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선택의 불행 - 짜짱과 짬뽕

아이루다 2013. 7. 28. 08:48

 

내가 자주 듣는 음악 중 김광석 라이브 앨범이 있다. 혜화동 대학로에서 실제로 공연 중 이야기 되었거나 라이브로 부른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인데 그러다보니 노래말고도 김광석이 공연 중 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나 에피소드 등을 가끔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것 하나가 바로 김광석 본인이 중국집에 가면 짜장과 짬뽕을 모두 시켜서 먹는다고 했던 말이다.

 

뭐 요즘은 짬짜면과 같은 사람 엉덩이처럼 생긴 그릇을 둘로 나누어 동시에 반씩 짜장과 짬뽕을 담아 놓을만큼 발전된(?) 식문화를 제공하고 있지만 아마도 김광석이 그 공연을 했었던 1990년대 초반엔 그런 발전된 문화를 누릴 수 없었으니, 그가 말한 짜장을 선택한 후 짬뽕에 대한 그리움이나 짬뽕을 선택한 후 짜장에 대한 아쉬움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짜장과 짬뽕에 대한 사람들의 선택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선택이 주는 숨겨진 불행함을 인식하기도 한다. 즉 만약 중국집에서 짜장이나 짬뽕 중 하나만 팔았다면 거기에서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먹으면서 내가 먹지 못한 다른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현재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불만을 좀 덜 갖게 되지 않았을까? 아니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먹고 있는 음식에 완전히 만족하면서 좀 더 집중하고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은 옥션과 같은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검색을 통한 쇼핑을 경험했을텐데, 이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사고자 하는 제품의 종류가 너무도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우린 그 많은 종류의 제품에 대해 모두 알지도 못하고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 시간을 낭비해가면서 내가 사고자 하는 접시 하나, 샴푸 하나를 위해 공부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린 어쩔수 없이 브랜드, 가격, 제품의 진열 위치, 옆에 있는 판촉직원의 추천, 할인 유무, 온라인 같은 경우라면 판매자 선호도, 댓글과 같은 사용후기 등등에 의지해서 최종적으로 내가 필요한 제품을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택한 제품이 가장 가격대 성능비가 좋은 제품이거나 내가 원한는 기능을 제대로 잘 갖춘 그런 제품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의 판매를 위한 그리 좋지 않은 의도일 수도 있고, 교묘하게 포장된 아주 질 나쁜 제품일 수도 있다.

 

어떤 심리학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수십가지 동일한 종류의 제품이 진열된 곳에서 하나의 제품을 고르는 것이 단지 5개 정도의 제품 중 하나를 고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실제로 선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객은 너무 제품의 종류가 많으면 아예 사지를 못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와인을 사게 될때 이것에 대해 공감한다. 내가 아는 와인에 대한 정보는 너무 적고 내가 살 대상의 와인은 수백가지가 넘는다.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어떤 제품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린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내가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커진다는 장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나 반대로 우리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바로 '최선의 선택' 즉 베스트 오브 베스트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음을 간과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제품을 사게 되면 이것을 자신이 아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제품이 고가일 경우에는 아예 온라인에서 동호회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적으로 좋은 가격에 좋은 제품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또한 다른이들은 좋다고 해도 내가 선택한 제품이 원하는 목적에 딱 부합되는 여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신뢰를 갖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자. 나는 솔직히 이것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물론 운이 좋아 얻어 걸리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떄문이다.

 

이것이 비단 제품에서만 그럴까? 아니다. 우린 직업의 선택, 친구의 사귐에 대한 선택, 더 짧게는 매일매일 아침에 무엇을 할까에 대한 선택, 주말에 영화를 볼지, 연극을 볼지, 집에서 뒹굴지, 게임을 할지, 아이를 데리고 근처를 산책할지, 여행을 떠날지 고민하고 결정을 한다. 이런식으로 우린 단 한순간에 단 하나의 행동만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제품을 단 하나만 고르는 것과 유사하다.

