이며 국제적으로도 수 많은 오지 마을의 공동체가 파괴된 과정이다. 하지만 여기엔 정말 단순한 사건이 있었을 뿐이다. 외부 마을의 소식, 가끔 찾아오는 도심지의 탐욕자들의 행동. 그리고 이것을은 모두 정보의 전달로 이어진다.
이미 충분히 개인화 된 도심에서의 삶 역시 이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어도 정보는 계속 흘러온다. TV의 뉴스, 쇼프로, 각종 토크쇼, 드라마 를 통해서도 오고, 인터넷 커뮤니티, 뉴스 등을 통해서 엄청난 정보들이 쏟아진다. 잠시라도 인터넷을 통해 뭐를 할라치면 그런 정보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자극시키는데 결국 이것을은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을 덜 행복하게 느끼게 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추가적인 소비를 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이것이 그나마 다가치 사회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돈의 가치에 매몰되어 버린 대한민국에서는 참 슬픈 현상으로 나타난다. 끝없는 상류사회의 돈자랑은 서민들의 삶을 피혜하게 하고 서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이 충분히 행복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 돈자랑을 했던 이들은 상대적인 행복감을 얻는다.
남의 행복의 나의 불행을 야기한다면, 반대로 남의 불행은 나의 상대적 행복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돈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이 있음을 자랑하고 싶어하게 된다. 그리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돈이 있는 사람들의 씀씀이를 보면서 마냥 부러워하고 불행해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어리석지만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돈때문에 불행하고 싶지 않다면 돈의 가치를 머리속에서 낮추는 방법 밖에 없다. 물론 한끼 먹는 것조차 어려움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분들 빼고 적어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라면.. 조금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불행을 걷어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능력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단지 자긴의 머리속에서 돈의 가치를 조금 걷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돈의 가치를 줄이기보다는 다른 가치를 개발하는 것도 좀 더 현명한 전략이다.
우린 어려서부터 행복해지는 법을 교육받지 못하고 자랐다. 나도 그렇고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어려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답해 가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자신이 선택할 전공과 직업을 결정하면서 결국 평생을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른 행복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냥 어려서부터 우리의 부모세대들이 결정한 행복과 삶의 목표를 주입받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린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단 한번도 교육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인 지금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교육받지 못한 부모들의 어리석은 교육정책 덕분에 더욱 심각하게 행복하지 못하게 자라고 있으며 역시 동일하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교육받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일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인데 우린 그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해 오직 돈을 많이 버는 법만을 가르침 받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끝없이 자신에게 도착하는 정보들을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수도 있다.
'팔랑귀' 라는 용어를 아는지 모르겠다. 나와 지인들 사이에서는 자주 쓰이는 용어인데.. 설명하면 귀가 얇아서 다른 사람의 말에 매우 쉽게 동조하는 사람들을 칭한다. 즉 자신이 판단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그거 좋다고 하더라' 라는 말에 앞뒤 잘 분간 못하고 달려가는 사람인데.. 실제로 우린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이 팔랑귀 증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유행도 만들어지고 대박 상품, 영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 팔랑귀의 슬픔 역시 정보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집에 오래되고 몇번 안 쓴 인라인, 자전거, DSLR 카메라등등이 있다면 당신도 역시 일종의 팔랑귀 체질이다.
우린 보통 일반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남들이 웃을 때 웃고 울때 운다. 하지만 실제로 잘 뜯어보면 모두 다 자신만의 웃음코드가 있고 자신만의 슬픔에 대한 느낌이 있는 존재이다. 즉 남들이 운다고 슬픈것도 아니고 남들이 웃는다고 웃기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살아온 삶의 경험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우린 이런 코드가 잘 맞는 이들을 친구로 사귀고 배우자로 맞아 평생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말 그대로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정형화 시킨다. 모두 행복한 포인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출처없고 과장된 정보는 우리를 계속 늘 같은 틀에 밀어 넣어 버린다. 사람들은 그 정보의 출처와 목적, 진실성 유무 조차 확인하지 못하면서 계속 말로서 말로 이어져 전달하기 바쁘다. 과연 이 정보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어려서 부터 행복하게 사는 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자란 우리들은 평생을 그것의 부재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 결론 내려진 삶의 행복도는 바로 자신이 느끼는 수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인이 경험하지 못했으니 더 높은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자녀에게도 그런 정도의 삶의 행복만 경험해도 충분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냥 밥 세끼 잘먹고, 잘벌고, 잘쓰고 살면 그것이 삶의 모든 것인냥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행동에 대한 결정을 오직 자신이 평생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판단해서 전혀 다른 삶의 있다는 것 자체를, 혹은 가끔 그런 삶을 동경했더라도 실패한 사례 하나만 들어도 바로 '에이 그럼 그렇지' 라고 판단하면서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그 정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혹은 정말 사실인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하는 착각 중 하나가 행복이 감정적으로만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행복은 지식을 기반으로 하며 경험이 양념으로 필요하다. 자전거를 타는 행복을 느끼고 싶은가? 그럼 자전거를 열심히 타야하고 또한 자전거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이 둘이 없다면 자전거를 타는 것은 그저 힘든 일이다. 행복한 얼굴로 피아노를 멋드러지게 치는 어떤 아마추어 연주자 역시 초보의 힘든 과정과 악보조차 쉽게 읽지 못하는 짧은 지식의 시기가 있었음은 분명한 것이다. 모두 이 과정을 거쳐야만 다른 행복요소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린 행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우린 사회에서 주입한 행복론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대다수에게 불행함을 느끼게 해 줄 뿐이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럼 일단 불필요한 정보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라. 미디어에 자신을 최소한으로 노출시키고 사람간의 교류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사람들 중에서는 이런 원리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정보의 교류가 그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을 만나 교유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다른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대체수단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엔 매우 힘든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포기하고 현재의 행복수준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오직 그 자신이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필요한 정보 노출로 인해 더욱 불행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는가? 물론 이것도 역시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다.
TV쯤은 한 1년 정도 혹은 2~3년 정도 안보고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처음엔 시간이 남아 주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덕에 운동을 하는 자신이, 다른 취미를 개발한 미래의 자신을 기대해볼만 하지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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