 

여행을 가게될 때 가는 길이 막힌다면 우린 다양한 다른 경로를 찾게 되는데 이때 찾은 다른길이 원래 가는 길보다 더 막힌다면? 우린 선택에 대한 후회와 실제로 더 시간이 걸려서 원하는 곳에 도착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그래서 원래 길은 하나 뿐이고 그래서 막히든 안막히든 그 길로 가야하는 사람보다 같은 시간을 막혔더라도 훨씬 더 불행함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원래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그 자체를 후회하면서 '아 영화나 볼 걸'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 경우에는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고 있으며 비교를 할 수 있는 수치가 매우 단순하고 명확해서 확실하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판단을 하기가 쉽다. 길이라면 단순히 시간으로 수치화 되기 때문에 그럴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이렇게 단순화 되어서 비교가능한 선택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인간관계에서는 이것이 심하게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린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선택을 조금 독특하게 전개하는 경향도 있다.

 

우린 여기에서 우리의 재밌는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일단 첫번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절대성 부여 측면인데 이것은 연인사이에서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우리 인간이 선택하는 대상 중 가장 대상이 많은 것 중 하나일지 모르는 짝짓기. 이것은 당연히 해야하며 그러다보니 우연하게나 혹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때 관계가 잘 이어지게 되면 우린 상대에 대해 절대성을 부여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최고의 선택으로 만들어 간다. 즉 '나는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해' 라는 말에 숨겨진 선택의 절대성 부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두번째로 숨겨진 것 중 하나인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의도적 무시가 있다. 이미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사귄 후에 만난 너무도 괜찮아 보이는 상대, 혹은 그런 상대를 데리고 나온 자신의 친구의 모습을 볼 때 우린 강한 끌림을 느끼거나 혹은 질투심에 눈이 멀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것을 애써 무시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처음에 말한 내 선택의 절대화의 일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자신의 선택에 대해 불만이 쌓이면 우린 헤어지거나 이혼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내가 무인도에 있고 나에겐 내 또래의 단 한명의 이성만 존재한다고 했을 때 나에게 이런 문제가 일어날까? 물론 당연히 아닐 것이다. 왜냐면 상대가 되는 남자나 여자가 더이상 없으니 비교할 대상조차도 없으니까. 이건 일종의 자포자기적 선택일 수도 있고 자동적으로 절대적 선택이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적어도 다른 선택에 대한 가능성이 없으므로 그냥 그렇게 만족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선택은 일종의 지식적 활동의 결과이다. 즉 아는 것이 많을수록 우린 어떤 선택에 대한 힘듬을 느낄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냉장고를 하나 사는데 그냥 커다란 냉장고가 하나 필요해서 어떤 브랜드냐 상관없이 집에서 가까운 매장에 가서 크기와 가격만을 보고 결정하고 사는 사람과 각 브랜드별 특징, 장단점, AS 문제, 고장의 비율, 내가 주로 사용하고자 하는 기능에 대한 유무, 편리성 등등을 모두 인지하고 따지면 물론 좀 더 좋은 제품을 고를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최종 선택까지 가는 과정이 매우 힘들어진다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이 된다.

 

거기에 더해 원하던 제품을 산 후 얼마 후 더 좋은 조건의 제품이나 혹은 더 싸게 파는 곳을 발견하게 되면 자신이 얼마 전 선택한 최종 결정에 대해 아쉬움이 들면서 그 제품을 처음 샀을 때의 만족감이 많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때 우린 앞에서 말한 연인선택에서 나온 것처럼 절대성 부여 및 애써 무시함을 이용해서 그것을 극복한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할 폭이 좁을 것을 원할까? 아니면 많은 것을 원할까? 그리고 자신이 그것들에 대한 지식이 많길 원할까? 적길 원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선택의 폭은 넓고, 지식은 많길 원할 것이다. 그래서 다들 최대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럼으로서 우리가 더 많은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그렇지만 다른면에서 생각해보면 짜장이 없는 중국집에서의 짬뽕이나 반대로 짬뽕이 없는 중국집의 짜장처럼 우리가 단 하나만을 만족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면 정말로 우린 어떤 선택에 대해 좀 더 집중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틀린 생각일까?

 

우리의 삶에서 우린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단지 선택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을 한 후 그 선택에 대한 합리성을 부여하고 다른 선택가능한 것들에 대한 단점들을 설명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우리가 만약 자신의 아이를 선택해서 낳을 수 있게 되면 우린 지금처럼 자신의 아이에 대한 절대적 애정을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언제라고 그 아이를 바꿀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많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실제로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가장 예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좀 더 극적으로 생각해 만약 자신 그 자체도 스스로 판단해서 외모나 성격을 타고 날 수 있다면 과연 우린 자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도 단 한번만의 선택이 가능하다면 한번의 선택 후 평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지식과 경험이 쌓일수록 우린 결국 후회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실제로 선택을 한 후 그 선택이 틀리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생길 후회를 매우 두려워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기 보다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을 선택한다.

 

여기엔 매우 복잡한 심리가 숨겨져 있다. 우린 다양한 선택, 그것들에 대한 많은 지식을 원하지만 또한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이 없으면 누군가 그것을 가진 이들을 따라가는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늘 세상은 길을 밝히는 자와 그 밝힌 길을 안심하고 가는자로 나뉘는 것인데, 실제로 우린 우리 스스로가 길을 밝히길 원하기도 한다. 단지 능력이 되지 않기에 따라갈 뿐. 그런데 능력이 되지 않으면서도 그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심은 더 큰 화를 불러온다.

 

소수의 대상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다수의 대상에서 뭔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좋게 하려면 거기에 숨겨진 '최고의 선택'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자기 우월성에 대한 욕망이다. 내가 선택했으니 당연히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자기믿음이 바로 그런 뒤틀린 사고를 불러온다. 과연 내가, 우리가 무엇이기에 선택은 늘 최고가 되어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지독한 수준의 욕심이 만들어 낸 망상에 불과하다.

 

이 욕심은 나중에도 내가 선택한 것보다 나아 보이는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되어 지금 그 자신의 선택의 결과물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갖길 원하고 지금의 것을 버릴 생각을 하게 됨으로서 그 스스로 불행함 속으로 빠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신의 선택이 최고여야만 한다는 생각과, 선택 후 타인의 선택과 자신의 선택을 비교함으로서 우리는 끝없는자신을 스스로 불행의 결과로 밀어 넣는다. 이러니 그 어떤 선택이, 어떤 이미 선택해서 가진 것들이 만족스럽겠는가? 그래서 또한 우리는 끝없이 더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하기 위한 선택이 불행을 불러오는 우리 삶의 패턴이 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패턴에 자주 빠져든다.

 

행복을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은 매우 단순한다. 자신을 낮추고 기대치를 낮추면 정말 쉽게 행복해진다. 하지만 우린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는 이 정도는 즐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 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주변인들 역시 그것에 동조해준다. 그리고 만약 부족하게 되면 끊임없는 불만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부족함을 끝없이 상기한다. 왜 우린 오늘도 내가 한 선택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을까? 거기에 더해서 그런 선택을 타인들로부터 인정 받으려고 애쓰고 살아갈까?

 

오늘은 짬뽕을 먹을 수 있고, 내일은 짜장을 먹을 수 있다면 오늘의 아쉬움은 내일의 행복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도저히 오늘의 선택을 결정할 수 없다면 김광석처럼 짜장과 짬뽕을 모두 시켜먹고 둘 다 반만 먹는 대신 가격을 두배로 지불하는 가격 효율성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면 친한 지인 하나를 데리고 가서 하나씩 시킨 후 반씩 나눠먹는 지혜로움도 좋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선택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은 거꾸로 우리의 행복을 해치는 작동을 하면서 우리를 불행으로 이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다들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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